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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화가의 대명사, '파블로 피카소'의 독특한 작품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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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화가의 대명사, '파블로 피카소'의 독특한 작품 세계
  • 최상혁 기자
  • 승인 2019.10.15 15: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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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에 맞서 싸운 자유로운 영혼', 현대미술의 시초가 된 큐비즘을 개척하다
'첫 영성체' 1895년 [퍼블릭 도메인]

[핸드메이커 김강호 기자] 이 그림은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1973)가 불과 15세의 나이에 그렸던 '첫 영성체'이다. 과히 피카소의 천재성을 알 수 있었던 그림이다.

피카소는 말을 시작하기 전에 그림을 먼저 그렸다고 할 정도로 그의 뛰어난 재능은 천재 화가의 대명사 격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또한 그가 남긴 흔적은 현대 미술의 족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으며 지금도 초고가로 비싸게 경매되는 미술품의 목록에는 피카소의 이름이 항상 빠지지 않는다.

피카소는 스페인의 항구 도시 말라가(malaga)에서 태어났으며 부친 역시 화가였다고 한다. 그의 천재성을 일찍이 눈여겨본 아버지는 그를 위해 예술 도시인 바르셀로나로 이사를 갔으며 왕립 아카데미에 보내 그림을 배우게 했다. 하지만 피카소는 틀에 박힌 학교 수업을 싫어했고 자유로운 자신만의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기를 선호했다.


'청색 시대'와 '장미빛 시대'

아버지와의 수많은 갈등에 시달린 끝에 결국 피카소는 19살 때에 아버지를 떠났다. 이후 바르셀로나, 파리 등 예술 도시들을 전전하며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시작하게 된다.
 

'기타치는 눈먼 노인', 1903년 [출처- 플리커, uhuru1701]

1901년부터 4년 동안 피카소는 바르셀로나 빈민가의 거리 속에서 가난한 일상을 보냈는데 피카소의 생애 중 가장 우울한 시기였다. 특히 그의 친구 카사게마스가 실연의 슬픔으로 자살한 사건은 피카소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때의 시대를 '청색의 시대(Blue Period)'라고 한는데 청색시대 작품들은 우울하고 짙은 파란색의 작품들이 많았다. 대표작으로 기타치는 눈먼 노인, 다림질하는 여인, 늙은 유대인 등이 있다.
 

'파이프를 든 소년', 1905년 [출처- 플리커, alltollz_org]

1904년부터 시작된 2년의 기간은 '장미빛 시대(The Rose Period)'라고 한다. 이 시기에 피카소는 많은 친구를 사귀고 처음 연인을 사귀기도 했다. 점차 작품 구성에 평온하고 긍정적인 인상과 색상이 들어가게 된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광대, 곡예사가족, 파이프를 든 소년 등이 있다.

특히 '파이프를 든 소년'은 2004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9300만 달러에 낙찰되어 14년 동안 가장 비싼 그림으로서 남아 있던 빈센트 반 고흐의 '의사 가셰의 초상' 기록을 깨트리기도 했다. 물론 6년 후에는 2010년 자코메티의 '걸어가는 사람' 청동상이 다시 최고가 예술품 기록을 빼았는다.
 

'아비뇽의 처녀들', 1907년 [출처- 플리커, Gautier Poupeau]
'게르니카', 1937년 [출처- 플리커, Laura Estefania Lopez]

거침없는 예술, 큐비즘의 시작

장밋빛 시대 이후의 피카소의 작품세계는 사실주의, 고전주의를 탈피하게 된다. 1907년 그린 '아비뇽의 처녀들'은 피카소가 일으킨 새로운 예술 운동인 큐비즘의 시초가 된 작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당시 이 그림을 본 사람들은 피카소의 동료들조차도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작품에 나오는 여인들은 삐뚫어진 코와 눈, 모난 얼굴을 하고 있다. 도무지 정상적인 그림이라고 할 수가 없다. 이 그림은 아프리카 흑인 조각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기존에는 없었던 조형적 요소와 입체 형태분석을 드러내고자 했다.

큐비즘(Cubism, 입체주의)은 폴 세잔이 처음 시작했으며 피카소가 그 체계를 완성했다. 피카소는 큐비즘을 통해 3차원적 시각을 입체적으로 표현하고 원근 및 종근 법칙 등으로 사물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을 거부하고 사물의 다양한 시각을 하나의 화폭에 보여주고자 했다. 

이 큐비즘은 종래의 그림의 개념을 뛰어넘었다. 기존 자연을 그대로 묘사한다는 그림의 당연시되었던 원칙을 전면 부정한 것이었다. 피카소는 큐비즘을 통해 실제로 사물을 그대로 재현한다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우리가 보는 것은 실재하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가졌고 이는 이후 현대미술의 시평을 여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회주의에 심취했던 피카소는 정치적인 성향을 띠는 작품들도 만들기 시작한다. 1937년에는 독일군의 스페인 민간인 폭격을 풍자한 '게르니카'를 그렸고 비슷한 시기, 전쟁의 비극을 통한 슬픔을 드러낸 '우는 여인'도 그린다. 점차 작품에서 피카소의 독특하고 괴기한 표현법들이 드러나게 된다.
 

'우는 여인', 1937년 [퍼블릭 도메인]

이후에도 피카소는 레지스탕스 및 공산당원으로 활동하는 등 아주 정치활동을 활발하게 벌였으며 6.25를 배경으로 '한국에서의 학살' (1951)과 벽화 '전쟁과 평화'(1952)를 그린다.
 

다양한 분야와 표현을 넘나든 선구자

피카소는 생애 동안 1만 3,500여 점의 그림을 그린 화가였지만 또한 700여 점의 조각품도 남긴 조각가이기도 했다. 아울러 2차 세계대전 이후인 노년에는 석판화, 도자기를 제작하는 것에 열중하여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았고 다양한 분야와 표현을 넘나드는 예술 활동을 펼쳤다.

피카소가 오늘날처럼 불후의 명성을 얻은 것에는 그의 그림 실력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어린 나이에도 아버지의 편견과 맞서 싸웠으며 큐비즘을 시작할 때도 수많은 혹평들을 받았다. 만약 그가 대중들의 마음에만 드는 그림을 그렸다면 미술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었을까

진정한 천재는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새로운 것을 과감히 시도하면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불후의 명성이란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자에게 찾아오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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