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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회화와 조각 ③] 세기의 조각 라이벌 대결, 기베르티 VS 브루넬레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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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회화와 조각 ③] 세기의 조각 라이벌 대결, 기베르티 VS 브루넬레스키
  • 김강호 기자
  • 승인 2020.07.08 13: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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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산 조반니 세례당의 조각상을 차지하기 위한 양보할 수 없는 대결
세기에 남을 대결의 결과가 두 천재의 운명을 뒤바꾸다
피렌체 대성당, 좌측 하얀 지붕의 조그만 건물이 세례당이다 / 픽사베이
피렌체 대성당, 좌측 하얀 지붕의 조그만 건물이 세례당이다 / 픽사베이

[핸드메이커 김강호 기자] 이탈리아 피렌체의 두오모 광장에는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피렌체 대성당)'이 있다. 또한 그 옆에는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자 예배의 중심지였던 산 조반니 세례당이 있다. 피렌체 대성당 위에 얹혀 있는 빨간 벽돌 돔, 그리고 세례당 동쪽과 북쪽문의 조각 부조상은 오늘날에도 수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명소이다.

이 작품들은 바로 로렌초 기베르티(lorenzo ghiberti, 1378~1455)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1377~1446)가 만든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 얽혀있는 재밌는 이야기가 있다. 둘은 원래 라이벌이었고, 세례당 문의 부조상을 만들기 위해 역사적인 대결을 펼쳤다는 것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천재적인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베키오 궁전 벽화를 두고 세기의 대결을 펼친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좀 더 이른 시기에 이미 이들의 선배 격인 조각가들이 영혼을 담은 대결을 펼쳤다.
 

기베르티의 '이삭의 희생' / 위키피디아
기베르티의 '이삭의 희생' / 위키피디아
브루넬레스키의 '이삭의 희생' / 위키피디아
브루넬레스키의 '이삭의 희생' / 위키피디아

두 천재 조각가의 대결, '이삭의 희생'을 제작하라

두 예술가는 왜, 어떻게 대결을 펼쳤던 것일까. 1401년 당시 시대는 전 유럽을 휩쓴 흑사병의 상처를 회복하던 때였다. 피렌체도 도시 곳곳을 새롭게 단장했는데, 특히 조반니 세례당을 새롭게 치장하기 위해 공모를 진행했다. 교체 대상은 문 위에 있는 청동 조각상이다.

7명의 내로라하는 미술가가 이 공모에 참여했지만 최종적으로 결승에 남은 사람이 바로 기베르티와 브루넬레스키였다. 기베르티는 당시 22살의 젊은 견습 화가였으며, 브루넬레스키는 한 살 더 위인 금세공사였다. 결승에 오른 두 사람에게 34kg의 청동판 4개가 제공되어, 1년 내에 4엽 장식으로 제작하라는 과제가 안겨졌다.

표현할 주제는 구약성서에서 나오는 '이삭의 희생'이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하나뿐인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했다. 결국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칼로 이삭을 찌르려는 순간,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저지했고 대신 근처 숫양으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똑같은 주제를 서로 다르게 묘사한 두 작가의 작품은 자신의 예술 성향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기베르티의 작품은 배경 형상을 낮게 만들어 입체감이 느껴지면서, 전면의 등장인물이 두드러지고 현장감 있는 상황이 연출된다. 한편 브루넬레스키의 작품은 속이 꽉 차있고 강렬한 인상을 품긴다.

기베르티가 사용한 기법은 유실 왁스 기법(할로우 캐스트)이다. 밀랍으로 부조를 채우고 다시 녹여 없애는 방빕이다. 덕분에 속이 비어 청동 7kg를 절약했다. 아마 이 부분이 비용 측면에서 높은 점수를 얻은 것 같다. 반면 브루넬레스키는 속이 꽉 찬 무거운 개체를 따로 제작하여 청동판 위에 붙였다. 결국 최종 승자는 기베르티가 되었다.
 

피렌체 세례당, 사이로 피렌체대성당이 보인다 / 픽사베이
피렌체 세례당, 사이로 피렌체대성당이 보인다 / 픽사베이

세례당 북쪽문과 동쪽문에 영혼을 바친 기베르티

원래 기베르티는 아버지를 따라 금세공사로 도제 생활을 했다. 그래서 입체적인 금속 제품을 만드는 데에 익숙했다. 하지만 흑사병이 돌자 피렌체를 잠시 떠나 리미니에서 프레스코 벽화를 그리는 견습 화가가 되었다. 화가의 길을 걷게 된 기베르티에게 찾아온 브루넬레스키와의 대결은 다시 조각가로서 명성을 떨치는 일생일대의 전환기가 되었다.

1403년 기베르티는 피렌체와 세례당 동쪽 문에 28개의 부조를 만드는 계약을 체결했다. 21년 후인 1424년, 그리스도의 생애를 묘사한 28개 패널로 장식한 청동문을 완성했다. 남쪽문에는 안드레아 피사노(1290~1349)가 세례 요한의 일생을 묘사해 만든 청동 부조상이 있었다. 기베르티는 선배 피사노를 참고했으나, 원근법과 깊이가 훨씬 자연스러운 조각을 완성했다.

기베르티는 작품 제작을 후원했던 메디치 가문과 수공업 길드 측이 북쪽 청동문을 만들어 달라고 한 새로운 제안도 받아들였다. 이때 더 자율적인 권한을 얻어 직사각형 패널 10개의 새로운 문을 완성한다. 문은 금박을 붙여 고부조로 조각하여 화려함을 더했으며, 대담하고 자유로운 구성을 통해 놀라운 깊이감을 보여준다.
 

북문 진품,
동문 진품  / 위키피디아
천국의 문 / 위키피디아
'천국의 문', 동문의 28개 패널 부조 상과 비교해도 훨씬 화려하다 / 위키피디아

완성된 이 작품은 북문으로 사용하는 기존 방안 대신, 기존 28개 부조를 북쪽으로 옮기고 세례당 동쪽 문에 부착했다. 원래는 구약성서 내용을 성당과 세례당을 연결하는 통로에 넣는 것이 관례였으나, 워낙 작품의 아름다움이 뛰어나 피렌체 측에서도 성당과 마주 보고, 사람이 많은 동문에 부착하는 것이 옳다고 여긴 것 같다.

후대에 미켈란젤로는 동쪽 문의 황금빛 부조를 보고 "너무나 아름다워 천국 입구에 그저 서 있고 싶다"라고 극찬했다. 이후 이 문은 미켈란젤로의 표현에 따라 '천국의 문(Gates of Paradise)'이라는 별칭이 붙었으며, 오늘날까지 피렌체의 으뜸가는 관광 명소가 되었다. 물론 현재 동문과 북문의 부조상은 모조품이다. 진품을 계속 두었으면, 훼손을 막지 못했을테니 말이다. 두 문의 진품은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천국의 문 세부 / 픽사베이
천국의 문 세부 / 픽사베이

브루넬레스키의 건축가로의 전향, 불후의 역작을 남기다

그렇다면 브루넬레스키는 어땠을까? 브루넬레스키는 이번 대결의 패배에서 많은 상심을 느낀 듯싶다. 한 이야기에 따르면 심사위원들도 사실은 두 작품에 우열을 쉽게 가리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공동작업을 건의했지만, 자존심이 상한 브루넬레스키가 거절했고 결국 로마로 유학을 떠났다.

이때 그와 함께한 친구는 르네상스 또 한 명의 거장, 도나텔로(Donatello, 1386~1466)였다. 도나텔로는 주로 로마의 고대 조각을 연구했지만, 브루넬레스키는 분야를 바꿔 로마 고대 건축을 공부했다. 이삭의 희생 대결이 기베르티는 물론 브루넬레스키의 앞날도 바꾼 것이다. 브루넬레스키는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야 피렌체로 돌아왔다. 그리고 가장 위대한 역작인 피렌체 대성당의 붉은색 벽돌 돔이 제작된다.

당시 피렌체 대성당은 1296년 이미 착공했으나 100년이 훌쩍 넘어서도 돔을 만들지 못했다. 로마시대 이후로는 이렇게 거대한 돔을 지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브루넬레스키는 로마의 거대한 판테온 돔을 연구한 결과를 바탕으로 자신이 찾은 방법이 있다며 사람들을 설득했고 1420년에 작업을 시작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브루넬레스키는 명확한 답을 내놓지 않았고, 대신 달걀을 세워보겠다면서 달걀을 반쯤 깨서 세우게 했다. 사람들이 "이렇게 해도 될 줄 알았으면 우리도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하자, 브루넬레스키는 "그래서 나도 돔을 세우는 방법을 알려줄 수 없다. 당신들이 따라 할 것 아니냐"라고 말한다. 이 이야기는 콜럼버스의 이야기로 유명하지만, 원래는 브루넬레스키의 이야기라고 한다.

브루넬레스키는 거대한 돔을 만들 때, 가장 큰 고민이었던 돔의 하중을 안쪽에 가벼운 내부 돔을 따로 만들어 힘을 분산시켰다. 또한 돔을 팔각형으로 설계했고, 벽돌과 석재를 헤링본(herring born, 청어 뼈 모양) 방식으로 쌓아 견고함을 더했다. 라이벌들은 그의 시도가 실패할 거라고 조롱했지만, 결국 1436년, 106m 높이의 8각형 돔이 우뚝 솟아올랐다.

이 돔 작업에는 또 한 번 브루넬레스키와 기베르티의 악연이 있었다. 피렌체에서 브루넬레스키 외에도 공동 책임자를 임명했는데, 그중에 기베르티가 있었던 것이다. 이에 속이 상한 브루넬레스키는 꾀병을 핑계로 출근하지 않았다. 결국 공사를 지휘할 능력이 없었던 기베르티는 손을 뗐고 피렌체는 브루넬레스키를 설득하여 데려왔다.
 

피렌체 대성당의 붉은 돔 브루넬레스키作 / 픽사베이
피렌체 대성당의 붉은 돔  / 픽사베이

천재들의 경쟁심 덕분에 풍성해진 르네상스 문화

브루넬레스키는 이렇게 20년 전에 당했던 패배를 통쾌하게 갚아주었다. 기베르티가 브루넬레스키를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알 수 없지만, 브루넬레스키는 기베르티를 상당히 싫어했던 것 같다. 하지만 후대에 와서 평가해보면 두 천재의 경쟁심이 서로가 불후의 역작을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고, 르네상스를 열었다.

브루넬레스키는 최초로 원근법을 창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술에 자주 쓰이기 때문에 화가가 만들었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건축에서 먼저 탄생했던 것이다. 브루넬레스키는 자신의 작품을 의뢰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작품 설계도면을 손에 들고 실제 건물과 함께 거울에 비추면서 적절한 위치와 크기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이런 수많은 발명은 경쟁 덕분에 가능하다. 경쟁은 더 나은 발전을 위한 원동력이 될 수 있다. 비록 그 경쟁자에 대한 감정이 좋은 것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미켈란젤로와 다빈치도 서로의 재능을 시기했고, 서로를 뛰어넘을 수 있는 더 나은 작품을 만들고자 목숨을 걸다시피 했다.

기베르티와 브루넬레스키는 미켈란젤로보다 23살 많은 다빈치보다도 각각 75년, 76년 먼저 태어났다. 미켈란젤로와 다빈치보다 몇 세대 앞선 선배인 것이다. 이미 이전에 이렇게 수많은 예술가들이 르네상스의 밑걸음을 닦아놨기 때문에, 다빈치와 미켈란젤로도 이들을 참고하여 더욱 뛰어난 예술혼을 펼칠 수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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