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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하학적 설계로 이루어진 황제의 왕관, 카스텔 델 몬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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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하학적 설계로 이루어진 황제의 왕관, 카스텔 델 몬테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4.02.07 09: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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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텔 델 몬테 /flickr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이탈리아어로 '산의 성'이란 뜻의 카스텔 델 몬테, 몬테 성은 13세기에 세워진 이탈리아 남동부 풀리아주 안드리아 언덕에 위치한 성이다. 팔각형 평면의 건축과 디테일로 유명하며, 1996년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당시 유네스코 측은 '중세 군사건축의 독특한 걸작'이라 평했으며 이탈리아 사전에는 '프레데릭2세가 지은 가장 매혹적인 성'이라는 설명이 있다. 다만 몬테 성에는 해자(외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성 주위를 파 경계를 삼은 구덩이)나 도개교(들어올릴 수 있는 다리)도 없어 방어 요새로는 쓰이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

몬테 성의 이름은 인근에 있는 산타마리아 델 몬테 수도원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성이 다른 건축물에 비해 크기가 작았기 때문에 혹자는 왕의 사냥 전용 별장이 아니었냐는 추측도 있다. 일부 학자들은 원래는 커튼월(외벽)이 있었고 이것이 성채 역할을 하지 않았냐는 주장을 하기도.

성이 건설되었을 당시 이 지역은 물이 풍부하고 초목이 무성해 비옥한 땅을 자랑했다고 한다. 한때는 감옥으로, 전염병이 돌았을 때는 피난처로 사용되었던 몬테 성은 화려한 대리석 벽과 장식으로 치장된 기둥들이 있었지만 그 또한 침략에 의해 파괴되거나 근처 건축물 재건에 재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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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으로 비치는 햇빛 /flickr

슈바벤의 프리드리히2세는 중세 역사상 가장 매혹적인 인물 중 하나다. 통치하는 기간 동안 그는 이탈리아 남부 전역에 많은 성을 건설했지만 몬테 성은 프리드리히2세의 열정의 근원이라 해도 무방하다. 그는 1221년 3월 처음으로 풀리아를 방문했고, 자신의 로망이었던 사냥을 즐길 수 있는 강과 숲이 가득한 이 지역과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그가 방문한 지 2년만에 시칠리아 왕국의 수도는 풀리아주에 있는 도시 포자로 옮겨진다.

그는 종교를 열정적으로 믿지 않았고, 대신 다른 분야에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보였다. 유럽뿐만 아니라 아라비아의 과학자들과 교류하며 수학, 물리학, 천문학에 대해 토론했다. 학문에 대한 열정은 그를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나중에는 시칠리아의 국왕으로서 그리스, 아랍, 이탈리아 및 유대인 학자들을 그의 궁정으로 이끌게 했다. 그는 학자들과 예술가들을 궁으로 초대해 아리스토텔레스, 이븐 러쉬드, 프톨레마이오스 등의 작품들을 라틴어로 번역하도록 했다.

과학적인 사고를 가진 그의 지휘 아래 건설된 몬테 성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사자에서부터 시작해 고딕 양식의 탑 디자인까지 극도의 기하학적, 수학적인 정확성을 더해 지어졌다. 몬테 성은 왕의 사냥 전용 별장만이 아닌 주거의 기능도 한 것으로 보여진다. 한 타워에는 빗물 수집용 탱크가 있고, 또 다른 타워에는 탈의실이 있는 욕실들이 있다. 빗물을 모아 화장실과 욕실에 활용하는 등 배관 시스템도 갖췄던 것으로 본다. 또 호화로운 왕실 거주지를 알리는 듯 대리석으로 깔린 넓은 방도 존재한다.

프리드리히2세는 풀리아주, 시칠리아 전역에 많은 성과 요새를 지었지만 그 중 가장 규모적으로 그의 영향력이 컸던 곳은 몬테 성이었다. 그는 몬테 성을 자신의 영구적인 궁전으로 삼았다. 몬테 성은 프리드리히2세의 권력과 명성의 상징으로 하기엔 안성맞춤이었다.
 

성 내부 모습 /flickr

이후 교황에 의해 시칠리아 국왕으로 임명된 샤를1세 치하에서 몬테 성은 교도소로 사용됐다. 앙주 샤를1세는 국왕 자리를 두고 싸웠던 만프레트의 아들과 슈바벤 궁정의 추종자들을 몬테 성에 가뒀다. 18세기 들어서는 성의 한 부분이었던 대리석과 기타 장식물이 약탈당했고, 부르봉 왕가의 구성원들은 몬테 성의 대리석 기둥과 창틀을 가져와 이탈리아캄파니아주 카세르타에 있는 자신들의 궁전 건설의 재료로 썼다. 오랜 기간 동안 버려져 있던 몬테 성은 1876년 이탈리아 정부가 구매했고 1928년부터 복원 작업이 시작됐다. 여러 차례의 복구 작업을 거친 후 몬테 성은 1936년 국가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문으로 들어가는 관람객들 /flickr

프리드리히 2세는 풀리아 지역의 많은 성 건설을 지휘했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몬테 성의 디자인은 독특하다. 건축물 모서리마다 팔각형 탑이 있는 프리즘 모양으로, 안뜰이 성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다. 각 방에는 아치형 천장이 있으며 3개의 타워에는 계단이 있다.

화려한 정문의 입구와,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입구 등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은 두 곳이다. 화려한 문양의 정문은 페디먼트(그리스-로마 시대 건물에서 흔히 보이는 삼각형의 마감장식을 한 건물의 벽)와 같은 고전 건축의 특징의 보이며 그리스-로마 건축에 관심이 많았던 프리드리히 2세의 영향을 받았다. 다만 프리드리히2세가 몬테 성의 건설을 명령한 건 맞지만 건축가가 누구인지는 지금도 여전히 수수께끼다. 
 

땅에서 보는 팔각형의 뻥 뚫린 천장 /flickr
면마다 나 있는 창문 /flickr

성의 구조는 안뜰을 둘러싼 팔각형 형태가 대표적으로, 팔각형의 각이 있는 부분 역시 팔각형 형태의 탑이 붙어 있다. 벽은 화려한 석영 석회암으로 된 거대한 블록으로 건축되었으며 벽면을 휘감은 중간 높이에 돌림띠(벽, 천장, 처마의 가장자리를 마무리하거나 장식하기 위하여 길게 돌려 댄 띠)가 있고 벽면은 내부에 2개의 층으로 나뉘어 있다. 천장은 조각된 기둥들이 떠받치고 있다. 프리드리히2세는 특히 숫자 8에 집착했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성 1층에는 8개의 방이 있고 2층에도 8개의 방이 있다.

건물 내부에 있는 모든 방은 크기가 같으며, 건물의 두 개 층에 각각 여덟 개의 사다리꼴 방이 위치한다.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8개의 탑은 팔각형 모양으로, 숫자 8이 강박적으로 반복된다. 팔각형 모양에 대해 특히 의견이 많은데, 팔각형이 사각형(지구)과 원(하늘)사이의 중간 모양이라는 것이다. 땅의 사각형과 하늘의 원 사이의 중간인 팔각형은 지상에서 영적인 차원으로 이동할 수 있는 통로를 의미한다는 것. 실제로 내부에서 팔각형의 뻥 뚫린 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충분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 듯 보인다. 
 

예루살렘 '바위의 돔' /flickr

반대로 프리드리히 2세가 제6차 십자군 당시 목격했던 예루살렘의 가장 기념비적인 랜드마크인 '바위의 돔'이나 아헨 대성당의 팔라티노 예배당에서 영감을 받아 팔각형으로 지었다는 다른 학자들의 주장도 있다.
 

하늘과 나무에 대비되어 더 아름다워 보이는 몬테 성 /flickr

몬테 성은 석회암, 대리석, 각력암 등 세 가지의 재료를 사용해 지어졌는데 이것은 건물의 외관을 다채롭게 보이는 효과를 준다. 1층을 비추는 햇빛은 여덟 면에 각각 위치한 8개의 아치형 창문에서 들어온다. 이 성은 하루종일 언덕 위에서 햇빛을 양껏 받을 수 있었는데, 당시 중세 시대에서는 빛을 신의 존재로 생각했다고 한다.
 

이어지는 계단 /flickr

학자들이 이 성을 방어 요새로 쓰지 않았다는 근거로 드는 것이 내부의 나선형 계단인데, 원래 중세의 성 내부에 있는 나선형 계단들은 시계 방향으로 설계되어 있다. 아래에서 적들이 공격해 올 때 일반적으로 사람은 오른손잡이기 때문에 오른손에 든 검이나 창을 방해하도록 하는 기능이다. 그러나 몬테 성의 나선형 계단은 시계 반대 방향으로 되어 있어 적들이 쳐들어왔다면 왼손으로 불편하게 무기를 들어야 했을 테다. 주변 성벽이나 해자가 없고, 건물 자체가 전략적 요충지에 있지 않다는 점도 있지만 이런 디테일 때문에 학자들은 몬테 성이 방어 구조물로서의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다고 추측한다.

당시 몬테 성은 다채로운 대리석, 화려한 모자이크, 그림 및 태피스트리로 장식되어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약탈에 의해 많은 보물을 강탈당했다. 대부분의 문 또한 유색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었지만 프리드리히2세의 맘에 들었던 장식들 또한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13세기 건축된 이 건물은 고딕 양식, 비잔틴 양식, 이슬람 양식이 혼합된 건축학적·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어 역사나 건축 애호가들이라면 반드시 들러야 하는 장소가 됐다. 
 

카스텔 델 몬테 /flickr

12~16세기 이곳은 유럽에서 양모를 많이 생산하는 지역 중 하나였다. 이 마을은 양모와 페코리노 치즈, 양고기 등을 꾸준히 생산했지만 경제규모는 계속 축소되었고 인구도 감소했다. 20세기 후반 주민들이 탄광에서 일하기 위해 벨기에와 프랑스, 스위스, 영국, 미국 등으로 이주하면서 인구 감소가 심각해졌다.

오랜 세월 동안 경제 악화로 이곳에는 새로운 건축물이 들어서지 못했고, 마을과 거리는 중세 및 르네상스 시대와 비교해 별로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최근 들어 이런 분위기가 각광을 받으면서 관광객들이 크게 늘어났고 현재 마을 경제의 대부분은 관광업이 차지하고 있다. 전세계의 방문객들을 끌어들이고 있지만 성이 세워진 경위부터 시작해 8이라는 미지의 숫자로 뒤덮인 고요한 성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많은 질문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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