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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傳) 영친왕 일가 어린이 옷’ 국가민속문화재 지정 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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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傳) 영친왕 일가 어린이 옷’ 국가민속문화재 지정 예고
  • 윤미지 기자
  • 승인 2021.09.02 10: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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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소성을 가진 조선 시대 어린이 복식 유물
실용적‧상징적 특징 담겨 있는 어린이 의복
전(傳) 영친왕 일가 어린이 옷 - 타래버선 문화재청
전(傳) 영친왕 일가 어린이 옷, 타래버선 /문화재청

[핸드메이커 윤미지 기자] 문화재청에서 조선 시대 왕실의 어린이 복식 문화를 파악할 수 있는 ‘전(傳) 영친왕 일가 어린이 옷(총 9건)’을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 예고한다고 밝혔다. 이번 국가민속문화재 지정 예고가 더욱 특별한 것은 그간 왕가 어린이 복식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는 유물이 많지 않아 그 희소성에 더욱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이번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는 복식 유물은 1998년 숙명여자대학교가 기증받은 조선 시대 왕실의 어린이 옷(총 9건)으로, 영친왕비인 이방자 여사가 보관하던 것이라 전해진다.

해당 복식 유물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이은(李垠, 1897~1970)의 옷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옷의 주인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하고 옷의 크기로 미루어 볼 때 실제 영친왕이 착용했다고 특정할 수는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전(傳) 영친왕 일가 어린이 옷’은 조선 시대 왕가 어린이가 입었던 옷에서 볼 수 있는 주요한 특징들이 잘 나타나 있기에 문화재로서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전(傳) 영친왕 일가 어린이 옷’은 사규삼과 창의, 두루마기, 저고리, 색동마고자, 풍차바지, 조끼, 버선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문가의 조사 결과, 일본에서 환수되어 2009년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영친왕 일가 복식 및 장신구류(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중 영친왕의 아들 이구(李玖, 1931~2005)의 복식 유물과 비교했을 때 소재, 단추, 문양 등이 매우 유사하다고 밝혀졌음을 확인했다.
 

(좌)사규삼 및 창의 (우)소색 풍차바지 문화재청
(좌)사규삼 및 창의 (우)소색 풍차바지 /문화재청

특히, ▲ 어린아이가 착용하기 쉽게 분홍색 사규삼 아래 녹색 창의를 받쳐 꿰매놓은 ‘사규삼 및 창의’는 조선 시대 왕실과 반가에서 돌옷이나 관례 시 예복으로 입힌 것으로 현재 남아있는 유물이 드물어 희소성이 높다는 점, ▲ 돌띠 방식의 긴 고름을 달아 만든 ‘두루마기’와 ‘저고리’, 그리고 용변이 용이하도록 뒤가 트인 ‘풍차바지’ 등은 어린아이에 대한 배려와 조선 시대 어린이 복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점, ▲ 손바느질과 재봉틀 사용이 모두 확인되는 ‘조끼’는 서구문화의 유입에 따른 봉제 방법의 변화를 알 수 있는 유물인 점, ▲ 전체적으로 의복의 소재와 문양 등이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유행한 것으로 확인되고 그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는 점 등에서 학술적으로 가치가 탁월하다고 인정되었다.

문화재청은 이번에 지정 예고한 ‘전(傳) 영친왕 일가 어린이 옷’에 대해 30일간의 예고 기간 중 각계의 의견을 수렴·검토하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또한 앞으로도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할 만한 가치가 있는 복식, 생활용구, 신앙자료 등을 꾸준히 발굴‧지정할 예정이라고 한다.


조선 시대 어린이 복식, 편의성‧실용성에 초점

조선 시대 어린이 복식은 전해져오는 자료가 많지 않으며 특히 왕가 어린이 복식 자료는 더욱 희소성이 높아 꾸준히 연구 대상으로 여겨지는 분야다. 현재 조선 시대 어린이 복식에 대한 자료는 고문헌과 남아있는 유물을 통해서 그 모습을 조금이나마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시대 어린이 복식은 의례복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간소했다고 한다. 큰 틀에서 볼 때는 어른의 의복과 크게 다른 점이 없었으며 바지와 저고리, 조끼, 창의 등 비슷한 분류에 따라 의복을 제작했다. 다만 어른의 의복은 계급이나 신분에 따라서 쓸 수 있는 색상이 한정되어 있었으나 아이들의 옷은 사용할 수 있는 색상의 폭이 넓었다. 주로 어른의 복식과 어린이 복식을 분류하는 기준은 색상에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두 명의 한국 아이들, 엘리자베스 키스, 국립민속박물관
두 명의 한국 아이들, 엘리자베스 키스. 오방색 등 비교적 화려한 색상이 눈에 들어온다 /국립민속박물관

조선 시대 어린이 복식에서 특징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부분은 편의성과 실용성이다. 아이들이기 때문에 활동하는 것에 불편하지 않게 의복을 준비했고 관리하는 것에 있어서도 편의성을 생각했다. 특히 과거 의복은 종류가 많고 착용이 복잡하다는 특징을 가졌다. 아이들 옷은 상의와 하의를 연결하는 방식으로 의복의 편의성을 높였다. 또한 어린이의 활동 시 옷이 흘러내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상의와 하의를 연결하기도 했다.
 

풍차바지 국립민속박물관 3
풍차바지. 상의와 하의가 연결되어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이번 국가민속문화재 지정 예고된 ‘전(傳) 영친왕 일가 어린이 옷’에서도 어린아이가 착용하기 쉽게 분홍색 사규삼 아래 녹색 창의를 받쳐 꿰매놓은 ‘사규삼 및 창의’가 눈에 띈다. 사규삼은 조선 시대 남자아이가 입었던 옷으로 관례 때 예복으로 이를 착용했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 남자아이는 겉옷의 형태로 사규삼을 입기도 했으며 주로 두루마기 위에 착용했다.
 

사규삼. 영친왕의 둘째 아들 구 왕자의 의복. 국립고궁박물관
사규삼. 영친왕의 둘째 아들 구 왕자의 의복. /국립고궁박물관
사규삼(四揆衫), 국립민속박물관
사규삼(四揆衫) /국립민속박물관

또한 하의의 경우 뒤를 터놓은 형태로 제작하기도 했다. 이러한 형태는 과거 어린이들이 입었던 풍차바지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풍차바지는 아이가 삼칠일이 지나고 배내옷을 벗고 입는 하의를 말한다. 저고리와 함께 풍차바지를 입히는데 기저귀를 갈거나 용변을 용이하게 하도록 바지 뒤를 터서 만든다.

풍차바지는 조선 시대 남자아이뿐만 아니라 여자아이도 입었다. 이 풍차바지를 입지 않게 되는 시기는 따로 정해진 것은 없다고 한다. 아이들이 성장한 이후, 남자는 뒤가 터져 있지 않은 성인 바지를 입게 되며 여자아이는 성인 치마를 입게 된다.
 

풍차바지, 국립고궁박물관
풍차바지 /국립고궁박물관

풍차바지 외에도 남아와 여아가 모두 입었던 복식 중에는 두렁치마라는 것도 있다. 두렁치마는 유아기 복식 중 특징적인 것으로 성인의 치마와 비슷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주로 외부의 온도로부터 아이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배를 따뜻하게 하는 보온적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이 두렁치마는 아주 어린 남아와 여아 모두가 공용으로 입었다. 아이들이 기어 다니기 전까지 공용으로 이를 착용했으며 이후 성장하면서 여아들이 주로 입는 복식이 되었다. 두렁치마는 아이들에게 이불과 같은 역할을 하기도 했으며 그 형태를 살펴보면 실용적으로 제작됐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두렁치마 국립민속박물관
두렁치마 /국립민속박물관

일단 일반 성인 치마와 아이들이 입는 두렁치마의 차이는 뒤편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성인 치마는 한복의 뒷부분이 겹쳐질 수 있도록 제작하지만, 두렁치마는 뒤가 겹치지 않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는 아이가 누웠을 때 몸에 배겨 불편하게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으며, 풍차바지와 마찬가지로 용변을 가리지 못하는 아이들의 특성을 고려하여 뒤를 터서 제작했다고 한다.

어린이 의복에 있어서 실용성을 중시했던 사례는 배냇저고리에서도 발견된다. 배냇저고리는 아이가 태어나고 삼 일 동안 강보에 싸여있다가 처음 입게 되는 의복이다. 그렇기에 더욱 유의하여 옷을 지었으며 상징적인 의미도 컸다. 또한 이를 부르는 명칭도 다양한데 태어난 지 이레 만에 씻기고 갈아입힌다고 하여 ‘이란저고리’, ‘이레안저고리’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현대에도 갓 태어난 아이에게 배냇저고리를 선물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은 배냇가운이나 슈트 등 그 종류도 다양하나 과거에는 사람이 태어나서 처음 입는 옷으로 배냇저고리를 짓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아이가 처음 입게 되는 의복이기 때문에 거칠거나 불편함이 없도록 배려한 부분들이 곳곳에 보인다.
 

배냇저고리. 광복이후 제작. /국립민속박물관
배냇저고리. 광복이후 제작 /국립민속박물관

특히 배냇저고리는 갓난아기를 보호하기 위해 입히던 옷이었기에 멋보다는 위생과 실용성에 주안점을 두고 제작되었다. 옷을 지을 때는 아이의 여린 살이 쓸려 아플 것을 염려해 거친 깃을 달지 않거나 손톱으로 얼굴을 긁어 다치지 않게 소매를 길게 제작하기도 했다. 이는 현대의 손 싸개와 같은 역할을 한다.

배냇저고리는 기본적으로 우리나라 저고리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아이의 특성에 맞게 깃을 달지 않아 ‘무령의’라고도 했다. 깃을 달지 않은 이유는 피부가 쓸릴 것을 걱정한 것도 있으나 누웠을 때 불편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도 있다.
 

배냇저고리. 광복 이후 제작. 국립민속박물관
깃을 달지 않아 '무령의'라고도 불렸다. 배냇저고리. 광복 이후 제작 /국립민속박물관

또한 배냇저고리를 지을 때는 아이의 활동이 자유로운 것이 중요했다. 몸을 이리저리 움직일 수 있도록 넉넉하게 만들었으며 착용이 편할 수 있도록 그 형태 역시 단순했다. 한복 상의의 몸체 부분인 ‘길’과 ‘소매’, ‘옷고름’으로 배냇저고리의 간편한 형태와 구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일반 성인의 저고리 형태에 비교하면 매우 단순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 발견된다.

배냇저고리는 주로 부드러운 무명이나 명주를 사용해서 만들었다. 주로 흰색이 많았고 제주도에서는 특이하게도 삼베를 사용하여 아이의 배냇저고리를 짓기도 했다고 한다. 언뜻 생각하기엔 아기의 피부에 삼베가 거칠어 적당하지 않을 것 같지만 물이 귀하여 아이를 자주 씻길 수 없었던 데다가 다른 지역에 비해 남쪽에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통풍이 잘되는 삼베를 활용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마로 만든 제주지역의 배냇저고리. 배냇저고리 국립제주박물관
마로 만든 제주지역의 배냇저고리. 배냇저고리 /국립제주박물관


길상의 의미가 담겨 있던 어린이 복식

주로 아이들이 편하게 입고 또 이를 관리하기도 쉽게 만들었던 어린이 복식은 성인의 의복과는 다르게 보호의 역할이나 실용성을 중시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아이를 보호한다는 점은 물질적 관념뿐만 아니라 추상적인 영역까지 포함한 것으로, 이점은 옷을 만드는 데 사용하는 재료와 방법을 통해 더욱 자세히 이해할 수 있다.

배냇저고리를 만드는 데 사용하던 천은 주로 집에서 짠 부드러운 무명이었으나 계절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추운 겨울에는 천 사이에 솜을 넣고 길게 바느질하였으며 상대적으로 쌀쌀한 봄과 가을에도 겹으로 준비해 두었다. 여름에는 풀기를 빨아 없애 부드러워진 모시를 사용하기도 했다.

이렇게 시기에 맞게 천은 미리 구해두더라도 옷은 아이가 태어나기 직전이나 후에 지었는데 아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옷을 미리 준비하여 두면 귀신과 같이 부정한 것들이 샘을 내 출산이 힘들어지거나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당시 영아와 산모의 생존율이 낮았던 것과도 관련이 있다.

이런 어린이 의복에 담긴 상징적인 의미는 당시 남존여비의 사상이 지배적이었던 모습을 반영하기도 한다. 특히 양반가와 같이 예법에 완고한 곳이나 이러한 관례에 관심이 있는 집안에서, 장손이나 장남의 옷을 짓는 경우는 존경받는 남자 어른의 상의로 배냇저고리를 제작하기도 했다고 한다. 종종 집안의 첫째 남자아이의 옷을 물려 입히기도 했으나 시대 상황에 의해 누나의 옷을 남자아이에게 물려 주지는 않았다.
 

배냇저고리. /국립민속박물관
태어나 처음 입는 의복이었기에 많은 의미가 담긴 옷이다. 배냇저고리 /국립민속박물관

또 솔기는 바깥으로 내었고 옷고름은 홀수 가닥의 무명실을 달았는데 대부분 누워지내는 아기의 몸에 매듭이 배기지 않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으나 상징적 의미로는 오래오래 살라는 기원을 담아 제작한 것이다.

만드는 사람은 대부분 아이의 할머니, 또는 엄마가 준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독특한 점은 사회적으로 덕망이 높은 어른이 지어주거나, 첫 아이로 아들을 낳은 집에 배냇저고리를 부탁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사람이 태어나 가장 처음 입는 옷이기에 더욱 정성을 쏟아 제작되었던 배냇저고리는 곳곳에 아기가 앞으로 건강하고 복이 가득한 삶을 살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아이가 첫돌을 맞이하였을 때 겉옷에 둘러 장식하는 띠가 있었는데 이를 돌띠라 불렀다. 이 역시 길상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부분이다. 벽사의 의미를 담아 붉은색 옷감으로 이를 제작했으며 아이의 복과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여러 가지 문양을 넣어 만들기도 했다.
 

붉은색 면직물이었으나 색이 바래 연한 살구빛을 띠고 있다. 돌띠.국립중앙박물관
붉은색 면직물이었으나 색이 바래 연한 살구빛으로 보인다. 돌띠 /국립중앙박물관

보통 겉옷 위에 이 돌띠를 둘러서 고정하기도 했으며 사규삼, 저고리 등에 이를 꿰매 붙이는 일도 있었다. 특히 돌띠를 붙인 저고리를 돌띠저고리라 부르기도 했다. 길게 붙어 있는 돌띠의 형태는 긴 고름처럼 장수하여 아이가 오래 살길 바라는 기원을 담기도 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어린이 복식을 떠올릴 때 가장 많이 기억하는 것이 색동옷이다. 색동옷은 오방색의 옷감을 사용해서 만든 것으로 음양오행 사상을 담았다고 볼 수 있다. 이 색동옷 또한 벽사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아이가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자라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의복이라고 할 수 있다.
 

돌복 입은 아이, 폴 자쿨렛 판화, 국립민속박물관
돌복 입은 아이, 폴 자쿨렛 판화 /국립민속박물관

이 색동옷은 주로 첫돌에 많이 입는다. 첫돌을 맞이했을 때 색동옷 착용과 함께 남자아이가 머리에 썼던 호건에서도 상징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호건은 복건과 거의 유사하나 머리 부분에 호랑이 모습을 수놓은 것을 말한다. 이 역시 나쁜 기운이 호랑이를 보고 달아나라는 의미를 담아 벽사의 기능을 하고 있으며 또 아이가 건강하게 성장하길 바라는 염원을 담았다고 볼 수 있다.
 

호건, 한국색동박물관
호건 /한국색동박물관

아이들의 옷에는 주로 길상의 뜻을 담은 금박 무늬나 자수가 다수 사용됐다. 이는 남자아이가 관례 때 입었던 사규삼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사규삼의 도련이나 소매 끝 테두리 부분에 검은 선을 두르고 그 위에 금박을 통해 길상의 무늬를 새기기도 했다고 한다. 이는 아이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랄 수 있기를 소망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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