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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스케치] 세상을 그림으로 보여주는 《일리야 밀스타인 : 기억의 캐비닛》展, 허튼 왜곡은 작품을 훼손시킬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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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스케치] 세상을 그림으로 보여주는 《일리야 밀스타인 : 기억의 캐비닛》展, 허튼 왜곡은 작품을 훼손시킬 뿐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4.01.04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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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야 밀스타인 : 기억의 캐비닛》展 /김서진 기자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멜버른 출신으로 뉴욕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일러스트레이터, 일리야 밀스타인은 독학으로 업계에 뛰어들어 프랑코-벨기에 만화 스타일과 일본 목판화를 연상케 하는 화풍으로 작업한다. 그는 전통적이고 아날로그적인 기법과 디지털적인 기법을 접목시킨다. 그의 작품은 디테일이 강조되었고, 여러 장르를 아우르는 신비로운 요소를 밀도있게 쌓아 관람자로 하여금 향수에 젖어들게 한다.

그는 일러스트레이터협회, 미국 일러스트레이션,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아트에서 인정받은 바 있으며 더 뉴요커, 더 뉴욕타임즈, 메트로폴리탄미술관, 구찌와 협업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두고 "작품을 만들 때 책상에서 벗어나 자전거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거나, 한번도 가보지 않은 뉴욕의 어느 지역이나 상점, 갤러리에 간다"며, "그렇게 하면 머리가 맑아지고 영감이 떠오르는 데 도움이 된다"고 밝혔다. 
 

전시 전경 /김서진 기자

마이아트뮤지엄은 뉴욕 타임즈, 구글, 페이스북, 구찌, LG 등 글로벌 브랜드와 협업하고 뉴욕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사랑을 받고 있는 일러스트레이터인 일리야 밀스타인을 총망라하는 국내 첫 대규모 특별 기획전 《일리야 밀스타인 : 기억의 캐비닛》 Ilya Milstein : Memory Cabinet을 2024년 3월 3일까지 개최한다.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나 호주 멜버른에서 자랐으며 미국 뉴욕에서 활동 중인 일리야 밀스타인은 놀라운 디테일과 맥시멀리즘 화풍으로 순수 예술과 상업 예술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그 경이로운 디테일에는 인간의 보편적 정서에 묘한 울림을 주는 요소가 있는데, 이는 그가 뉴욕을 넘어 세계적으로 두터운 팬 층을 확보할 수 있게 했다. 특히, 최근 한국에서는 LG전자의 TV 광고를 통해 작가의 작품이 널리 알려지게 되면서 더 많은 국내 팬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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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파 후에> /김서진 기자

이번 전시는 이토록 많은 이들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은 작가의 독창적인 시각 언어와 특유의 미시적 세계관을 탐험하며 그의 행선지를 추적한다. 극도로 자세하거나 강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무언가를 보았을 때, 우리들은 탄성을 내뱉기도 하고 헛웃음을 짓기도 한다. 일리야 밀스타인의 작품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경험을 할 것이다.

책장 위 기린 인형의 발에 걸려 있는 구슬 팔찌, 먹다 남은 생선 가시에 어지럽게 붙은 살점들, 보도블록 틈 사이에서 핀 잡초와 민들레 꽃, 친구의 스커트 위에 그려진 하이힐 패턴, 책 사이 끼워진 조그마한 인덱스까지 친절히 그린 작가의 작품에는 작은 것들의 존재감과 매력이 두드러진다. 지극히 일상적이고 소소한 것들의 압도적인 디테일은 보는 이로 하여금 미소를 짓게 하고 작품 앞에 한동안 서서 그것들을 ‘보기’보다는 ‘읽게’ 만든다.

마치 16~17세기 유럽에서 개인의 취향을 반영한 물건들을 전시했던 비밀의 방 분더캄머(Wunderkammer)에 들어와 수집품 하나하나를 감상하던 중 이국적인 책 한 권을 꺼내 들어 한참 동안 읽어 내려가는 듯한 경험처럼 말이다. 이 시각적 향연은 동시에 높은 가독성을 띠고 있는데, 작가가 본인의 캐비닛을 열어 하나씩 수집품을 꺼내어 보고 즉석에서 묘사하듯 분명하고 생생한 표현을 보여준다.
 

<티레이나해 옆 서재> 전경 /김서진 기자
<티레이나해 옆 서재> /김서진 기자

첫 번째 캐비닛 <티레이나해 옆 서재>에서는 단독 또는 둘의 인물이 등장하는 밀스타인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책으로 빼곡한 서재 한가운데서 지중해의 푸른 티레이나 바다를 응시하는 작가 본인을 그린 <티레니아해 옆 서재>작품의 제목을 따온 이 섹션은 그의 자아가 두드러지는 작품들과, 가장 가까운 타인이라고 할 수 있는 연인을 묘사한 작품들을 주로 보여준다.

밀스타인은 어렸을 때부터 드로잉을 즐겼지만 그것이 현실적인 직업으로 이어질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에 건축을 공부하고 조각을 전공했다. 순수예술을 공부하고 작품 활동을 할 당시 그는 전공 소양을 쌓는 것뿐만 아니라 본인의 내면세계에 집중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 이는 그가 일러스트레이터로 전향한 후에도 다양한 영감을 원천으로 한 독특한 화풍의 일러스트레이션을 창작할 수 있게 했다.
 

<연인> /김서진 기자

자화상으로 유추되는 단독 인물이 등장하는 작품에는 고독과 사색의 묘한 양면성이 잘 표현되었고, 신비로운 푸른 방 속 부유하는 연인을 그린 작품 등 한 명 또는 두 명의 존재들의 초현실적인 세계 역시 매력적으로 표현되었다. 
 

<쉬고 마시고 사랑하라> /김서진 기자

<쉬고 마시고 사랑하라>는 '하루의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주제로 제작된 LG전자의 2022년 커미션 작품이다. 커플 뒤편에는 앙리 마티스, 르네 마그리트, 조르주 데 키리코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그림들이 걸려 있고 테이블 위아래에는 몇 가지 조각 작품들이 보이는데 이는 작가의 실제 집에서 볼 수 있는 인테리어 요소와 흡사하다. 이국적인 커플의 외형과는 대조적으로 한국 민화에서 볼 수 있는 호랑이 그림, 산수화, 한국 고가구 등이 LG전자의 현대적 가전제품 디자인과 함께 배치되어 이색적인 조화를 보여준다.
 

<리비에라에서의 추억들> 전경 /김서진 기자

두 번째 캐비닛 <리비에라에서의 추억들>은 몇몇의 인물들이 함께 등장하는 작품으로 구성되어 가족 및 친구들과 즐거운 때를 함께하는 모습 등 일상적인 장면을 그려낸 작품들을 볼 수 있다. 타인의 세계, 또는 타인과 공존하는 세계가 그려진 이 작품들에는 상상의 풍경보다는 실제 장소가 주로 등장하며 앞선 섹션에서 볼 수 있었던 초현실적으로 부유하는 물체들은 이번 섹션에서 보다 현실적으로 놓여 있다.
 

<리비에라에서의 추억들> /김서진 기자

또한 본 섹션에서는 창문과 햇살의 묘사로 외부로의 확장을 암시하는 작품과 더 나아가 실외 풍경까지 함께 묘사된 작품들도 볼 수 있다. 작가의 삶과 작품 모두 내부에서 외부의 세계로 확장되었다고 할 수 있다. <리비에라에서의 추억들>은 이탈리아의 정수가 느껴지는 리비에라 지역에서의 평화로운 한때를 묘새했는데, 나무 사이로 비치는 지중해의 빛과 인체와 벽에 자연스럽게 드리워진 그림자 등 탁월한 빛의 표현은 작품에서 묘사된 정다움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한다.
 

<이야기꾼> /김서진 기자

작가의 작품 전반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이 섬세한 빛의 표현은 디테일한 선의 맥시멀리즘을 초월한 다차원적인 맥시멀리즘으로 확장시킨다. 마찬가지로 <이야기꾼>에서 묘사된 빛은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그려내는 데 분명한 역할을 한다. 

<이야기꾼>은 개성있는 6명의 인물이 뉴욕의 한 아파트에서 여유로운 파티를 즐기는 모습을 묘사한다. 'Raconteur'가 이야기꾼을 의미하듯 햇살을 등지고 창가에 서 있는 인물은 나머지 인물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그의 손목시계는 지금이 저녁 시간임을 알려주고 있고 초대받아 모인 지인들은 따뜻한 분위기로 공간을 채우며 여유롭게 해질녘을 맞이하고 있다.

각 인물의 화려한 옷 패턴은 물론 카펫, 타일, 화분 등 공간을 구성하는 장식들과 곳곳에 놓여 있는 조각품, 골동품을 찾아보는 재미도 있다. 방의 오른쪽 벽에 걸려 있는 포스터는 필립 거스턴의 <이야기>라는 작품으로, 밀스타인이 그려낸 이야기꾼의 순간과도 연결지어 볼 수 있다. 
 

<분더캄머의 송환> /김서진 기자

<분더캄머의 송환>은 각국의 미술품과 유물 등을 수집한 공간에 모인 사람들이 작품을 만져보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묘사한다. 독일어로 '놀라운 방'을 의미하는 분더캄머는 16세기 유럽에서 귀족과 상류층 사이에서 유행한 일종의 개인 박물관으로 '호기심의 방'이라고도 불렸다.

작품 속 사람들은 직접 물건을 꺼내 보거나 서로 건네주고 있는데, 마치 벼룩시장에서 골동품을 찾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이 장면은 수집품을 멀리서 바라보며 감상하던 과거의 분더캄머와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다른 나라로부터 약탈해 온 유물도 전시되었을 역사 속 분더캄머는 밀스타인의 작품 속에서 서로 나누고 돌려주는 화합의 장으로 그려졌다.
 

책거리 X 일리야 밀스타인 /김서진 기자

<책거리>는 책을 비롯한 꽃, 기물 등을 그린 우리나라 전통 정물화의 하나인 '책거리'의 구조와 미학을 작가의 대표적인 자품 <티레니아해 옆 서재>에 접목한 특별 섹션이다. 일리야 밀스타인 본인의 자발적인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기획된 이 공간에서 지금까지 공개된 적 없는 작가의 오리지널 드로잉을 서재 풍경의 일부분으로 만날 수 있다.
 

책거리 X 일리야 밀스타인의 드로잉 /김서진 기자

'겨울 구름', '지상낙원', '수확', '고통과 불행', '웃음'등 한글 제목의 책과 밀키스 캔에 꽂아둔 민들레 한 송이 등 작가 특유의 섬세한 묘사가 잘 드러난다. 또한 매화, 모란, 한국 전통 서랍장이 비너스 조각 및 지중해 티레니아 바다가 보이는 창밖 풍경과 만나 이루어내는 동서양의 만남은 묘하게 조화롭다. 관람자는 서재 가운데 놓인 책상 의자에 앉아 스스로 <티레니아해 옆 서재>의 주인공이 되어 볼 수 있으며 이로 하여금 단순히 작품을 관람하는 게 아닌 체험을 통해 밀스타인의 예술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 
 

<1983년 여름, 소호의 저녁> 전경 /김서진 기자

세 번째 캐비닛 <1983년 여름, 소호의 저녁>은 앞서 다뤄진 작품들에 비해 공동의 장소, 군중, 번화가 등 더 큰 외부 세계를 배경으로 그린 작품으로 구성되었다. 특히 일리야 밀스타인을 세상에 알리는 데 큰 계기가 되었던 더 뉴욕타임즈와 협업한 시리즈 작품이 대표적이다. 소호, 트라이베카, 할렘, 이스트빌리지 등 뉴욕 맨해튼의 주요 구역에 거주했던 실제 인물이 경험한 과거의 기억들을 참고해 그린 이 시리즈에서는 1980년대의 앤디 워홀도 숨어 있다. 또한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거리 풍경을 작가 특유의 예리하고 위트있는 통찰력으로 표현했다.
 

(左)<1983년 여름, 어퍼이스트사이드의 오후>, (右)<1983년 여름, 이스트빌리지의 늦은 밤> /김서진 기자

1980년대 뉴욕의 모습을 상상한 작품들은 더 뉴욕타임즈 스타일매거진의 커미션으로 제작되었다. 각각의 작품은 1983년의 여름으로 구체화된 어퍼이스트사이드, 이스트빌리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작품에 등장하는 음식점과 상점들은 실제 존재했던 장소이며 몇몇 유명인사들이 함께 표현되어 각 지역의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

<1983년 여름, 어퍼이스트사이드의 오후>는 상류층이 거주하는 지역이라는 특징을 여유로운 낮 시간, 울창한 나무 사이 고급 레스토랑과 명품 브랜드 상점, 다른 작품들과 달리 쓰레기 하나 없는 깔끔한 거리와 나비들로 채우고 있다.

또한 <1983년 여름, 이스트빌리지의 늦은 밤>은 펑크 록 음악과 드래그쇼, 그래피티아트 등 뉴욕 반문화의 중심지였던 이스트빌리지를 밤부터 새벽까지 이어지는 장면으로 묘사한다. 키스 해링을 비롯한 다양한 예술가, 음악가들이 모이는 장소였던 '클럽 57'간판과 전단지 등이 그려져 있는데 밀스타인은 섬세한 표현들을 통해 이스트빌리지 예술가들의 열정을 담았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 /김서진 기자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은 오페라 「위그노 교도들」의 기념비적인 재상연 소식을 알리는 기사에 실린 작품이다. '위그노'는 16-17세기 종교개혁 시기에 프랑스에서 확산된 개신교 신자를 일컫는 말이며 오페라는 두 교파의 대립이 빚어낸 비극적인 사랑과 대학살 사건을 다룬다. 본작의 제목인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은 종교개혁 당시 위그노가 학살당한 실제 사건이 일어난 날이자 오페라에서 마지막 사투가 벌어지는 날이다.

밀스타인은 검은색과 붉은색의 복장의 대비로 위그노와 가톨릭 교도들의 혈투를 묘사했는데 1836년에 초연한 오페라의 시대적 배경이 아닌 다소 현대적인 의복으로 표현했다. 이는 20세기 중반 자취를 감춘 뒤 2018년 재상연하는 소식을 알리는 기사의 내용을 기발하고 감각적으로 전달하기도 하며 종교뿐만 아니라 현대사회의 다양한 면에서 존재하는 극단적 대립도 연상시킨다.
 

<에르퀼 푸아로의 세계> /김서진 기자

<에르퀼 푸아로의 세계>는 애거사 크리스티 리미티드와 로렌스 킹 출판사의 커미션을 받아 그린 작품이다. 에르퀼 푸아로는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시리즈 중 총 33권에 등장하는 탐정 캐릭터다. 밀스타인은 4시 13분에 멈춘 시계들과 장난감으로 표현된 기차, 소설 속 배경으로 등장하는 장소들의 디오라마 등 모든 33권 시리즈에 등장하는 100개가 넘는 요소를 포함시켰다.

작품 중앙에 서서 라벤더 슈트에 뒷짐을 지고 특유의 콧수염과 머리 스타일을 하고 있는 인물이 에르퀼 푸아로이며 모든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관람자를 바라보고 있다. 사건에 휘말린 모든 이들이 한곳에 모아 사건을 진상을 밝히는 탐정인 만큼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탐정의 특징적인 면이 돋보인다.
 

<캐비닛 속 분실된 초상화> 전경 /김서진 기자

네 번째 캐비닛 <캐비닛 속 분실된 초상화>에서는 인물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작가의 신작들을 발견할 수 있다. 특정 인물이 그려지지 않음으로써 작품 속 장소는 감상자의 더 많은 상상과 이입을 유도하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순수한 풍경을 오롯이 사색하게 한다.

자연, 동물, 공간 묘사만 있는 이 마지막 캐비닛의 작품들을 통해 흔히 공간을 부수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인간중심적 사고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쉼표와 여백에서 새로운 시점과 흥미로운 발견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전 캐비닛을 통해 내부에서 외부로 점차 시끌벅적한 세상까지 다다랐다면 이 마지막 캐비닛에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초월한 새로운 관점과 작가의 다음 행선지를 고요히 상상할 수 있길 바란다.
 

<라따뚜이> /김서진 기자

<라따뚜이>는 픽사에서 2007년 개봉한 동명의 영화를 모티브로 제작한 작품이다. 밀스타인은 영화 라따뚜이에서 인간 링귀니가 쥐 레미에게 식당을 열어주며 간판을 달아주고 레미의 가족이 그의 다름을 포용해 주며 식당일을 돕는 장면 등 영화의 후반부를 묘사했다.

작품 정중앙에는 영화 속 콧대 높은 비평가 '안톤 이고'가 극찬한 요리 라따뚜이를 완성하고 있다. 레미는 작품의 오른쪽 끝 문틀 위에 서서 헤드셰프를 상징하는 긴 모자를 쓰고 다른 요리사들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다. 유치한 만화영화일 것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었던 작가는 첫 장면을 본 후 매료되어 대개 어린이를 타깃으로 하는 애니메이션이 아름다울 수 있고 큰 감동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회상한다.
 

<잃어버린 여름> /김서진 기자

<잃어버린 여름>은 더 뉴욕타임즈의 짧은 뉴스레터 「'개학'은 이제 무엇을 의미할까?」에 실린 작품이다. 2020년 코로나19가 전세계로 확산된 2020년 많은 학교들이 폐쇄되었고 학생들은 새 학기를 집안에서 맞이하게 되었다. 작품 속 줄지어 세워진 스쿨버스 위로 낙엽이 덮여 있는 장면은 버스가 여름 내 줄곧 그 자리에 있었음을 보여주고 이후로도 한동안 운행되지 못하는 쓸쓸한 상황을 반영한다. 사람들이 사라진 본작에는 버스를 보금자리로 삼은 빨간 새 가족만이 등장하는데, 아기새가 자라고 있는 새 둥지의 모습은 아이들이 학교 대신 가정에서 일상을 보내게 될 모습을 빗대고 있다.

일리야 밀스타인이라는 작가의 사회적인 목소리가 반영된 초기 작품을 이번 전시에서도 감상할 수 있다. 당장 저번 주, 한 연예인의 추모문에서 언급되었던 작품이기도 하다. 미술 역사에서 남성 대가들에 의해 경시된 여성 모델의 복수를 그린 <뮤즈의 복수>가 그러하다. 
 

<뮤즈의 복수> /김서진 기자

중앙의 여성은 자신의 몸을 이용해 이득을 취한 남성을 금방이라도 창문 밖으로 던져버릴 듯한 기세다. 방 안에는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벌거벗은 여성들의 대형 컨버스가 가득하고, 남성은 작품과 물감 사이에 부서진 채 누워 있다. 남성은 피를 흘리지도 않고 총상 자국도 없으며 여성의 주변엔 화약의 흔적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바닥에 의식을 잃은 채 쓰러져 있다. 얼핏 그림만 보면 여자의 존재감이 남자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며, 그의 시선을 사로잡는 뮤즈의 영향력이 이 정도라는 걸 과시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 그림에는 숨겨진 의미가 있다. 

이 작품은 여성의 몸을 자신의 명성을 쌓는 디딤돌로 삼은 수많은 남성 예술가들을 생각나게 한다. 밀스타인의 작품의 뮤즈는 다른 누드화와 달리 남성의 시선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 뮤즈는 얼굴도 이름도 없기 때문에 남성의 시선이 닿을 수 없는 존재다. 그림 속 남성 화가와, 그려진 누드의 여성들만이 관객이 볼 수 있는 얼굴과 표정을 갖고 있다. 즉 이 여성은 상품으로, 남성의 시선으로 소비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뮤즈의 복수>는 젠더평등에 관한 유엔의 지속가능발전목표(SDG)를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은 그림 속 여성의 모습과, 실제 예술을 창작하는 여성 예술가 사이의 간극을 보여준다. 그림의 피사체는 여성이 많지만 막상 그림을 그리는 과정과 예술가로서의 여성의 노력은 무시되는 경우가 많다. 2017년 아트넷 애널리틱스와 마스트리히트대학교가 실시한 연구에 따르면 유럽과 북미 갤러리에서 활동하는, 생존해 있는 작가들 중 여성은 불과 13.7%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부조리한 현실 속 여성 예술가들은 여전히 여성혐오와 차별에 맞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뮤즈의 복수>는 여전히 여성의 벗은 몸을 예술의 도구로만 쓰는 남성중심 예술계를 비판한 작품이다. 
 

<크리스마스> /김서진 기자

문제의 추모문에서는 '한순간 돌아선 대중의 사랑에 대한 배신감과 그들의 관음증에 대한 응징'이란 말과 함께 이 작품을 게재했다. <뮤즈의 복수>를 마치 죄 없는 예술가를 대중이 마녀사냥하고 돌을 던져 죽인 것처럼 해석해 올린 것이라면 명백한 착오이며 어쩌면 철저히 얕은 오만이다. 하등 상관없는 일에 엄연한 차별을 하루에도 몇 번씩 마주해야 하는 여성 예술가를 표현한 작품을 빗대는 건 여성들이 그 정도로 우스워 보이는 것인가.

자기연민에 둘러싸여 감정을 여과없이 발산하는 것에 빠져 작가의 의도조차 파악하지 못한 작품을 갖다붙이는 건 오히려 작가와 작품을 훼손시킬 뿐이다. 남의 작품을 내 사견에 인용할 때엔 적어도 그 작품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부터 정확히 파악해야 하는 게 순서 아니겠는가. 지금도 이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일리야 밀스타인 : 기억의 캐비닛》 전시가 마이아트뮤지엄에서 3월 3일까지 진행 중이다. 특히 이 <뮤즈의 복수>를 직접 볼 수 있는 전시이며 도슨트도 준비되어 있어 친절한 설명도 들을 수 있을 테니 좋은 기회일 것이다.
 

2017년 내내 뜨거운 감자였던 전안법은 현실과 다른 불합리함으로 수공예 작가들의 목을 죄어오는 올가미 같았습니다. 극적으로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많은 작가들이 한숨 돌릴 수 있게 됐지만 아직 바뀌어야 할 부분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핸드메이커는 이러한 불합리에 ‘NO’를 외치기 위해 시작됐습니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은 정말 매력적인 일입니다. 그들은 실을 꿰 엮기도, 펜과 물감 으로 그리기도, 흙을 빚어내기도, 금속을 녹여 두드리기도, 정성스런 요리를 만들어 내기도 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만들고 있는 세상을 함께 들여다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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