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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장하고 강인한 고구려인들의 벽화, 그들의 예술성과 생활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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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장하고 강인한 고구려인들의 벽화, 그들의 예술성과 생활을 엿볼 수 있다
  • 김강호 기자
  • 승인 2018.07.19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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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했던 역사, 그 시대의 공예
수렵도

[핸드메이커 김강호 기자] 700년 동안 만주를 호령했던 강인한 나라, 고구려는 오늘날 아쉽게도 많은 것들이 잊힌 나라이다. 남북으로 분단됐기에 고구려의 터전이 몰려있는 북한에서 연구가 쉽지 않은 점도 있으며 또한 많은 유물들이 사라졌다. 고구려는 굴식돌방무덤 구조를 사용했기에 유물 도굴에 취약했다는 점도 있다.

고구려에서 가장 많이 남아있는 것은 회화 작품이다. 특히 고구려의 고분벽화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뛰어난 예술작품으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고구려의 당시 생활 문화상을 파악하는 데에도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고구려의 고분벽화는 중국 및 여러 북방민족의 영향을 받았는데, 초기 (350~450), 중기 (450~550), 후기 (550~668)로 특징을 구분할 수 있다. 그 이전 시대에는 벽이 아예 없었던 돌무지무덤 방식을 사용했으므로 남아있는 그림도 거의 없었다.

안악 3호분 행렬도

초기 벽화에는 초상화 및 생활 모습을 많이 살펴볼 수 있다. 평안남도 덕흥리 고분 벽화와 황해남도의 안악 3호분에 있는 다양한 벽화가 대표적이다. 특히 안악 3호분에는 묘주의 얼굴이 잘 묘사된 초상화가 있으며 행렬도를 보면 수백 명의 수많은 사람들이 각각 다른 얼굴을 하고 생동감있게 표현되어 뛰어난 회화적 표현기법을 보여준다.

쌍영총 거마행렬도

중기 벽화는 사람의 얼굴을 크게 그린 초상화는 거의 없어졌으며 풍속 및 불교, 도교의 흔적을 받은 작품이 많았다. 평양의 쌍영총, 집안성의 무용총, 삼실총 등이 대표적이며 수렵도, 씨름도 등 다양한 풍속화가 존재한다.

강서대묘의 사신도 그중 현무 그림

평양의 진파리 1호분과 강서대묘, 사신총 등이 대표적인 고구려 후기에는 종교적 의미가 강해졌다. 강서대묘의 사신도와 같이 음양오행의 수호신들이 등장하는 등, 도교의 영향이 커진 것으로 보인다.

벽화를 그리는 방법은 벽이나 천장에 회벽칠없이 바로 안료를 발라 그림을 그리는 조벽지법과 회를 입혀서 잘 다듬어 낸 면에 그림을 그리는 화장지법이 있다. 또한 화장지법에는 회칠이 마르기 전에 그림을 그리는 습지벽화법과 회가 마른 후에 그림을 그리는 건지벽화법이 있다.

고구려는 초기까지 건지벽화법을 사용했는데 건지벽화법은 선명도가 높으나 장기간 빛과 공기, 습기를 받으면 변색, 탈색이 된다. 중기 이후부터는 선명도는 다소 떨어지지만 안료의 산화와 퇴색이 덜해지는 습지벽화법을 함께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후기에는 조벽지법 방식을 사용했다. 조벽지법은 목필이나 죽필로 석면에 찍어누르는 식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선명도가 아주 좋았다.

벽화를 그리는 안료는 석청, 석황, 백록, 연분, 금, 자토 등 광물질 가루를 해초를 달여 만든 태교, 동물성 아교와 같은 접착제와 같이 사용해서 다양한 색감과 농담을 표현할 수 있었다.

이렇듯 고구려인들은 다양한 주제가 담긴 벽화를 제작했고 시대에 따라 다양한 기법을 활용하며 예술적 가치가 높은 작품들을 남겼다. 특히 579년~631년에는 담징이라는 승려화가가 일본에 건너가 호류사의 금당 벽화 등 다양한 그림을 그렸고 회화 도구와 기법 등의 제작법을 전했다.

고구려는 비록 다양한 나라의 영향을 받았지만 자신들만의 기법으로 재탄생시켰고 고구려의 당시 문화를 생생히 잘보여주는 벽화를 남겼다. 호전적이고 강인한 줄만 알았던 고구려인들에게는 이렇듯 섬세한 예술정신도 숨어 있었던 것이다. 최근 남북관계가 호전됨에 따라 학계 교류도 활성화되지 않을까 싶다. 남북이 협력해 고구려의 문화 연구가 빛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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