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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탐구] 다시 만나고자 그린 그림, 이중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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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탐구] 다시 만나고자 그린 그림, 이중섭
  • 이황 기자
  • 승인 2019.10.24 10: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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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메이커 이황 기자]

이별과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

핸드메이커 이황 기자
핸드메이커 이 황 기자
춤추는 가족
'춤추는 가족', 1916 [한국저작권위원회 저작권 만료 저작물]

“돈 걱정 때문에 너무 노심하다가 소중한 마음을 흐리게 하지 맙시다. 돈은 편리한 것이긴 하지만, 반드시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지는 못하오. 중요한 건 참 인간성의 일치요. 비록 가난하더라도 절대로 동요하지 않는 확고부동한 부부의 사랑 그것이오. 서로가 열렬히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한다면 행복은 우리 네 가족의 것이 아니겠소. 안심하시오. 가난해도 끄떡없는 우리 네 가족의 멋진 미래를 확신하고 마음을 밝게 가집시다.”

-이중섭이 아내 남덕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국전쟁이 일어난다. 이중섭은 전쟁을 피해 아내 남덕과 두 아들을 데리고 원산에서 부산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다시 부산에서 제주도 서귀포로 간다. 제주도에서 가난에 시달리다 또 다시 부산으로 돌아오지만 살림은 나아지지 않는다. 아내는 폐결핵으로 피를 토하고 밀가루와 풀을 섞어 만든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던 아이들은 얼굴이 누렇게 뜬다. 이중섭은 아내와 아이들을 아내의 고향인 일본으로 보낸다. 장인이 죽고 남긴 유산으로 아내와 아이들이 좀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으리라는 판단이었다.

한국에 홀로 남은 이중섭은 그림으로 성공하여 떳떳한 가장의 모습으로 아내와 두 아이가 머무는 일본으로 가겠다고 굳은 결심을 한다. 전쟁과 가난 그리고 가족을 떠나보낸 이별의 아픔이 이중섭의 창작열에 불을 지핀 것이다.


은지화와 아이들

이중섭이 은지에 그린 '은지화' [한국저작권위원회 제공]
이중섭이 은지에 그린 '은지화' 1950년대 [한국저작권위원회 저작권 만료 저작물]

가족을 일본으로 보내고 부산에서 홀로 지내던 때 이중섭은 예술가의 아지트로 쓰이던 「밀다원」 및 「금강다방」에서 은지화를 많이 그렸다. 은지화란 담뱃갑에 들어있는 은지에 그린 그림이다. 송곳이나 못으로 은지에 선을 새기고 그 위에 검정 물감을 바르고 씻어내면 선이 난 곳만 뚜렷해진다.

가난에 찌들려 종이를 살 돈이 부족했기 때문에 은지에 그림을 그렸다는 말엔 일리가 있다. 하지만 꼭 그렇게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새로운 소재를 활용해서 그림을 그리고 싶은 한 예술가의 열망으로 볼 수도 있다. 구깃구깃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은지는 평면이지만 그림에 입체감을 주는 것이다. 독특한 소재가 단순한 그림을 뒷받침해준다.

이중섭은 은지에 아이들 그림을 많이 그렸다. 애틋하고 그리웠을 것이다. 그림 속 아이들은 발가벗고 있거나 아랫도리를 입고 있지 않은데 이건 어떤 뜻일까? 아이들의 자유로움과 순수함 그리고 천진함을 뜻하는 건 아닐까? 네 가족이 함께 살 때 온가족이 옷을 홀라당 다 벗고 뒹굴거리며 지내기도 했다는데 그런 추억이 묻어난 것은 아닐까?


황소의 눈으로 삶을 살아
 

'황소', 1953 [한국저작권위원회 제공]
'황소', 1953 [한국저작권위원회 저작권 만료 저작물]

이중섭 그림은 강렬한 선이 특징이다. 굵은 선과 거친 붓놀림이 감상하는 사람에게 강렬함으로 다가온다. 이중섭은 어렸을 때부터 소의 눈을 들여다보곤 했다고 한다. 그림 속 저 소의 눈은 이중섭의 눈을 닮았다. 스페인 투우 소처럼 앞뒤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 들이박으려는 무식함이 아니다. 삶의 애환과 슬픔을 견뎌내며 뚫고 나가려는 강인한 눈망울이다.

위 그림 속 소의 눈망울에서 이 세상을 정면 돌파하려는 이중섭의 강인함이 보인다. 이중섭은 치열하게 그림을 그렸다. 가족을 반드시 만나리라는 열망과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족이 없었다면 삶의 의지도 없었을 것이다.

이중섭이 그리는 소, 게, 닭, 달, 까마귀, 아이는 우리에게 친숙하다. 이중섭은 이렇게 자신의 삶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낯익은 것들을 자주 그렸다. 이중섭의 그림은 늘 현실과 이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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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까마귀', 1954 [한국저작권위원회 저작권 만료 저작물]

이중섭이 짊어져야 했던 현실의 무게

그러나 그의 현실은 만만치가 않았다. 사기를 당하기도 하고 빨갱이로 오명을 쓰기도 했다. 가족을 보러 일본으로 건너가기도 했지만 고작 5일 만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게 가족을 본 마지막이었다. 여전히 가족을 부양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림만으로 가장의 역할을 할 만큼 돈을 벌지 못했다. 이중섭은 미도파화랑과 미국공보원에서 전시회를 열어 사람들로부터 작품의 가치를 인정받기도 했지만 그것이 경제적인 번영으로 이어지는 못했다. 성공한 가장이 되어 가족에게 돌아가겠다는 희망이 더 이상 이룰 수 없는 꿈일 뿐이라고 현실을 받아들인 이중섭은 거식증과 정신병에 시달렸고 이른 나이에 죽게 된다.

전쟁과 가난, 가족과 이별이라는 무거운 현실을 견뎌야했던 화가 이중섭, 하지만 현실은 이중섭을 괴롭히기만 한 건 아니었다. 현실은 이중섭이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할 수 있도록 밀어붙였다. 그런 현실의 무게가 없었다면 이중섭은 지금 남아있는 작품들을 그릴 수 있었을까?

망우리공원 이중섭 묘비엔 보라색 꽃이 꽂혀 있고 사랑하는 두 아이 그림이 새겨져 있다. 그가 죽은 지도 벌써 63년이 흘렀다. 이제는 망우리공원에 편히 잠들어있는 이중섭이지만 그의 묘지, 그리고 그의 작품을 둘러보면 그의 치열했던 예술 세계와 가족에 대한 사랑의 향기가 여전히 남아있음을 느낀다.
 

망우리 공동묘지에 있는 이중섭 묘비 / 핸드메이커 이 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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