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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했던 700년 백제의 금속공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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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했던 700년 백제의 금속공예
  • 김강호 기자
  • 승인 2018.07.04 16: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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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했던 역사, 그 시대의 공예
@mentaldesperado

[핸드메이커 김강호 기자] 고구려의 문화가 강인함, 신라 문화는 소박함이라는 단어로 상징된다면 백제의 문화는 화려함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찬란했던 백제의 문화는 일본까지 전파돼 일본의 문화발전에도 지대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약 700년의 역사를 이어오며 융성하게 꽃피운 백제 문화에는 특히 왕실과 귀족을 상징하는 화려한 금속공예도 있었다. 특히 백제 금속공예는 무령왕릉과 나주 신촌리, 익산 입점리 무덤 등에서 많은 공예품들이 출토된 덕분에 그 활약상을 잘 파악할 수 있게 됐다. 백제의 우아하고 화려했던 공예 기술을 더듬어보자

백제의 금속공예는 세련되고 화려한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한성(서울) 시대에는 귀걸이와 목걸이 등이 주로 제작됐지만 웅진(공주) 및 사비(부여) 시대에서는 팔찌, 반지, 허리띠 등 더욱 다양한 종류가 제작됐다.

백제인들은 철이나 청동 등 표면에 금, 은, 동을 편이나 선을 만들어 박아 넣는 입사 기법을 비롯해 속을 녹이고 틀에 넣어 굳히는 주조, 두드려서 모양을 만드는 단조, 그리고 상감, 도금, 누금, 칠보, 투각 등 당시로는 상당히 진보된 다양한 기술들을 사용했다.
 

백제 금동신발 @mentaldesperado

백제 금동신발은 얇은 동판 2~3장으로 신발을 만들어서 능형의 구획에 타출 무늬를 장식한 다음, 바닥에 큰 못을 박았다.

익산 미륵사지에서 나온 금동 사리기는 정으로 두드려 문양을 내는 어자문 기법을 사용해 제작됐다. 6~8세기 당나라와 일본, 신라 등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기법이지만 작은 알 모양의 어자를 성글게 채우면서 괴수의 모양같은 당초 무늬와 어울리도록 구성했던 독특한 특징이 있다.
 

백제 금동관 @Gihoon81

백제의 금동관은 금판을 오리고 무늬를 새겼고 사슴 및 나뭇가지 모양의 세움장식과 유리구슬 등을 달아 만들었다.

백제 금동대향로 @Good friend100 de Wikipedia en inglés


백제 금동대향로는 백제 금속공예의 절정이라고도 한다. 능산리에서 출토된 이 유물은 용 한 마리가 막 피어날 듯한 연꽃 봉오리를 물고 있는 듯한 형상을 하며 아래에는 신선을 상징하는 각종 인물과 동물도 정교하게 조각되어 당시 백제인의 예술감각과 도교와 불교가 어우러진 사상을 엿볼 수 있다.

백제의 우수한 금속공예는 일본에 큰 영향을 주었다. 당시 백제는 사찰, 불상, 향로 등을 제작하기 위한 노반박사, 와박사 등의 공예기술자들을 일본에 보냈고 현재 남아있는 일본의 수많은 금속공예 작품들이 백제의 기술로 만들어진 것들이 많다. 특히 일본에 전해진 칠지도는 새김 글씨를 금으로 상감했고 백제의 다양한 금속 정련과 주조기술을 드러내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pressapochista


백제인들의 문화는 낙랑, 고구려, 일본, 중국 등 다양한 지역의 특징들을 모두 보여 개방성과 국제성을 띠고 있다. 하지만 여러 문화를 잘 융합하고 자신만의 선진적인 사상과 기술로 재정립했다. 백제는 중국과 고구려의 기술을 받아들이면서도 이런 문화를 신라와 일본에도 전파하고 교류하며 문화의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오늘날 백제의 공예기술이 많이 잊진 것은 안타깝지만 익산 등에서 백제문화유적 산업과 발굴이 활발하게 진행되는 중이다. 또한 부여, 공주 등 백제 문화권 지역에서 다양한 공방과 공예가들이 백제의 공예 기술을 재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동아시아 문화교류의 역할을 해오며 찬란하게 빛났던 700년 백제의 문화가 다시금 복원되어 후손들에게 설 수 있게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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