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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한 색채의 마술사', 앙리 마티스와 야수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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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한 색채의 마술사', 앙리 마티스와 야수파
  • 김강호 기자
  • 승인 2020.07.28 10: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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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계기로 법학생에서 화가로 진로를 바꾼 남자, 미술사의 한 획을 긋다
거침없는 빛과 색채의 표현으로 폭발적인 감정을 담아낸 야수적인 예술

[핸드메이커 김강호 기자]

예기치 못하게 찾아온 재능이 진로를 바꾸다

1889년 프랑스의 한 병원, 법학생이었던 청년이 맹장염으로 입원하여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병원에서 천국을 발견한다. 옆자리의 환자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고 흥미를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붓을 잡게 된 이 청년은 인생이 완전히 바뀌게 된다.

'야수파'의 대표 화가이자, 파블로 피카소의 유일한 라이벌, 20세기 최고의 예술가로 손꼽히는 앙리 마티스(Henri Emile-Benoit Matisse, 1869~1954), 그는 원래 법학도였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파리에서 법을 전공했고 변호사의 서기로 일했다. 마티스의 어린 시절은 그림과 전혀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입원한 병원에서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 것이다.

마티스는 1893년 우리 나이로 25살에야 파리 국립 미술학교에 들어가 정식으로 그림을 배울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아버지의 반대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법률 업종을 그만두고 생계가 불확실한 화가가 된다고 하자 강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마티스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렇게 완전히 예술가로 전향한 앙리 마티스는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창안하여 명성을 떨치게 되었고 가장 위대한 화가의 반열에 올랐다. 그런데 이후에는 또 조금씩 진로를 바꿨다. 스테인드글라스, 조각, 건축, 색종이 공예에도 손을 댄 것이다. 마티스는 이렇게 다양한 활동을 했지만 한 가지 만큼은 포기하지 않았다. 바로 강렬한 색채의 표현이었다.
 

'모자를 쓴 여인' / 플리커, Irina
'모자를 쓴 여인' / 플리커, Irina

강렬한 색채를 통해 솔직한 감정을 표현한 마티스의 그림

마티스의 초기 작품들을 보면 풍경화와 정물화가 많았고 대부분 어두운 색조를 띠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작품은 생생하고 활기찬 색감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특히 폴 세잔, 폴 시냑, 피에르 쇠라 등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깊은 감명을 받고 빛과 색채를 표현하는 방법을 연구하게 됐다.

마티스는 앙드레 드랭 등 몇몇 친구와 함께 1905년 첫 전시를 열었다. 그런데 전시는 혹평을 받았다. 비평가와 관람객은 마티스 작품의 야만적인 색채 사용을 야수적이라고 비난했다. 특히 주목받은 작품은 1905년에 그린 유화 작품, '모자를 쓴 여인'이다. 작품 속 여인의 얼굴에는 사람의 살색이 아닌 생소하고 부자연스러운 색채들이 버젓이 칠해졌다.

마티스는 이를 통해 사물의 고유한 개념이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주었고, 색을 형태에서 해방시켜 사람의 시선을 색채로 옮기고자 했다. 이것이 바로 '야수파(fauvisme)'의 탄생이었다. 그리고 재밌게도 이후 앙리 마티스의 명성이 높아지자 야수라는 의미가 멸칭의 의미에서 새로운 미술 운동을 지칭하는 단어로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전시 이후 앙리 마티스는 '마티스 부인의 초상화'라는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도 모자를 쓴 여인처럼 왜곡된 색채로 그려졌다. 그림의 모델이자 마티스의 아내인 아멜리 부인도 불쾌해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마티스는 "나는 아름다운 부인을 창조하는 것이 아닌 그림만을 그렸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오직 자신의 느낌으로 색을 사용해 솔직한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춤' / 플리커, Gandalf's Gallery
'춤' / 플리커, Gandalf's Gallery

앙리 마티스는 러시아의 부유한 실업가인 세르게이 슈추킨의 후원 아래, 자신의 예술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1909년 그린 '춤'은 잘 알려진 마티스의 대표작이다. 슈추킨이 자신의 모스크바 저택에 벽화를 그려줄 것을 의뢰하여 그려졌다. 춤 작품은 빨강, 초록, 파랑 3가지 색채만을 사용했으나, 오히려 더 풍부하고 생명력 넘치는 이미지를 만들었다. 마티스는 파랑과 노랑, 빨강 등을 사람의 감각을 가장 많이 뒤흔들 수 있는 색깔이라며 애용했다.
 

로사리오 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 / 플리커, Monica Arellano-Ongpin
로사리오 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 / 플리커, Monica Arellano-Ongpin

'붓을 잃고 가위로 그림을 그리다'

앙리 마티스는 회화 외에도 다양한 예술을 시작했다. 친구의 영향으로 조각을 배우기 시작하여 생애 동안 60점의 조각을 남겼다. 그리고 프랑스 남동부의 작은 마을인 방스의 로사리오 성당에서 3년에 걸친 작업으로 스테인드글라스를 만들었고 건축 설계, 벽화와 촛대, 직물의 디자인도 도맡았다.

마티스의 스테인드글라스는 다른 것들과는 비교해도 굉장히 이색적이다. 흰색 벽을 바탕으로 거대한 창가에 붙여진 유리창은 단순하고 깨끗한 선과 색으로 이루어졌는데, 파란색과 식물, 물고기는 지중해의 푸른 바다를 상징한다. 그리고 창가에 비지는 빛은 단순한 파란색이 아닌 더 영롱한 색으로 비친다.

Henri Emile-Benoit Matisse
Henri Emile-Benoit Matisse

1941년 마티스는 십이지장암 수술을 받았다. 수술 이후에는 서있으면 고통이 심해 도저히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예술 열정은 암 수술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대신 앙리 마티스는 색종이 공예를 시작했다. 이 작업은 침대나 안락의자에서도 할 수 있었고 조수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는 밝고 생기 있는 다채로운 색채의 종이를 오려 캔버스 위에 배치했다. 색종이 작품들을 보면 추상적이고 소박한 양식이 느껴진다. 마티스는 "기존에 해왔던 회화보다 이 종이 작업이 나의 예술을 더 높은 완성도로 표현할 수 있게 해줬다", "가위는 연필보다 감각적이다"라고 할 정도로 높은 애정을 보였다.
 

'이카루스' / 플리커, Gautier Poupeau
'이카루스' / 플리커, Gautier Poupeau

1946년에 만든 '이카루스'는 색종이로 표현한 콜라주 작품이다. 그리스신화 인물인 이카루스는 미로에 갇혔다가, 날개에 밀랍을 붙여 날아서 탈출했다. 그리고 욕심이 나서 태양까지 갔는데, 밀랍이 녹아떨어져 죽었다. 가슴의 빨간 점은 동경심을 가진 인간의 심장을 상징하며, 노란 별무늬는 날개의 깃털이다. 또한 마티스는 이카루스를 통해 당시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사한 공군 비행사를 상징하는 의미도 담았다.
 

푸른 누드 / 플리커, Eljay
푸른 누드 / 플리커, Eljay

1952년 '푸른 누드'는 단순한 색으로도 내면의 감정에 강렬한 작용을 일으키고자 했던 마티스의 철학을 대표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미와 조형미가 가득한 이 그림은 다양한 분야에서도 오마주 되었다. 특히 손작업으로 다양한 도형을 평면에 표현하는 현대적 그래픽 아트의 시초가 됐다. 작품은 종이에 불투명한 수채물감인 구아슈를 칠하고 가위로 오려내어 풀로 붙였다.
 

'삶의 기쁨' (1906) 야수파 특유의 폭발적인 색채를 진정시키고 좀 더 평온하고 안락한 분위기로 그린 이 그림을 마티스는 노동자들이 아무 근심없이 누울 수 있는 안락의자같은 작품이다라고 설명했다 / 위키피디아
'삶의 기쁨' (1906) 야수파 특유의 폭발적인 색채를 진정시키고 좀 더 평온하고 안락한 분위기로 그린 이 그림을 마티스는 노동자들이 아무 근심없이 누울 수 있는 안락의자같은 작품이다라고 설명했다 / 위키피디아

마티스는 자유롭고 확신에 찬 색채의 마술사였다

앙리 마티스는 생애 동안 많은 비판을 받았다. 물론 이것은 명성을 얻기 전인 초창기에 집중됐다. 비판의 단골 내용은 여성적이다, 단순하다, 비일관적이다 등이다. 마티스도 이러한 논란을 잘 알고 있었고 적극 해명하고자 했다. 자신의 예술 철학을 옹호하는 글을 쓰는가 하면 수많은 언론 인터뷰도 가졌다.

작가의 직접적인 설명들을 통해 우리는 마티스의 예술 철학을 잘 알 수 있게 된다. 마티스가 원하는 것은 보이는 그대로가 아닌 자신의 경험이고 솔직한 감정의 표현이다. 그리고 강렬한 색채의 쓰임이 이 표현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원칙을 한 번도 잃지 않았기에 말년의 마티스는 스스로 자신의 작품 세계는 항상 일관되었다고 평했다.

한편 앙리 마티스는 피카소의 유일한 라이벌이기도 했다. 물론 둘은 많은 교류를 나눈 친구이기도 했다. 단순하면서도 강렬했던 야수파와 비평적이고 난해한 입체파는 다른 듯하지만 마티스는 피카소의 큐비즘에 잠시 심취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자존심이 강한 피카소는 유일하게 마티스를 인정했다. 피카소는 "그의 뱃속에는 태양이 들어 있다"라고 말했다.

마티스는 정말 우연한 계기로 그림을 시작했고, 그림 덕분에 인생이 바뀌었다. 말년에는 거동도 불편할 정도로 괴로워했으면서도 예술을 포기하지 않았다. 마티스의 작품들을 보면 아주 자유분방하고 밝으며 행복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두 번의 세계대전과 잦은 질병, 수많은 비판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실제로 당시 유럽에서는 세계 대전으로 인해 우울하고 비관적인 예술이 유행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앙리 마티스의 행복과 철학을 앗아가지는 못했던 것 같다. 마티스의 작품들을 감상하면 그속에서 지금도 생생하게 넘쳐흐르는 자유로운 정신과 행복의 힘을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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