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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회화와 조각 ⑧] 벤베누토 첼리니, 범죄자의 생애 속에서 꽃피운 예술의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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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회화와 조각 ⑧] 벤베누토 첼리니, 범죄자의 생애 속에서 꽃피운 예술의 모순
  • 김강호 기자
  • 승인 2020.08.12 09: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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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렴치한 범죄와 예술적 재능을 반복한 첼리니의 생애
재능과 인성은 비례하지 않을까
피렌체에 세워진 셀레니의 동상 / 픽사베이
피렌체에 세워진 셀레니의 동상 / 픽사베이

[핸드메이커 김강호 기자]

자서전은 믿을 수 없지만 가치가 있다

우리나라와 달리 서양에는 자서전이 상당히 인기 있는 문학 장르이다. 정치인, 스포츠 스타, 연예인들은 으레 자서전을 내는 것이 관례와 같다. 상당한 수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옛날부터 그랬다. 서양에서는 다양한 위인들도 자서전을 남겼다. 그래서 역사적인 인물의 자서전은 가치 있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자서전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어찌 남들이 보라고 쓴 책에 자신의 치부와 비밀을 솔직하게 다룰 수 있을까? 예를 들어 희대의 난봉꾼이라고 평가받는 카사노바(Giacomo casanova, 1725~1798)의 자서전은 그 가치가 뛰어나지만, 스스로에 대한 미화 수준과 왜곡이 심해 학계에서는 내용을 그대로 믿지는 않는다.

그런데 450년 전 르네상스 시대에 주목할만한 자서전이 하나 있다. 바로 르네상스의 거장인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 1500~1571)의 자서전이다. 그는 귀금속 세공사와 조각가로서 르네상스 시대에 가장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또한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받은 몇 안 되는 후계자이기도 했다.

그런데 스스로 밝혔던 자서전을 봐도 그는 업적과는 달리 인성 면에서는 파탄자 그 자체였다. 살인, 탈옥, 간통, 횡령, 강도 등 온갖 강력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그의 자서전이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높은 문학적 가치를 지녔다고 평가되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심지어 괴테 같은 위대한 작가까지 극찬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1537년 장 드 로렌 추기경을 위해 제작한 메달 / 위키피디아
1537년 장 드 로렌 추기경을 위해 제작한 메달 / 위키피디아

범죄와 예술의 반복이었던 첼리니의 생애

첼리니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악기를 제작하고 연주했던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음악가로 키우려 했다. 실제로 첼리니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뛰어난 플롯 연주 실력도 갖추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피렌체의 한 금속공예 장인의 공방에서 도제로 활동했다. 그러나 이후에 여러 차례 소란을 일으켜 사형선고까지 받았고 로마로 달아났다.

그런데도 그의 손재주와 예술성이 그리도 뛰어났는지 교황과 왕, 여러 유력 성직자와 귀족을 위해 일할 수 있었다. 1528년에는 곤차가 추기경의 도장을 만들었고, 1529년에는 교황청에서 다양한 금속 공예품을 만드는 주조소의 책임자가 되었으며,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의뢰로 1530년에서 1531년 사이에 아름다운 쇠 단추를 제작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첼리니는 다른 경쟁자 금세공가를 죽이고 공증인에게 부상을 입히고 달아나는 등 계속해서 범죄를 저질렀으며 떠돌이 생활을 전전한다. 프랑스로 간 첼리니는 1538년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를 위한 초상 메달을 제작했다. 또한 횡령죄로 감옥에 갔다가 에스테 추기경의 도움으로 석방되고 그를 위한 도장을 제작하기도 했다.

첼레니의 생애는 범죄와 떠돌이 생활의 연속이었다. 1527년에는 로마 방어 전투에 군인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이때 부르봉 공작 카를 3세를 사살하여 용맹함을 높이 평가받았으며 덕분에 교황청에게 유럽 전역을 갈 수 있는 여행 자격을 허락받았다. 첼리니를 싫어하는 사람도 많았으나, 권력층의 보호 덕분에 그는 계속 살아남을 수 있었다.

작품은 이러한 무뢰한의 생활 동안 틈틈이 해나간 것이었다. 말년에는 '금세공에 관하여', '조각에 관하여' 등의 논문을 썼고 특히 1558년~62년에 걸쳐 자서전을 썼다. 그는 말년에 메디치 가문의 보호 아래 피렌체에서 그나마 얌전하게 살았다고 전해진다.
 

소금그릇 / 위키피디아
소금그릇 / 위키피디아

첼리니의 대표작과 예술적 의의

그의 역대급 명작으로 평가받는 '소금 그릇', 밑변은 32cm, 높이 25cm의 작은 작품이지만 르네상스 최고의 금세공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1542년 프랑수아 1세를 위해 만든 것으로 약 3년의 제작 기간을 거쳤고 금과 유리, 상아, 에나멜을 이용해 제작됐다. 이 작품은 2003년 비엔나 박물관에 보관되다가 도난을 당하고 3년 후에 겨우 찾아낸 일도 있었다.
 

메두사의 머리를 든 페르세우스 / 위키피디아
메두사의 머리를 든 페르세우스 / 위키피디아

'메두사의 머리를 든 페르세우스'는 1545년부터 1556년까지 메디치 가의 코시모 1세를 위해 제작한 청동 작품이다. 오늘날에 아주 유명한 오페라인 '벤베누토 첼리니'가 이 작품을 주제로 하고 있다. 내용은 연인 테레사를 향한 첼리니의 사랑과 페르세우스 동상을 완성해가는 과정을 다룬다.
 

퐁텐블로의 님프 / 위키피디아
퐁텐블로의 님프 / 위키피디아

첼리니는 원래 귀금속 세공을 전문으로 했지만, 젊은 시절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을 보고 크게 감탄했다고 한다. 그래서 조각에도 많은 노력을 들였다고 한다. 1542년에서 1544년 만든 반달 모양의 청동상인 '퐁텐블로의 님프'는 루브르 궁 입구에 전시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역시 엄청난 기교적 수준을 보여준다.

첼리니의 예술을 굳이 정의 내린다면 매너리즘(mannerism)이라고 할 수 있다. 이탈리아어로는 '마니에리스모'라고도 하는 이 방법은 우리가 알고 있는 매너리즘이랑은 조금 다른 의미이다. 기존 르네상스의 방식을 계승하되, 자신만의 독특한 양식(매너와 스타일)으로 작품을 구현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첼리니의 작품들은 기존 다른 조각과는 구분된다. 자신만만함과 괴짜로 살아온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담아냈고 온갖 기교와 과장을 뽐냈다. 첼리니는 자서전에 "나는 조각상이 아닌, 살과 영혼이 있는 사람임을 증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라고도 썼다. 그의 독특한 예술 세계를 이해하게 해주는 말이 아닌가 싶다.
 

1562년 감옥에 있든 첼리니가 십자가 환상을 보고 제작한 '십자가 고난상' / 위키피디아
1562년 감옥에 있던 첼리니가 십자가으 환상을 보고 제작한 '십자가 고난상' / 위키피디아

재능과 인성의 부조화, 삶은 불공평하다?

첼리니의 자서전을 보면 그는 자신의 범죄들을 솔직하게 기록했지만, 그것의 표현은 아주 허풍스럽고 드라마틱 하게 꾸며졌으며, 반성의 기미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첼리니는 마지막에 자신의 인생은 성공적이었으며 천국에 들어갈 거라고 평가했다. 사실 생애 전반을 범죄로 채운 그가 당연히 그것을 잘못했다고 생각했을 리는 없다.

첼리니의 예술 작품은 대부분 권력층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들이었다. 그럼으로써 그는 권력층에 아부하고 범죄를 사면 받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첼리니의 예술 세계 자체도 위대하다고 평가받지만, 그의 이러한 파란만장한 생애가 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들어준 측면도 있을 것 같다.

좀 더 첼리니가 마음을 잡고, 얌전하게 예술에 집중했으면 그 재능이 훨씬 더 위대하게 꽃피워지지 않았을까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의 타고난 본성이 그럴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첼리니를 보면 정말 인성과 재능이 꼭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느낀다.

아카데미상 8개 부문을 수상한 명작, '아마데우스(1984)'에서는 인성은 좋지 않지만, 엄청난 재능을 가진 모차르트가 등장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궁정음악가 살리에리가 이런 모차르트를 질투한다. 영화 속 모차르트는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살리에리의 음모로 인해 가난에 시달리고, 제대로 예술을 꽃피우지 못한다.

반면 첼리니는 자신의 죗값을 제대로 치르지 않은 덕분에 무수히 많은 예술 작품을 남겼다. 이런 아이러니가 있을까? 왜 인성과 열정 그리고 재능은 일치하지 않는 걸까? "왜 신은 나에게 욕망만 주고 재능을 주지 않았느냐"라며 한탄했던 살리에리의 대사가 자꾸만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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