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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스케치] 영조와 정조, 글과 그림으로 이룬 탕평한 세상, 전시 《탕탕평평蕩蕩平平-글과 그림의 힘》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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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스케치] 영조와 정조, 글과 그림으로 이룬 탕평한 세상, 전시 《탕탕평평蕩蕩平平-글과 그림의 힘》 개최
  • 윤미지 기자
  • 승인 2023.12.11 09: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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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개막 기념, 12월 8일부터 12월 17일까지 무료 관람
전시 《탕탕평평蕩蕩平平-글과 그림의 힘》 포스터 /국립중앙박물관

[핸드메이커 윤미지 기자] 조선의 제21대·22대 왕인 영조와 정조를 생각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바로 ‘탕평’이다. 탕평은 싸움이나 논쟁 따위에서 어느 쪽으로도 치우지지 않음을 의미하는데 조선의 두 왕은 왕권을 강화하고 붕당 정치의 폐해를 줄이며 인재를 폭 넓게 등용하기 위해 탕평 정치를 펼쳤다.

전시 《탕탕평평蕩蕩平平-글과 그림의 힘》은 영조 즉위 300주년 기념 특별전으로 영조와 정조가 탕평을 이루기 위해 ‘글과 그림’으로 소통하고 노력한 모습을 조명하는 전시다.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특별전시실에서 관람 가능하며 전시 기간은 2023년 12월 8일부터 2024년 3월 10일까지다.

전시 개최에 앞서 지난 7일 언론사 및 관계자들이 모인 언론공개회가 진행됐다. 언론공개회에는 윤성용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참석해 인사말을 전했으며, 이어 이수경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의 전시 설명과 도슨트가 진행됐다.
 

인삿말 하는 윤성용 국립중앙박물관장의 모습 /윤미지 기자
/윤미지 기자

이번 전시에 대해 윤성용 관장은 “영조와 정조의 재위 기간인 18세기를 문예 부흥의 시기라고 할 만큼 많은 글과 그림이 남아 있다”라며 “결국 두 왕이 추구했던 것은 글과 그림의 힘을 통해 많은 인재들과 또는 백성들과 소통하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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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오늘 전시되어 있는 작품 각각의 사연과 이야기들을 관람하며 탕평의 의미를 생각해주시기를 바란다”라고 덧붙였다.

왕, 글과 그림으로 전하다

처음 전시관에 들어서면 글이 많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수경 학예연구관은 전시의 주제인 글의 힘을 관람객에게 선보이기 위해서 이런 구성을 택했다고 설명했다. 전시 시작에서 만나볼 수 있는 해당 책들은 각각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윤미지 기자

해당 공간에는 반란의 근본적 원인이 붕당에 있음을 알리는 <감란록>, 왕위 계승의 정당함을 알리는 <어제대훈>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는 나라에 벌어진 사건들에 대한 영조의 목소리를 담은 책들이다. 현대에 맞게 설명하면, 국가에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 때 내는 일종의 해명 자료인 셈이다. 이 학예연구관은 “이전에는 없었던 백성들을 생각하는 영조의 마음, 대중과의 교감과 소통을 하기 위해 노력했던 왕의 새로운 태도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감란록> /윤미지 기자
<어제대훈> /윤미지 기자

눈에 띄는 것은 이러한 책을 언해본으로 만들어 내기도 했다는 점이다. 책 <천의소감>은 경종 독살설이 더 확산되면서 소론 500명을 죽였던 사건 ‘을해옥사’를 정당화하는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전시되어 있는 책은 이를 한글로 풀어 쓴 책 <천의소감 언해>다. 영조는 이 책을 적극적으로 보급했으며, 스스로의 정치 이념을 백성에게 알리기 위해 글로써 노력했다는 점이 엿보인다.
 

<천의소감 언해> /윤미지 기자

글로써 자신의 상황을 설명한 것은 정조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조는 즉위하자 마자 과거 자신의 대리청정을 반대했던 홍인한, 정후겸 등을 사사했다. 이에 대한 명분을 전하기 위해 경위를 기록한 역사서 <명의록>을 내기도 했다.

영조가 사도세자의 성균관 입학을 기념하여 세운 <탕평비>의 탑본도 전시에서 만나볼 수 있다. 탑본은 비석이나 기와 등에 새겨진 글씨나 무늬를 종이에 그대로 떠낸 것을 의미한다. <탕평비 탑본>에는 영조의 탕평의 의지가 담겨 있으며 전시에서는 비석의 앞부분과 뒷부분의 탑본을 공개한다.

해당 글을 살펴보면 의외로 탕평이라는 글자는 찾아볼 수 없다. 대신 탕평에 대한 중요한 뜻이 새겨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치우침이 없고 무리 지음이 없으면 왕도가 탕탕하고, 무리 지음이 없고 치우침이 없으면 왕도가 평평하다’는 글이다.
 

<탕평비 탑본> /윤미지 기자

그렇다면 영조가 탕평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답은 ‘애민’에 있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이 싸우지 않고 합의해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만들고 싶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준천’과 ‘균역법’이다.

준천은 도성의 하천을 정비한 것이다. 작품 <준천첩>은 백성을 위한 준천 공사를 왕이 지켜보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수문 위에 왕의 자리가 있고 청계천 바닥의 흙을 걷어내는 준천 작업 현장을 담은 것으로, 영조는 준천 사업을 마친 뒤 이를 화첩으로 제작했다고 한다.
 

<준천첩> /윤미지 기자

백성을 생각하는 영조의 마음을 담은 작품은 또 있다. 영묘어필첩에 수록된 <바위 그림>에도 그의 백성 사랑이 드러난다. 그림 속 각각의 바위 위에는 글이 기록되어 있다. 오른쪽은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한쪽으로 치우쳐 백성을 돌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왼쪽은 백성이 미미해 보이더라도 항상 두려워하며 그들의 어려움을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노년의 영조가 그린 것이라고 한다.
 

<바위 그림> /윤미지 기자

영조가 탕평을 따르지 않는 노론의 대신들을 길가를 돌아다니는 삽살개에 비유한 글도 만나볼 수 있다. 이러한 메시지는 작품 <삽살개>에 기록되어 있다. 해당 작품은 영조가 아끼는 화원 화가 김두량이 그렸으며, 그림의 위에 영조의 글이 기록되어 있다.
 

<삽살개> /윤미지 기자

작품 <삽살개>는 이번 전시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작품이다. 먼저 다듬어진 글씨체가 아닌 영조의 서체를 그대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이외에도 해당 작품은 그간 책으로만 소개되어 왔으나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되어 더욱 높은 관심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인재를 등용해 탕평을 이루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세력이 필요하다. 탕평을 이루기 위해서도 고루 인재를 등용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영조와 정조는 이에도 글과 그림을 활용했다. 이어지는 공간에서는 이에 대한 작품들을 전시한다.

과거 인사행정에 왕이 참여하는 것을 친림 도목정사라고 하여 이를 줄여 ‘친정’이라 불렀다. 본래 친정은 왕이 공정한 인사행정을 당부하는 의미해서 시행되었다고 한다. 친정도는 이러한 모습을 그린 것으로, 인사행정에 참여한 관원들이 주요한 인물들로 여겨져 크게 그려지고, 직접적으로 참여한 것은 아닌 왕의 자리는 서쪽에서 동쪽을 보도록 그려졌다. 본래 왕은 북쪽에 앉아 남쪽을 바라보는 것이 법도였으나 영조 이전까지는 친정도에서는 서쪽에서 동쪽을 보도록 그려진 것이다.
 

<무신친정계도>, 왕의 자리가 서쪽에서 동쪽을 보도록 그려져 있다 /윤미지 기자

하지만 영조는 탕평책에 따른 인재 등용을 강조했기 때문에 이에 주도적으로 나섰다. 친정도의 모습도 변화했다. 영조가 인사 행정을 장악하게 되면서 친정도 속의 왕의 위치에도 변화가 생겼다. 법도대로 북쪽에 앉아 남쪽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정조대에 이르면서 인사 행정이 온전히 왕에게 넘어간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작품 <을사친정계병>에서도 드러난다. 이 친정도에서는 규장각 관원들의 위상이 변한 것도 내포하고 있다. 정조는 자신을 지지해 줄 세력을 키우기 위해 규장각 신하들에게 더 중요한 임무를 맡겼다. 그림 속에서 왕을 중심으로 신하들이 수직적으로 늘어선 모습을 볼 수 있으며, 규장각 관원들이 내시와 사관 다음으로 어좌 가까이에 자리한 것을 알 수 있다.
 

<을사친정계병> /윤미지 기자
<을사친정계병>, 왕의 자리가 법도대로 북쪽에 앉아 남쪽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윤미지 기자

영조는 위기의 순간 도움을 준 공신들을 수십 년이 지나도 잊지 않겠다는 마음을 초상화에 담기도 했다. 영조를 보좌하며 왕이 이루고자 했던 모든 것을 해결했던 인물인 박문수의 초상화 <박문수 분무공신 전신상>도 이번 전시에서 만나볼 수 있다. 이 그림은 당대 최고 초상화가인 진재해가 직접 그를 보며 밑그림을 그렸다고 알려져 있다.

1750년 다시 제작된 박문수의 초상도 전시되어 있다. 이는 박문수의 건의로 다시 제작된 것으로 반신상으로 그려졌다. 이는 충훈부에 보관하기 위해서 다시 그려졌으며, 38세의 초상에 비해 60세의 초상에서는 수염이 희어지고 주름이 깊어진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 학예연구관에 따르면 이 두 작품이 같이 전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전시 현장에는 해당 작품들과 함께 22년의 얼굴 변화를 관찰할 수 있는 영상도 마련되어 있다.
 

박문수의 초상화 /윤미지 기자
1750년 다시 제작된 박문수의 초상 /윤미지 기자

이처럼 두 왕의 정치에서 초상화는 큰 부분을 차지한다. 왕은 초상화를 통해 ‘당신의 공을 잊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명신이나 충신들의 초상화 내에 임금의 글이 덧붙여지면 초상화의 가치가 더 높아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70세 이상 고위직 관리의 모임인 기로소에 들어가는 관리 강세황을 위해 정조는 초상화를 내리기도 했으며, 강세황이 죽은 후 2년 뒤에는 그의 재능을 아끼는 마음을 담아 글을 지어 내렸다고 한다. 해당 글은 초상화에 적혀 있다.
 

강세황 초상 /윤미지 기자
강세황 초상 , 정조의 글이 기록되어 있다 /윤미지 기자

정조는 신하들에게 시를 써서 내려 주기도 했다. 이를 통해 신하들과 관계를 돈독하게 유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시에서는 정조가 정민시에게 써서 하사한 서예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정조는 정민시에 대해 ‘정성을 다해 죽기로 맹세하여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았다’고 평가하기도 했었는데, 해당 작품은 그가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할 때 정조가 시를 짓고, 손수 쓴 서예 작품이다.
 

<신제학정민시출안호남> /윤미지 기자

정조가 말년에 쓴 서예 대표작도 전시되어 있다. 이는 정조가 자신의 외숙 홍낙윤에게 전한 시로, 외숙의 별장인 ‘문상정사’라는 곳에 대해 읊은 시다. 중국제 고급 종이에 쓴 시로 과감 없는 필치가 특징이다.
 

<증철옹부백부임지행>과 <제문상정사> /윤미지 기자

글과 그림으로 왕위 계승 정통성을 강조하다

영조와 정조는 왕위 계승의 전통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도 글과 그림의 힘을 활용했다. 영조는 경종 독살설에 시달린 바 있으며, 정조는 세손 시설 죄인 사도세자 아들은 왕이 될 수 없다는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영조와 정조는 부족한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해 ‘효’와 ‘예’를 내세워 정당한 왕위 계승자임을 강조한다.

영조는 이를 위해 ‘삼종혈맥’을 내세운다. 삼종혈맥은 효종으로 시작해서 현종·숙종까지 이어지는 왕위 계승을 내세우며 자신이 정당한 계승자임을 주장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선왕의 업적을 따르는 ‘효’를 보이는데, 숙종이 기로소에 입사했던 것과 같이 영조도 기로소에 입사하기로 한다.
 

<어첩을 봉안하는 행렬> /윤미지 기자

하지만 영조의 나이는 당시 51세에 불과했다. 70세 이상이 들어갈 수 있는 기로소 입사에 당연히 신하들은 반발했으나, 영조는 40대의 초상화를 꺼내 보이고 자신의 모습과 비교하며 자신이 나이가 들었고, 몸이 아파 언제 죽을 지 모르니 기로소에 바로 들어가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먼저 전시에서 만나볼 수 있는 작품 중 <어첩을 봉안하는 행렬>이라는 그림은 숙종 때에 그가 기로소에 입사하는 것을 기념한 행사를 그린 그림이다. 숙종의 존호가 적혀 있는 어첩을 영수각에 봉안하러 가는 행렬을 그렸다. 또 다른 작품 <영수각에서 거행한 영조의 기로소 입사>는 기로소 입사에 성공한 영조가 이 어첩에 휘호를 남기며 정당한 계승자임을 보이고, 숙종을 따라 이를 그림으로 남긴 것이다.
 

<영수각에서 거행한 영조의 기로소 입사> /윤미지 기자

정조 역시 ‘효’에 따라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권위를 세우고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정조는 대리청정을 하게 된 후 영조에게 승정원 일기에서 자신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에 관련된 기록을 지워달라는 요청을 한다. 영조는 이 뜻을 받아들여 그 기록을 물에 씻어 버리고, 아울러 ‘효손’이라고 직접 쓴 글씨를 새겨 만든 인장을 내렸다. 영조의 어필이 새겨진 도장 <효손 은인>은 왕의 친필이 새겨져 있는 도장으로 이번 전시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효손 은인> /윤미지 기자

정조에게 있어서 이 인장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졌는지, 이 시대에 남은 그림에서 알 수 있다. 작품 <진하도>에서도 이 인장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정조는 이 인장을 통해 자신이 왕위 계승을 인정 받은 사람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명분을 얻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인장을 행차할 때나 거동할 때 꼭 들고 다녔다.

작품 <진하도>는 정순황후, 장헌세자(사도세자), 혜빈(혜경궁)에게 존귀한 칭호인 존호를 올리는 의식을 마치고, 신하들이 이를 축하하는 ‘진하례’ 행사를 그린 그림이다. 8폭 병풍 제3폭에서 ‘효손 은인’을 보관한 함이 임금의 자리 앞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하도> /윤미지 기자

또 정조는 자신의 왕위 계승에 있어 정당성을 찾기 위해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정조는 이 역시 글로써 해답을 찾는다. 1776년 왕위에 오른 정조는 즉위한 3월에 자신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공표했다. 그러나 동시에 영조에 의해서 효장세자의 후사가 된 점도 분명히 기록했다. 기존의 질서를 중요시 해 영조의 뜻을 받들면서도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높이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정조가 즉위날 내린 윤음 /윤미지 기자

정조는 20년 간 좋은 글귀의 시호와 존호로 사도세자의 덕을 칭송했으며, 이를 반대하는 세력을 설득하며 사도세자의 복권을 위해 노력했다.

질서와 화합

이 학예연구관에 따르면 “정조는 누구의 죽음에도 이르지 않고 진정한 문치를 통해 정치권 통합을 이뤘다”고 설명한다.

정조는 이후 바로 화성으로 출발했다. 전시의 마지막 공간에서는 정조가 1795년 화성에서 개최한 기념비적 행사를 글과 그림으로 남긴 <화성원행도>를 감상할 수 있다.

원작을 보기 전에는 먼저 이를 영상으로 상세히 소개하는 공간을 만나게 된다. 작품의 내용을 천천히 살펴보길 원하는 관람객은 해당 장소에서 상영되는 영상을 통해 작품에 대해 먼저 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화성원행도>를 영상으로 만나볼 수도 있다 /윤미지 기자

<화성원행도>는 질서와 화합이라는 정조의 이상이 담긴 그림이다. 왕을 중심으로 신하들이 질서를 이루고, 백성은 편안하게 화합을 이루는 모습을 강조하고 있다. 또 해당 공간에서는 화성으로 원행을 갈 때 만든 <반차도>도 함께 만나볼 수 있다. 이 반차도에는 거의 6400면의 사람들이 각각의 역할을 하고 있는 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데, 질서를 중시했던 정조의 성품이 반영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화성원행도> /윤미지 기자
<반차도> /윤미지 기자

시대의 눈으로 그림을 바라보다

탕평 정치는 정조의 사망 이후로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게 된다. 일각에서는 이에 대해 왕을 중심으로 된 운영 체계가 공고해지다 보니 어린 순조가 등극했을 때 탕평을 이어갈 수 없었다는 의견도 있다.

이 학예연구관은 “어떤 분들은 정조가 독단적이었기 때문에 탕평을 이어갈 수 없었다고 비난하기도 하지만, 사실 왕은 왕 답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라며 “그 시대의 눈을 통해 그림을 감상해 보신다면 왕이 자리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노력했는지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고 전했다.

2017년 내내 뜨거운 감자였던 전안법은 현실과 다른 불합리함으로 수공예 작가들의 목을 죄어오는 올가미 같았습니다. 극적으로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많은 작가들이 한숨 돌릴 수 있게 됐지만 아직 바뀌어야 할 부분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핸드메이커는 이러한 불합리에 ‘NO’를 외치기 위해 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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