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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등록 예고되는 국가등록문화재들, 그 시작엔 한성미술품제작소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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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등록 예고되는 국가등록문화재들, 그 시작엔 한성미술품제작소가 있었다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1.09.10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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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제이화문합 /서울공예박물관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6일, 서울공예박물관은 대한제국 황실 전용 공예품 전문 제작기관으로 최초 설립한 ‘한성미술품제작소’(1908~1913)에서 만든 의례용 공예품 ‘은제이화문합’(銀製李花紋盒)을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 예고한다고 밝혔다.

은제이화문합은 은으로 만든 뚜껑이 있는 발로, 음식을 담을 수 있는 탕기의 일종이다. 높이 12.4㎝, 지름 18.2㎝다. 1908~ 1910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문화재청을 통해 한 달간 각계 의견을 수렴하고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등록 여부가 최종 결정될 예정이다.


우리나라 전통 공예의 한 발자취, 한성미술품제작소
 

덕수궁명 은잔 세트 /서울공예박람회

한성미술품제작소는 이왕가가 사유재산으로 광화문 네거리에 공방을 설립하고 30여년간 운영한 곳이다. 이왕가는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이후 대한제국 황실을 왕공족의 일개 가문으로 격하하여 부르는 명칭이며, 보통 대한제국의 고종과 순종의 가족을 이르는 말이다.

당시 매일신보 기사에 따르면 대한제국은 ‘조선의 고유한 전통적 공예미술의 계승과 진작을 위해 제조법은 개량할지라도 의장(意匠)은 모두 조선식으로 할 것’이라는 취지로 한성미술품제작소를 설립했다. 1910년 8월 29일에 만들어졌으며 1947년 5월 3일까지 유지되었다.

설립 초기에는 ‘공예 전통의 진작’을 표방하며 공예를 통한 산업의 발전을 모색하였으며 기술에 대해서는 전통적 기법을 지키려는 의지를 적극적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는 일본인들의 상업적 이익을 위한 공장으로 변질되어 본래의 취지는 무색해진다.

이왕가박물관이 창경궁 명정전 내부에 둔 팔부중상 조각이 있는 석탑 기단부 면석 /국립고궁박물관

이왕가는 예술, 미술, 공예에 관심이 많았다. 미술품제작소 이외에도 이들은 이왕가박물관, 이왕가미술관 등을 만들었다. 이왕가미술관은 일제가 문화가 없는 조선에 미술을 진작한다는 목적으로 덕수궁에 설치했지만 사실상 일본 근대 미술품을 전시함으로써 당대 일본 문화를 보여주는 데 사용되었다. 창경궁의 이왕가 박물관의 조선고미술품을 덕수궁으로 옮겨와 전시함으로써 조선은 과거의 문화를, 일본은 당대의 문화를 보여주어 식민 통치를 공고화시키는 역할도 했다.

즉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일본 근대 미술품을 전시·소장함으로써 현재 일본 근대 미술품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 덕수궁에서 일본 근대미술품과 조선 고미술품을 전시한 것은 일본 식민지였던 당시 조선의 미술과 역사는 과거로, 일본의 미술과 역사는 현재로 보게 하려는 의도였다.

이왕가박물관 또한 마찬가지였다. 황실에서 설립하고 운영하였으며, 명품을 중심으로 불상·도자·회화 등을 수집함으로써 공공 박물관의 기능을 했다. 국보 제83호 금동반가사유상, 청자상감 포도동자문 표주박모양 주전자 등이 이때 수집되었다. 그러나 설립 과정이 주체적이었다기보다는 일본인들에 의해 주도되어 일본인들이 평가하는 유물들이 주로 수집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설립되었고, 순종 황제의 위무를 목적으로 황실에서 설립했지만 추진 세력이 일본인들이었던 만큼 대한제국기에 세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지적 성격이 다분하다. 그러나 일반에 공개되어 공공 박물관으로서 기여하였으며, 산일되기 쉬운 불상·도자, 조선시대 회화작품 등 우리나라의 중요한 미술품을 소장·전시하여 미술문화의 이해에 이바지했다는 평가 또한 존재한다. 

영친왕이 사용했던 이왕직미술품제작소의 나전칠기찬합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다시 한성미술품제작소로 돌아와서, 조선 왕조는 납품 형식으로 왕실 용품을 제작하는 방법으로 인해 점차 제품의 수급이 어려워지자 ‘고유한 미술 의장(意匠)의 보유’라는 전통 복구의 기본입장을 기조로 하여 왕실용품을 제작을 위한 국영 기관을 설립하였다.

이 기관은 세 차례의 명칭 변화를 겪게 되는데, 1908년 설립된 한성미술품제작소는 1911년에 이왕직미술품제작소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1922년부터는 일본인 중심의 주식회사 체제로 개편된 주식회사 조선미술품제작소가 된다. 이왕직은 이왕가의 살림을 맡은 기관이었고, 이왕직미술품제작소는 이왕가의 소유이긴 했지만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사업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설립 당시에는 금공부와 목공부, 염직부로 출범하여 1910년경에는 수요층의 요구에 따라 먹을 제작하는 제묵부와 도자부를 추가로 신설하였다. 또한 최초로 도안을 도입하여 공예분야에 근대적 제작 방식을 보급하고 선도하기도 했다. 금공부는 주로 중국 청동제기의 형식을 은으로 재현한 소형 기념품 제작하였고, 목공부는 나전칠기를, 도자부는 당시 애호층 사이에 수집 열풍이 불었던 청자 비색의 재현에 각각 주력하였다. 한성미술품제작소의 모든 제작품에는 이왕가의 오얏꽃 문장을 새겨 넣어 차별화를 시도하였고, 운영 주체가 이왕가와 무관하게 된 1910년 이후에도 이 문장은 상업적 목적에 따라 지속적으로 보이는 경향을 보였다. 

김철주 장인의 은제 사리함 /한국문화재재단

이왕직미술품제작소 시절에는 일본인이 운영에 개입하고 제작 시설을 나전칠기, 목공, 제묵, 주금, 단금, 보석, 조각, 입사, 도자, 두석, 염직의 11개 부문으로 조직 규모를 확대했지만, 일본인의 취향을 의식한 중국 고동기 모양의 기형을 대량으로 제작하는 등 성격이 달라졌다.

이왕직 시기에는 특히 고대 중국의 의례용 청동기와 고려청자를 재현한 작품들이 많이 나왔는데, 상류층의 취미에 걸맞는 고급 수집품으로서의 공예에 신경을 쓴 것이다. 1922년부터는 제작품 양식이 일본화되어 일본의 전통 문양인 오동잎 문양이 나타나기도 했으며, 기념품, 트로피 등 상품 제작에 집중했다. 1922년 신설된 조선미술전람회 공예부와 함께 일본인의 이국 취향에 맞추는 대로 공예 발달을 왜곡하는 데 일조한 곳이다.

그러다 일본은 형식적으로나마 인정해 오던 이왕가의 이왕직미술품제작소 직영권을 박탈하고, 주식공모계획을 발표한 뒤 주식회사 조선미술품제작소로 체제를 바꾼다. 또 일본인에게 넘어간 운영권과 관련하여 일본화 경향이 심화되었으며, 판매량이 점차 줄면서 1937년을 전후한 시기에 폐쇄되는 결말을 맞는다.

한성미술품제작소는 전통이 급속히 해체되던 시기에 전통 공예기술을 경공장의 수준으로 복원시키려던 시도와 장인 재교육을 시행한 준교육 시설로서의 의의가 있다. 또 이곳에서 일했던 장인들이 1960∼70년대에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등 전통 공예의 현대적 전승에도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은제이화문화병 /국립고궁박물관

대한민국 황실에서 사용한, 은으로 만든 의례용기 형태의 화병인 은제이화문화병은 목이 길고 몸통쪽으로 갈수록 넓어지는 형태에 긴 목의 양쪽에는 두 개의 귀가 달려 있다. 주석의 합금률이 높아 표면 광택이 밝은 편이다. 기계로 생산한 제작방식과 대한제국 황실의 문장인 오얏꽃을 두툼하게 붙여 넣은 점에 근대적인 요소를 찾아볼 수 있다.

이왕직미술품제작소에서 1910년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하며, 이 화병은 당시 공예품 제작의 실상과 전통을 유지하려는 왕실의 취지를 보여주는 귀중한 유물이다. 

은제 소꿉도구 /국립중앙박물관

높이 2.8센티미터부터 6.7센티미터 사이의 이 은제 장식품들은 이왕직미술품제작소에서 만들어졌다. 공계품에는 황실의 표상인 이화 무늬가 장식되었다. 다섯 장의 꽃잎 안에 수술을 세 개씩 표시한 이화 무늬는 주로 음각으로 나타냈으나, 일부는 따로 만들어 붙이기도 하였다. 이화무늬와는 별도로 기물 바닥에 ‘미(美)’라는 명문을 찍어 미술품제작소의 제작품임을 밝혔다. 일상 생황용기나 제기를 작게 만든 이 장식품 바닥에는 세 가지 다른 명문이 찍혀있다. 먼저 앞줄 왼쪽의 궤에는 ‘한성미술’이, 나머지 두 점에는 ‘한미(韓美)’가 있어 한성미술품제작소에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두번째, 세번째 줄의 장식품에는 ‘미(美)’, 네 번째 줄의 장식품에는 미(美)가 찍혀 있어 모두 이왕직미술품제작소에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1919년 개정된 ‘이왕직소관미술품제작소 제작목록’ 중 ‘금은세공품부’에 ‘기념품용소물’이 5원(圓)이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이러한 은제품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왕직미술품제작소에서는 은제 장식품 이외에도 중국의 고대 청동기를 모방한 고동기, 즉 작(爵)이라 부르는 컵이나 향로를 만들었다. 같은 제작품 목록의 ‘주조품부’에는 ‘청동제 작’이 16원(圓)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 작은 구리와 주석의 합금인 청동이 아니라 구리와 아연의 합금인 황동으로 주조되어 특별함을 뽐낸다.

은제이화문탕기 /국립고궁박물관 
은제이화문탕기 /국립고궁박물관 

은제이화문탕기는 이왕직미술품제작소에서 제작한 탕기로 표면을 망치로 두드리는 단조 기법으로 제작하였다. 덮개와 몸체 중앙에 대한제국 황실의 문장인 오얏꽃을 음각으로 새겼고 덮개에 ‘만수무강’ 문자를 양각으로 새기고 연봉형 꼭지를 달아 전통을 잇고자 하는 마음에 실용성을 더했다. 이 작품은 이왕직미술품제작소의 설립 취지가 유지된 1910년대 제작품으로 추정되며 창덕궁 유물이였음을 고려할 때 황실 연회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또 사용한 흔적이 온전하게 남아 있어 공예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은제이화문합 /서울공예박물관

서울공예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은제이화문합은 뚜껑 중앙에 연꽃 봉오리 모양의 꼭지가 달려 있고 꼭지를 중심으로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오얏꽃(이화문장)이 화려하게 양각돼 있다.  오늘날 그릇 제작에도 사용하는 프레스(Press) 기법을 도입한 최초 사례로 주목된다. 프레스 기법은 공예품의 형틀을 만든 뒤 강한 압력으로 금속판을 눌러 형태를 만들었다.

이 기법으로 바닥면에는 ‘한성미술’이라는 상표가 새겨져 있어 제작처와 제작 시기를 규명할 수 있다. ‘은제이화문합’ 외에 국내에 현존하는 ‘한성미술’ 제작 공예품은 5점에 불과해 희소가치도 높다. 뚜껑 측면에는 '만수무강'이 고전적인 전서체로 도금돼 장식되어 있다. 문자와 문자 사이에는 도교 사상을 담은 칠보문양이 새겨져 있다. 동체에는 글자 '길상여의'를 전서체로 넣었다.

서울시는 조선 왕실 의례용 공예품의 의장을 계승했다는 점, 당시 해외 신기술인 프레스(Press) 기법을 도입해 만든 최초의 사례라는 점,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문장인 이화문 장식으로 공예가 맥을 계속 이어나갔음을 보여주는 문화재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고 설명했다. 은제이화문합은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공예가 계속 맥을 이어나갔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은제이화문탕기’와 비교해보면 은제이화문합과 형태‧문양구성 등이 유사하게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은제이화문합 /서울공예박물관

서울공예박물관 측은 "은제이화문합이 대한제국 황실에서 신기술인 프레스 기법을 의욕적으로 도입해 제작한 것과 달리 은제이화문탕기는 전통방식으로 회귀, 단조기법으로 제작했다는 점에서 공예사적 변화도 찾아 볼 수 있다"며, "은제이화문합은 근대 공예제작 기술과 산업화에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사례로 금속공예 역사 연구에 중요한 학술적 근거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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