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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스케치] 인쇄는 시대의 표현이자 역사의 증언이다, 송파책박물관 기획전시《인쇄, 시대의 기억을 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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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스케치] 인쇄는 시대의 표현이자 역사의 증언이다, 송파책박물관 기획전시《인쇄, 시대의 기억을 품다》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4.02.08 09: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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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 시대의 기억을 품다》展 /김서진 기자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서울 송파구는 오는 8월 31일까지 송파책박물관에서 한국 인쇄사를 다룬 특별 기획전 《인쇄, 시대의 기억을 품다》를 개최한다.

책은 인쇄로 만든다. 현대에는 인쇄 기계를 사용해 비교적 쉽게, 대량의 책을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기계가 없던 과거에는 어떻게 책을 만들었을까? 인쇄 기계가 등장하기 이전에도 인쇄술의 발명은 지식과 정보를 보급하는 데 획기적인 일이었다.

인쇄술이 등장함으로써 비로소 원본과 똑같은 책을 여러 권 만들어낼 수 있었고 더 많은 이들이 책을 나누어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통 시대에는 지식과 정보를 얻는 유일한 수단이 책이었기에 우리 선조들은 최선의 인쇄 기술을 찾고자 부던히 노력했다.
 

전시 전경 /김서진 기자

인쇄술이 발명되기 이전 한 권의 책을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모든 글자를 일일이 손으로 옮겨 쓰는 필사였다. 하지만 필사는 글을 옮겨 쓰면서 글자가 원본과 달라질 수 있다는 위험이 있었다. 또한 책 한 권을 완성하기까지 시간도 오래 걸렸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똑같은 책을 구하기 어려웠다. 지식과 정보가 그만큼 귀한 시절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거듭될수록 인구가 증가했으며 보관하거나 전달해야 할 정보의 양 역시 점차 늘어났다. 방대한 기록을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보다 편리하고 효율적인 방법이 필요해졌다. 이러한 배경에서 인쇄술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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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세기경 중국에서는 돋을새김한 목판에 먹을 묻혀 종이에 찍어내는 방법이 발명되었는데 이것이 최초의 인쇄술이다. 목판 인쇄 역시 현대의 인쇄술에 비교하면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방법이었으나 비로소 내용과 구성이 원본과 똑같은 인쇄물을 여러 장 만들어낼 수 있었다. 목판 인쇄를 시작으로 목활자·도활자·금속활자 등의 활자 인쇄술이 개발되면서 더 많은 서적을 출간할 수 있게 되었다. 목판 인쇄와 활자 인쇄는 19세기 활판 인쇄기가 발명되기 전까지 지식과 정보의 보급에 기여했다.
 

직지 금속활자 인쇄과정 /김서진 기자

목판 인쇄는 글을 새긴 나무판에 먹을 묻혀 종이에 찍어내는 방식이다. 751년 통일신라 시기 간행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현재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목판 인쇄물로 남아 있다. 목판인쇄술은 고려시대 들어 더욱 발전했으며 불교가 국가적 종교였던 고려에서는 불경과 같은 불교 관련 서적이 활발히 간행되었다. 조선에 들어서 인쇄는 고려와는 또다른 국가적 사업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조선 정부는 유교 사상을 전파할 목적으로 유교 이념을 담은 서적을 편찬하는 데 주력했다. 이와 같이 삼국시대부터 사용된 목판 인쇄술은 불교 경전을 비롯해 널리 읽힐 만한 책을 만들어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오래 보관해야 하는 책은 목판으로 판본을 만들어 두면 언제든지 다시 인쇄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목판 인쇄는 근대적인 인쇄 기계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가장 널리 활용되던 인쇄 방식이었다.
 

《직지》금속활자인판 /김서진 기자

국가무형문화재 제101호 금속활자장 임인호 복원작. 직지심체요절의 금속활자 인쇄판 복원본이다. 2011년에서 2015년 사이 '고려 금속활자 복원사업'으로 제작한 금속활자 인쇄판의 일부다. 고려시대 밀랍 주조법으로 복원한 금속 활자로 만들었다.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김서진 기자

목판 인쇄는 같은 책을 여러 권 인쇄해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여러 가지 단점도 있었다. 목판 제작에는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었으며 하나의 목판으로는 같은 내용만 인쇄할 수 있었기에 다양한 책을 인쇄하기도 어려웠다. 또한 나무판이 휘거나 갈라지는 일이 잦았고 여러 번 인쇄하면 목판의 글자가 쉽게 닳아버리기도 했다.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고자 활자 인쇄술이 개발된다.

활자는 각각의 글자는 낱개로 만든 것으로 각 활자를 책의 내용대로 조립해 인쇄하고 이를 해체한 후 다시 조립해 다른 책을 찍어낼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부터 금속활자를 사용했다.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된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물이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의 기술과 전통을 이어받아 건국 초기부터 여러 종류의 금속활자를 만들었다. 특히 1403년에는 주자소라는 관청을 설치해 유교 경전을 출간하는 데 힘썼다.
 

『춘추좌씨전』 /김서진 기자

유교를 국가 통치 이념으로 세운 조선 왕조는 유교 경전이나 의례서 등을 전국에 널리 배포해 유교 이념을 사회 곳곳에 뿌리내리고자 했다. 건국 이후 나라의 기틀이 점차 안정되자 1403년 조선의 3대 왕 태종은 금속으로 활자 10만여 자를 주조해 다양한 서적을 제작해도록 했다. 이때 만들어진 활자를 그 해의 간지에서 이름을 따 '계미자'라고 한다. 조선 왕조는 계미자를 시작으로 경자자, 갑인자 등 금속활자를 꾸준히 주조해 여러 서적을 간행했다.

목판인쇄술 또한 적절히 활용했는데, 서울의 중앙 관서에서 다양한 책을 소량 인쇄해 지방 각지로 보내면 지방 관청에서는 활자 인쇄본을 바탕으로 목판을 새겨 대량으로 인쇄하거나 필요에 따라 다시 찍어 지방 곳곳에 배포했다. 조선 왕조는 이러한 방식으로 인쇄 기술을 발전시키고 서적 인쇄량을 증대해 나갔다. 서적 인쇄량 증가는 사회 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민간으로 확장되었다. 사대부와 같은 문인들은 여유로운 경제력을 바탕으로 개인 문집을 출간했다. 더불어 지식과 정보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며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방각본도 등장했다.
 

『소학서도』 /김서진 기자

조선후기 목판으로 인쇄한 아동용 유교 수양서. 『소학』은 일상생활의 예의범절이나 충신과 효자의 이야기 등을 모아 놓은 유교 입문서다. 이 책은 『소학』각 편의 주요 내용을 그림으로 그리고 간략한 해설을 더해 이해하기 쉽게 편집했다.
 

전시 전경 /김서진 기자

조선후기 사회 경제가 발달하면서 민간에서 간행하는 책도 점차 늘어났다. 민간에서는 주로 만들기 쉽고 저렴한 목판이나 목활자를 제작해 인쇄했다. 16세기 이후 각 지방의 서적 인쇄 기술도 발전했다. 그동안 중앙정부에서 지방관청에 내린 책을 목판이나 목활자로 다시 판각해 지역 곳곳에 배포하던 방식이 도움이 됐다. 각 지역에서 인쇄술을 경험하고 오랜 시간 동안 그 기술력을 쌓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양반들은 자신의 문집이나 가문의 족보를 출간하기도 했다. 일반 민간에서는 상업적으로 출간한 서적이 방대하게 늘어났다. 이러한 책을 '방각본'이라 하는데 '동네나 시장'에서 새겼다는 의미다. 방각본은 소비자의 수요에 맞춰 출간해 책의 종류도 다양했다.
 

능화판 /김서진 기자

책의 표지에 무늬를 찍어 내는 장방형의 나무판. 고서의 표지를 장식하는 심미적인 목적과 책의 본문을 보호하는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본 능화판의 앞면에는 원무늬 안에 연꽃무늬, 번개무늬, 꽃무늬가 있고 뒷면에는 격자무늬가 새겨져 있다. 
 

시전지판 /김서진 기자

조선시대 양반들이 지인과 편지나 시를 주고받을 때 종이에 무늬를 찍던 나무판. 선비들의 취향에 따라 사군자나 연꽃, 소나무, 학 등의 무늬를 조각하고 가는 행선을 덧붙이기도 했다. 책에는 먹물만을 사용하는 데 반해 시전지판은 여러가지 색으로 찍어낼 수 있었다.
 

전시 전경 /김서진 기자

19세기 근대화의 물결은 인쇄 출판 산업에도 밀려왔다. 당시 세계, 과학, 지리, 풍속 등에 대한 정보는 근대인이 변화한 시대를 살아가려면 꼭 갖추어야 할 자질로서 인쇄물에 반영되었다. 근대 인쇄 기술의 도입은 서적 출판량의 증대로 이어졌다. 더 이상 사람이 한 장 한 장 찍어낼 필요 없이 인쇄 기계를 이용해 짧은 시간 내에 여러 장을 효율적으로 인쇄할 수 있게 되었다.

활자 제작 방법도 구리와 주석 등의 합금을 주재료로 삼아 재래식으로 제작하던 기존 방식이 아니라 납을 이용해 정형화된 틀에 기계로 찍어내는 방식으로 변화했다. 이를 기존의 전통적인 금속 활자와 구분해 '신식연활자'라고 불렀다. 이후 신식 인쇄 기계와 활자를 이용한 근대식 인쇄소가 잇따라 설립되었다.

1895년 고종은 새로운 시대의 물결 속에서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 국민을 계몽하고 인재를 길러내고자 신교육 제도를 공표하고 교과서를 편찬했다. 하지만 일제는 우리 민족의 애국적인 언론 활동을 저지하고자 1909년 출판법을 제정하고 국내 출판물을 검열했다. 민족 출판사들은 일제의 검열에 대항해 애국계몽사상을 전파하고자 출판물을 꾸준히 간행했다.
 

전시 전경 /김서진 기자

일제는 1909년 2월 23일 출판법을 제정해 공포했다. 이 법으로 모든 출판물은 일제의 허가를 받고 출판한 후 다시 납본하는 이중 검열을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일부 지식인들은 대중에게 교화 사업을 펼치려면 서적을 출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박문서관은 『춘향전』, 『구전민요선』 등을 출간했고 신문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월간지인 『소년』, 『청춘』등을 발행했다. 한성도서주식회사는 최남선의 『백두산근참기』, 한용운의 『님의 침묵』 등을 출간해 대중의 큰 호응을 받았다. 이때 간행된 고전소설은 흔히 '딱지본'이라 부르는 형태로 제작되었다. 본문은 비교적 큰 활자인 4호 활자로 인쇄되고 표지에는 다채로운 색상으로 그림이 그려졌다.
 

『소년』 제2년 제3권 /김서진 기자

최남선이 창간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종합 잡지. 1908년 11월 신문관에서 첫 호가 간행되었으며 1911년 5월 통권 23호로 종간되었다. 이 잡지는 『소년』의 제2년 제3권으로 '청년들이 바라는 소원', '해상을 중심으로 살펴본 대한의 역사' 등이 수록되어 있다.
 

『언문』 /김서진 기자

지석영이 편찬한 국어사전 형태의 국한문 단어집.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는 한자 19,000자 가량을 한글, 한자 순으로 병기하고 가나다 순서대로 배열해 독음을 달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어사전 형식 교과서다.
 

출판 허가서 /김서진 기자

1935년 조선총독부에서 영천군지 간행을 허락하는 허가서. 1909년부터는 출판을 하려면 일제에 사전 허락과 검열을 받아야 했으며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경무국에서 주관했다. 문서의 내용은 발간 주체, 발간 내용, 이에 따른 조선총독부의 허가 사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개벽』 9월호 /김서진 기자

1920년 개벽사에서 창간한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종합 잡지. 일제에 맞서 민족 문화를 지키고자 문학, 예술 등 다양한 분야의 글을 수록했다. 일제로부터 압수, 정간, 벌금 등 가혹한 탄압을 받다가 1926년 통권 제72호를 마지막으로 강제 폐간되었다.
 

좌측부터 『릉라도』, 『유충렬전』, 『하진양문록』 /김서진 기자

조선의 근대식 인쇄는 활판 인쇄기와 함께 시작되었다. 1833년 조선 조정이 파견한 수신사는 일본으로부터 족답식 활판 인쇄기 2대와 신식 연활자, 활판 등을 조선에 들여왔다. 이것이 조선에 들어온 최초의 서양식 인쇄기였다. 이를 바탕으로 조선 조정은 박문국이라는 근대식 출판사와 인쇄소를 신설하고 10월 1일 「한성순보」라는 이름의 신문을 발행했다.

1895년에는 새로운 교육 제도를 공표하고 학부를 신설해 근대적 내용을 담은 교과서 편찬에 착수했다. 조정이 도입한 신식 인쇄술은 곧이어 민간에도 영향을 미쳤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민간 인쇄 출판사인 광인사를 비롯해 휘문관, 보성사, 신문관 등이 설립되었으며 새로운 근대 기술을 이용해 『충효집주합벽』, 『농정신편』, 『소년』, 『청춘』 등 서적이 출간되었다. 이 시기 출간된 서적은 애국 계몽 운동이라는 목적 아래 국민을 계몽하고 애국 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해당 교과서들의 문을 열어 관람 가능 /김서진 기자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은 한반도를 폐허로 만들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도국민과 정부는 미래 세대를 위한 교육을 멈추지 않았다. 피난지에서도 천막으로 임시 학교를 만들어 노천에서 수업을 진행할 만큼 국민들의 교육열은 사그라지지 않았고 교과서와 학습 참고서의 수요도 더욱 높아져 갔다. 피난지였던 부산과 대구에서는 일시적으로 재고 서적 품귀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다.

당시에는 인쇄 시설이 굉장히 열악했으며 물자도 부족했기에 서적 인쇄에 어려움이 많았다. 특히 인쇄용지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실정이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제기구의 지원을 받아 교과서를 인쇄해 전국에 배포했고 교육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전쟁으로 인한 인쇄 업계의 침체는 1950년대에 들어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다. 교육과 배움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만큼 인쇄업 부활을 바라는 인쇄 업계 종사자들의 열망도 가득했다. 인쇄인들의 노력 덕분에 국내 인쇄 산업은 점차 안정화되어 갈 수 있었다.
 

『사회생활 5-1』 /김서진 기자

전쟁 중에도 정부는 '국가 교육의 재건'이라는 목적 아래 대부분의 물자와 역량을 교과서 인쇄에 집중했다. 한국전쟁 이후 인쇄용지, 인쇄 기기 부품 등 원자재 가격이 상승하면서 출판 비용과 인쇄 비용이 증가했고 서울에 있던 인쇄 시설의 70%가 파괴되어 국정교과서 발행에 어려움이 많았다.

1954년 문교부는 국제연합한국재건단과 유네스코의 원조를 받아 교과서 용지 문제를 해결하고, 국정교과서 주식회사 인쇄 시설의 건설 자금을 마련해 국정교과서를 인쇄할 수 있었다. 당시 국제지구의 지원으로 인쇄된 교과서의 가장 뒷면에는 국제연합한국재건단과 유네스코의 원조에 대한 감사 인사가 기록되어 있다.
 

등사기 /김서진 기자

미국 A.B.DICK COMPANY사에서 만든 등사기. 등사 인쇄의 최종 단계에서 자료를 찍어낼 때 등사기를 사용한다. 지금은 복사기로 필요한 자료를 쉽게 복사할 수 있으나 복사기가 없던 시절에는 회사나 학교 등에서 소량의 인쇄물을 제작할 때 등사기를 사용했다.
 

지형 /김서진 기자

인쇄를 위해 제작한 지형. 활판으로 대량인쇄를 할 때 원판이 닳는 것을 방지하고자 사용했다. 원판에 젖은 종이를 여러 겹 덧대어 모양 그대로 찍어내고 여기에 녹인 납을 부어 다시 판을 만들었다. 이 연판으로 인쇄하면 원판은 보존한 채 여러 차례 인쇄할 수 있었다.

1953년 휴전 이후 인쇄 업계는 전쟁으로 파괴된 인쇄 시설을 복구하고자 노력했다. 인쇄 업계는 일본과 유럽 각국으로부터 최신 인쇄 기자재를 다시 수입하기 시작했고 인쇄 기술자들은 해외로 유학해 기술을 배워 왔다. 이렇게 들여온 선진 인쇄 시설과 인쇄 기술은 국내 인쇄 산업에 큰 전환기를 가져왔다.

1955년 서울기계공업고등학교에 인쇄과가 신설되어 최신 인쇄 기술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교과서가 제작되었고 인쇄 기술자들도 배출되었다. 이러한 노력을 바탕으로 1964년에는 삼화인쇄, 홍원상사, 민중서관 등의 인쇄소가 일본과 베트남 등지에 조판지형, 교과서, 국산 인쇄용지 등을 수출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급속한 경제 성장도 인쇄업에 탄력을 가져왔으며 각종 인쇄물에 대한 수요로 이어졌다.
 

전시 전경 /김서진 기자

1960년대 중반부터 정부의 5개년 경제개발정책이 실시되며 인쇄 시설도 점차 현대화되기 시작했다. 인쇄 시설의 작동 방식도 수동에서 자동으로 바뀌었고 대형 오프셋 인쇄기가 본격적으로 도입되며 단색 인쇄가 다색 인쇄로 대체되는 등 인쇄 기술력이 국제적인 수준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인쇄물 시장이 국내외로 확대되었고 자연스럽게 컬러 인쇄물의 수요도 증가했다.

원색 동판 인쇄로만 색을 표현할 수 있었던 컬러 인쇄는 1965년 서독제와 스위스제 2색 오프셋 인쇄기, 1967년에는 4색 오프셋 인쇄기, 1970년대에는 6색 오프셋 인쇄기에 이어 전자 색 분해기가 도입되면서 색이 다양해졌고 우리나라의 다색 인쇄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1980년 컬러 TV가 최초로 도입되고 1988년 서울올림픽이 개최된 것을 기점으로 컬러 인쇄물이 점점 화려해지기 시작했다. 최신식 오프셋 인쇄기의 도입은 현대 인쇄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 되었다. 시간당 1만 5,000매를 양면으로 인쇄할 수 있는 최신식 오프셋 인쇄기는 색과 형태가 다채로운 책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게 했다.
 

중앙문화사 광고지 /김서진 기자

중앙문화사의 학생 백과대사전 광고지. 중앙문화사에서 발간한 학생 백과대사전 전16권에 대한 광고가 수록되어 있다. 특히 그래프, 원색 사진, 그림 등 인쇄물의 특징을 강조하고 있다.
 

태극문화사 광고지 /김서진 기자

태극문화사의 컬러판 소년 소녀 세계의 문학 전집 광고지. 태극문화사에서 발간한 세계의 문학 전24권에 대한 광고가 수록되어 있다.
 

CTP 방식으로 출력한 인쇄물 /김서진 기자

오프셋 인쇄는 종이에 직접 활자를 찍어 인쇄하는 직접 인쇄 방식이 아니라, 금속판에서 고무 롤러로 잉크를 옮겨 종이에 인쇄하는 간접 인쇄 방식이다. 이때 사용되는 금속판은 컴퓨터의 디지털 데이터를 인쇄용 판에 바로 출력하는 CTP 방식으로 만들어지는데 19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컴퓨터에서 필름지를 따로 출력해 금속판으로 옮기는 중간 과정이 필요했다. 이 방식은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고 망점이 손실될 수 있다는 위험이 있었으나 CTP로 발전하면서 이러한 단점을 개선할 수 있었다.

현대의 책 인쇄는 더 효율적인 방법으로 대량 인쇄된다. 책의 본문이 들어가는 내지는 조금씩 달라지기도 하지만 보통 전지 한 면에 16쪽이 인쇄되니 양면으로 32쪽을 한번에 찍어낼 수 있다. 즉 320쪽 분량의 책 한 권을 만들려면 전지 10장만 인쇄하면 되는 것이다. 인쇄된 전지를 반으로 자르고 세 번 접으면 우리가 보는 책의 크기가 된다. 페이지를 순서대로 모아 재단하고 책등과 표지를 붙이면 비로소 책이 된다. 
 

『인생의 열 가지 생각』 PS판(K) /김서진 기자

CTP로 출력한 표지 인쇄판 중 흑색용 판재. CTP 방식은 컴퓨터의 디지털 데이터를 인쇄용 판재에 곧바로 출력하는 방식을 말한다. 한 장의 인쇄물에 다양한 색상을 표현하려면 청색, 적색, 황색, 흑색용 판재 4장이 필요하다.
 

인쇄는 시대의 표현이자 역사의 증언이다 /김서진 기자

전시 관계자 측은 "부처의 공덕을 기원하며 간절한 염원을 담아 인쇄한 불경부터 국가의 이념을 전파하고자 했던 유학 서적, 인쇄 기계가 발명되며 다양해진 인쇄물,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컬러 인쇄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며 만들어진 서적까지 우리의 복잡다단한 세월이 책에 담겨 있다"고 밝혔다.

이번 전시에서는 '인쇄, 시대의 기억을 품다'라는 주제로 고려 시대부터 현대까지 우리나라 책 인쇄의 역사, 책에 담겨 있는 인쇄의 흔적을 살펴보면서 우리의 삶과 생각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알 수 있다. 전시는 8월 31일까지.

 

2017년 내내 뜨거운 감자였던 전안법은 현실과 다른 불합리함으로 수공예 작가들의 목을 죄어오는 올가미 같았습니다. 극적으로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많은 작가들이 한숨 돌릴 수 있게 됐지만 아직 바뀌어야 할 부분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핸드메이커는 이러한 불합리에 ‘NO’를 외치기 위해 시작됐습니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은 정말 매력적인 일입니다. 그들은 실을 꿰 엮기도, 펜과 물감 으로 그리기도, 흙을 빚어내기도, 금속을 녹여 두드리기도, 정성스런 요리를 만들어 내기도 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만들고 있는 세상을 함께 들여다보려 합니다.

핸드메이커는 국내외 다양한 문화·예술·산업 현장을 발로 뛰며 취재하는 독립 매체로서 주체 적인 취재와 기사를 통해 여러 미디어·포털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기사의 가독성을 저해하는 광고 배너를 통해 수익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이는 독자를 위한 선택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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