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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회화와 조각 ②] 피렌체 예술 부흥의 전성기를 이끈 '메디치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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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회화와 조각 ②] 피렌체 예술 부흥의 전성기를 이끈 '메디치 가문'
  • 김강호 기자
  • 승인 2020.07.01 13: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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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의 위대한 예술과 발명, 수백 년 동안 피렌체에서 집중돼
피렌체의 지배자, 메디치 가문의 적극적인 예술 후원 있었기에 가능
피렌체 대성당과 시내 전경 / 픽사베이
피렌체 대성당과 시내 전경 / 픽사베이

[핸드메이커 김강호 기자]

르네상스의 문화 융성을 이끈 피렌체

유럽 예술 문화를 꽃피운 가장 화려한 시대인 르네상스, 이 시대에는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등 르네상스 3대 거장은 물론 망원경을 발명한 갈릴레이 갈릴레오, 군주론을 쓴 마키아벨리와 신곡을 쓴 단테 그리고 구텐베르크, 도나텔로, 브루넬레스키 등 뛰어난 예술가와 건축가·발명가·과학자·작가·정치가들이 등장했다.

그런데 더욱 신기한 점이 있다. 오늘날에도 이름만 들으면 바로 알 수 있을 정도로 명성을 떨친 이 대부분 예술가와 발명가들이 이 르네상스 시대에서 그것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나거나 활동했다는 것이다. 짧은 기간 동안, 어느 한 도시에서 어떻게 이렇게 위대한 업적을 남긴 수많은 천재들이 등장했을까? 이것을 과연 우연으로만 보아야 할까?

르네상스 시대에 이탈리아가 활약한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꼽힌다. 그중에서는 다른 유럽 국가보다 이탈리아가 로마의 근원지로서 그 고대 문화를 이어오고 있다는 점이 있다. 또한 또 다른 로마의 후신이자 로마 문화를 계승해온 동로마 제국, 중동 국가들과 많은 교류를 나누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특히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는 수많은 지식인과 예술가가 이탈리아로 건너와 더욱 발전을 촉진시켰다.

또한 이는 이탈리아 각 도시 국가들이 지중해를 장악하여 해상무역을 관장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다른 유럽 국가에서는 보수적인 봉건체제가 자리 잡았으나,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은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도시 상인들이 강력한 힘을 떨쳤으므로, 더 자유롭고 문화 수준도 높았다.
 

진귀한 예술품이 넘쳐났던 메디치의 궁전, 팔라초 메디치 궁전 /위키피디아
진귀한 예술품이 넘쳐났던 메디치의 궁전, '팔라초 메디치 궁전' /위키피디아

피렌체의 지배자, 메디치 가문··· 예술을 후원하다

피렌체는 이탈리아에서도 특히 수준 높은 문화 예술의 중심 도시였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 융성은 오랫동안 피렌체를 지배한 가문인 메디치 가문(Medici family)의 적극적인 예술 후원 덕분에 가능했다. 메디치 가문은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피렌체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또한 3명의 교황과 2명의 프랑스 왕비를 배출하기도 했다.

원래 메디치 가문은 약업 및 금융업에 종사하던 가문이었다. 기독교가 위세를 떨쳤던 당시 시대에는 금융업이 그렇게 인식이 좋았던 업종은 아니다. 그래서 메디치 가문이 원래는 그렇게 고귀한 집안은 아니었던 듯 싶다. 하지만 곧 엄청난 능력으로 부와 권력을 쟁취하게 된다.

미천했던 출신에 대한 열등감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메디치 가는 정치권력과 예술에 대한 집착이 컸다. 하지만 메디치 가문의 인물들은 단순히 권력자로서 으스대거나, 이미지 홍보용으로 예술을 후원한 것이 아니었다. 예술을 진실되게 이해하고 인정했기 때문에 뛰어난 안목을 갖추고 예술가를 발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메디치 가문은 크게 키아리시모 2세, 대 코시모, 토스카나 대공으로 나뉜다. 이 중에서 특히 피렌체 예술의 전성기를 이끈 집안은 대 코시모였다. 키아리시모 2세는 초기 메디치 가문으로 권력을 쟁취했으나 금세 실각하여 역사의 무대로 사라졌고, 이후에 조반니 디 비치(Giovanni di bicci, 1360~1429)가 등장하여 다시 권력을 잡았다.

조반니 디 비치는 금융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여 가문을 부유하게 만들었다. 또한 중후한 인품과 평민을 위한 정책으로 존경을 받았다. 한편으로는 앞으로 소개할 1401년 산 조반니 세례당 청동문을 제작하는 일을 주도하여, 그 유명한 기베르티와 브루넬레스키의 세기의 대결을 이끌었다. 이후에는 화가 마사초를 후원하여 원근법을 창안하게 했다.
 

코시모 데 메디치의 초상화, 폰토르모 作 / 위키피디아
코시모 데 메디치의 초상화, 폰토르모 作 / 위키피디아

'학문과 예술의 수호자', 코시모 데 메디치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 1389~1464)는 아버지인 조반니처럼 놀라운 사업 수완과 정치 감각으로 계속 부와 권력을 이어갔다. 또한 아버지 덕분에 어릴 때부터 인문 교육을 열심히 받았다. 물론 코시모는 정적의 독살 시도와 추방 등도 겪었다. 그러나 이런 위기 속에서도 오히려 권력을 공고히 했다. 그것은 열렬한 민중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코시모는 예술과 학문을 사랑했다. 유럽 전역은 물론 오스만 제국에도 사람을 보내 문헌을 수집했고, 피렌체에 수많은 도서관과 아카데미를 세웠다. 수많은 학자들이 코시모의 지원 아래 자유로운 연구를 진행할 수 있었고 학문 수준을 크게 끌어올렸다. 또한 코시모 스스로도 고전 연구에 매달려 라틴어를 직접 공부하고 강의에 참석할 정도였다.

그뿐만 아니라 코시모는 수많은 예술가를 후원하여 역사에 길이 남을 작품을 만들게 했다. 프라 안젤리코에게는 르네상스의 가장 뛰어난 종교화를 그리게 했으며, 안젤리코의 작품은 후에 레오나르도 다빈체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또한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에게는 '피렌체 대성당의 돔'을 완성하게 했으며, 건축가 미켈로초에게는 '산 마르코 수도원', '팔라초 메디치 궁전' 등 오늘날까지도 유명한 건축물을 만들게 했다.

특히 조각가 도나텔로(Donatello, 1386~1466)가 꽃피운 예술은 코시모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도나텔로는 동성애자였기에 많은 사람의 혐오를 샀고 가난에 시달렸다. 하지만 코시모는 도나텔로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적극 후원했다. 도나텔로는 죽을 때의 유언으로 코시모 옆에 묻어달라고 하기도 했다.
 

도나텔로의 청동 다비드상 / 위키피디아
도나텔로의 청동 다비드상 / 위키피디아

'위대한 로렌초', 로렌초 데 메디치··· 다빈치와 미켈란젤로를 발굴하다

코시모의 아들인 피에로 디 코시모 데 메디치(1416~1469)도 계속 권력을 장악했고, 아버지처럼 도나텔로와 보티첼리 등 예술가를 후원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인 로렌초 디 피에르 데 메디치(Lorenzo di Piero de Medici, 1449~1492)가 아버지를 이으면서 피렌체 예술은 다시 한번 전성기를 맞이한다.

'위대한 로렌초'로도 불리는 로렌초는 계속 학교 설립과 학문 연구, 문화재와 고전 수집 등을 지원했다. 또한 자신이 직접 작품성 있는 훌륭한 시를 쓰기도 했다. 한편 자신의 궁전인 메디치 궁과 산 마르코 수도원 사이의 정원에서 도나텔로의 제자인 베르톨도를 고용하여 수많은 그림과 조각을 세우도록 했다.

불후의 천재 예술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를 발굴한 것도 바로 그였다. 어린 소년이었던 미켈란젤로는 로렌초가 고용한 조반니의 제자로 들어가 조각을 배웠는데, 그의 재능을 로렌초가 한눈에 알아본 것이었다. 로렌초는 그의 재능에 크게 감탄해 미켈란젤로를 특별히 양자로 삼을 정도로 아꼈고, 4년 동안 메디치 궁에서 작업하도록 해주었다.
 

로렌초 데 메디치의 초상화, 라파엘로作 / 위키피디아
로렌초 데 메디치의 초상화, 라파엘로作 / 위키피디아

물론 미켈란젤로가 로렌초의 사랑을 진심으로 받아들인 것 같지는 않다. 어쨌든 미켈란젤로는 4년 후에 피렌체를 떠났다. 이후에도 그의 작품과 편지들을 통해 메디치 가문의 독재를 여러모로 비판적으로 바라봤음을 알 수 있다. 마치 비슷한 시기에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로렌초를 싫어했으면서도 생존을 위해 군주론을 헌정한 것처럼 말이다.

자유의 정신이 가득한 피렌체 시민들은 점차 메디치 가의 통치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게 됐다. 로렌초와 메디치 가문은 실제로 권력에 집착하여 많은 숙청과 억압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로렌초의 예술 사랑 만큼은 인정해 줄 만 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재능에도 관심을 가진 것이 그였다. 로렌초는 밀라노의 로도비코 스포르차 공작에게 다빈치를 추천하여 다빈치가 후원을 받을 수 있게 했다.

하지만 로렌초는 그의 선조들과 달리 사업에는 별다른 재능을 가지지 못했다. 또한 말년에는 질병으로 건강이 쇠약해지면서 성격도 공격적이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결국 로렌초는 43살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그리고 2년 후에는 유럽 전역에 지점을 둘 정도로 번성했던 메디치 은행이 파산하고, 피렌체는 프랑스에 정복당한다.
 

우피치 미술관에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관람하는 사람들 / 픽사베이
우피치 미술관에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관람하는 사람들 / 픽사베이

메디치 가문에 대한 평가, 독재자인가? 예술의 선도자였나?

하지만 메디치 가의 흥망성쇠는 계속됐다. 이후에는 피렌체를 포함한 토스카나 지방을 장악하여 토스카나 대공국을 세웠고, 코시모 1세(1519~1574) 등 몇몇 인물들은 다시 가문의 영광을 재현하기도 했으며, 계속 예술을 후원했다. 하지만 코시모 1세의 예술 후원은 가문의 정통을 세우고 과시하려는 정치적인 의도가 다분했다.

메디치의 쇠퇴는 꾸준히 이어졌고 결국 안나 마리아 루이자 데 메디치(Anna Maria Lusia de Medici, 1667~1743)를 끝으로 가문은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마리아 루이자는 여성이었지만, 가장 총명한 인물이었기에 토스카나 대공국의 후계자로 지명됐을 정도였다. 하지만 한 개인이 시대의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결국 토스카나 대공국은 합스부르크 왕가에게 넘어갔다.

하지만 메디치 가문의 방대한 양의 예술 작품은 그대로 마리아가 상속할 수 있게 됐다. 마리아는 죽기 직전 유언으로 이들 컬렉션을 피렌체에서 반출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모두 기증했다. 마리아의 뜻에 따라 메디치 가의 컬렉션은 오늘날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으로 이어진다.

메디치 가문에 대한 평가는 갈린다. 자유로운 피렌체의 정신을 억압했던 독재자였다는 평가도 있지만, 르네상스의 예술 부흥을 이끈 든든한 후원자라는 평가도 공존한다. 메디치 가문이 권력을 위해 저질러온 악행을 보면 민주주의와 알맞은 가문이 아니었던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하지만 코시모와 로렌초, 안나 루이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메디치 가문의 인물이 있었기에 피렌체가 오늘날까지 관광객이 모여드는 세계적인 문화예술 도시가 되었고 유럽 문화의 전반적인 부흥에도 도움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학계에서도, 일반인들 사이에도 메디치 가문에 대한 평가는 갈리고 있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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