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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엔 ‘독립서점’이, 조선시대엔 ‘책쾌’가… 조선시대 책 중개상 ‘책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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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엔 ‘독립서점’이, 조선시대엔 ‘책쾌’가… 조선시대 책 중개상 ‘책쾌’ 
  • 윤미지 기자
  • 승인 2023.10.23 17: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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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자쿨레 판화 '책 읽는 양반' 국립민속박물관
폴 자쿨레의 판화 '책 읽는 양반' /국립민속박물관

[핸드메이커 윤미지 기자] 독서의 계절 가을이 왔다. 독서율 감소세가 지속되고 있다고 하지만 젊은 층을 중심으로 ‘북톡(Booktok) 챌린지’ 등이 유행하는 등 종이책에 대한 관심도 다시금 늘어나는 추세다. 

종이책을 구매할 수 있는 대형서점을 이용하는 이들도 많으나 최근 책을 구매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 활발하게 떠오르고 있는 카테고리는 독립서점이다. 독립서점은 책방지기의 큐레이션에 따라서 새로운 분야의 책을 접할 수도 있고, 일반 서점에서 쉽게 만나기 어려운 귀한 서적을 추천받게 될 가능성이 커 인기다. 

놀라운 점은 조선시대에 책을 판매하는 중개상인 ‘책쾌’가 이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독립서점의 역할을 했던 서적 중개상인 책쾌는 정확히 어떤 모습이었을까. 

‘책’을 구하기 어려웠던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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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는 독서를 할 수 있는 방법이 많다.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PC, 전자책 리더기 등을 통해 어디서나 쉽게 독서가 가능하고 종이책을 구매하기 위한 서점도 곳곳에 운영되고 있다. 이와 반대로 조선시대에는 책을 쉽게 접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흔히 사극에서 책을 읽는 선비나 여인의 모습이 흔히 등장하나, 이는 대부분 상류층 양반에게 가능한 일이었다고 한다. 
 

책가도 병풍 국립고궁박물관
책가도 병풍,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던 서책이 그려져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먼저 조선시대에는 서점이 없었다. 현대에는 지식의 보고와도 같은 서점의 존재가 당연했지만 당시에는 그러지 못했는데 이는 출판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책을 만들어 파는 일이 허락되지 않은 이유는 다양하다. 

그 당시 책은 국가에서 만들어 유통하는 물건이었다. 당시 국가에서 서적을 발행하는 것은 비영리 목적으로 이뤄졌다고 한다. 정확한 가격이 책정되지 않았다는 의미인데, 그럼에도 책이 발행되면 이는 고가에 해당했다. 강명관 저자의 책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에서도 이러한 내용이 등장한다. 『중종실록』에 따르면 조선 전기의 문신 어득강은 궁핍한 사람은 책값이 없어 책을 사지 못하고, 혹 값을 마련할 수 있다 해도 「대학」이나 「중용」 같은 책은 ‘상면포 3~4필’은 주어야 살 수 있다고 한다. 이를 쌀로 환산하면 21말~28말의 가격에 해당한다고 하니 상당히 고가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중종실록 권104-105 /국립고궁박물관

책에서는 이외에도 조선시대 책이 고가에 해당했으며 값을 치르고도 구하기 어려운 서적도 있었다는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 상황이 이러하니 책을 구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것은 물론 서점을 민간에서 운영한다고 하더라도 일반 백성들의 실 구매로 이어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조선시대 책이 자유롭게 유통될 수 없었던 또 다른 근본적인 이유도 있다. 과거 지식은 양반 사대부의 전유물이었다. 상류 지배층은 일반 백성들이 똑같이 지식을 얻고 똑똑해지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다수의 전문가들은 과거 상류층 대부분이 백성에게 서적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의지가 없었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한다. 앞서 언급한 인물인 어득강은 중종 때 두 번이나 서점 설립을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쫓겨나기도 했다.
 

책가도 6곡병. 조선시대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던 서책과 다양한 소품이 그려진 책가도 /국립중앙박물관

여기에는 상업을 천하게 여긴 당시의 사회적 배경도 영향을 미친다. 김양미 작가의 책 『안녕, 나는 책이야』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등장한다. 조선시대에는 상업을 천하게 여겼으며 이에 의해 국가에서 제작한 책이 매매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고 한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 책을 구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었을까. 기록에 따르면 때로는 책을 구하기 위해 개인간 책값이 아닌 쌀, 콩 등의 곡물 등 물물교환이 이뤄지기도 했다고 한다. 이외에 정식으로 책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은 국가에서 운영하는 ‘교서관’을 이용하는 것 뿐이었다. 

교서관은 책을 만들고 관리하는 기관으로 경서의 인쇄나 교정, 제사에 쓰는 향이나 축문, 인전 등을 보관했으며 조선 태조 1년에 만들어졌다. 교서관은 좋은 책을 보급하기 위한 목적으로 운영 됐기 때문에 책을 매매하는 방식은 아니었다. 또한 한문책을 한글로 번역해 여러 권을 찍어 보급했다고 하나, 이는 상당히 소량에 해당했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1470년 한명회가 승정원 교서관에서 책을 팔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 역시 정확히 서점의 형태는 아닌 것으로 알려진다.   

이외에 조선시대에 금속 활자를 만들고 인쇄를 담당했던 기관인 주자소에서 만든 책을 보급하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 책 장수 ‘책쾌’ 

책을 구하기 어려운 환경이지만 민간에서 책을 매매했다는 기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 성종 때 문신이자 시인이었던 김흔의 시 <옥하관우음玉河館偶吟(옥하관에서 우연히 읊다)>에는 마지막에 ‘時時還有賣書人(시시환유매서인)’ 문단이 등장한다. 이는 ‘때때로 책 파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의미다. 

현대에서는 책을 사러 서점에 가는데, 이 시에서는 책 파는 사람이 찾아온다는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실제로 조선시대에는 돌아다니며 책을 판매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책쾌’라고 불리는 서적 중개인을 말한다. 

‘책쾌’는 16세기 무렵에 처음 등장했다. ‘쾌’는 중개인, 상인, 거간꾼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즉 책을 중개하는 상인인 책쾌는 책을 구매하고자 하는 고객에게 직접 서적을 팔고 다녔던 이들이다. 주로 책을 싸 들고 전국을 누비며 돌아다녔고 상류층 양반들이 책쾌의 고객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학자인 유희춘이 쓴 『미암일기』에도 이 책쾌가 등장한다. 책에서는 양반집에 책을 매매하는 일을 했던 책쾌 송희정, 박의석 등의 기록이 나온다. 
 

전남담양 고문서 미암일기 5책 국립중앙박물관.jpg
전남담양 고문서 미암일기 5책 /국립중앙박물관

여러 문헌에 따르면 책쾌를 단순한 책 장수라고 볼 수만은 없다.  먼저 당시 민간 서점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책은 굉장히 귀한 물건이었고 이를 직접 유통한다는 점에서 일반 상인과는 차이점이 있었다. 특히 책에 대한 지식이 방대해야만 책쾌로서 이름을 날릴 수 있었다. 다양한 책을 알고 있어야만 책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추천해 줄 수 있었고, 판매를 위해 고서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책이 가진 가치를 알아야만 했기 때문에 이에 따른 지식도 갖춰야 했다. 

이외에도 책쾌는 고객이 필요하다고 요청하는 책을 구해다 주기도 할 만큼 정보력 또한 높았다고 한다. 조선시대 학자이자 장서가로 이름을 알린 유만주의 기록에 따르면 책쾌는 유만주가 원하는 책에 대해 물었을 때 정보를 바로 알려줄 만큼 조선 땅 내에 책 정보를 훤히 알고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활동한 책쾌가 그 당시 책 전문가였다는 사실은 다양한 사례에서 알 수 있다. 그들은 이동식 서점으로서 책을 유통하는 일 외에도 책을 필사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조선 후기에 활동한 학자인 유재건이 쓴 책 『이향견문록』에는 홍윤수라는 서쾌가 책을 필사하거나 팔아서 생계를 이어갔다는 내용도 나온다. 서쾌는 책쾌를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이다. 

또 책쾌는 책의 저자, 내용, 출판 연월일 등을 의미하는 해제를 달기도 했다고 하니 이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가능한 일들이었다. 때로는 직접 목판을 찍어 '방각본'을 만들기도 했다고 하는데 이는 현대의 독립출판사를 떠올리게 한다. 책 유통과 생산을 모두 책임지기도 했다는 것이다. 
 

홍길동전 방각본, 김해한글박물관
'홍길동전' 방각본 /김해한글박물관
홍길동전 방각본, 김해한글박물관
'홍길동전' 방각본 /김해한글박물관

조선시대 가장 유명한 책쾌는 ‘조신선’이라 하는 이다. 그는 조선시대 유학자이자 실학자인 정약용의 책 『조신선전』에도 등장하는 인물로, 시인 조수삼의 『죽서소생전』, 학자인 유재건의 『이향견문록』 등 다양한 문헌에서 언급될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의 개인적인 정보 등이 문헌에 남아 있진 않으나 조신선은 그 당시 책에 대해서는 능통한 전문가였다. 당대 문인들이 모두 조신선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는 천하의 책이 모두 자신의 책이며 책을 아는 이는 오직 자신 밖에 없다고 말하고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신선이 꼽히지만 영조 때 상당히 많은 책쾌들이 활동했다. 이들은 오래된 고서 외에도 금서나 불온서적을 유통시키기도 했는데, 그중 한 책이 유통되면서 많은 책쾌들이 체포되어 처형 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바로 조선시대 후기에 대표적인 금서로 여겼던 책 『명기집략』이다. 이 책은 역사를 왜곡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당시 청나라의 시선으로, 인조가 임금 자리를 찬탈했다는 식의 인조반정을 부정하는 글이나 광해군이 착하고 어진 인물이었다는 글 등이 기록 되어 있다. 책을 소지한 자는 물론이고 책을 유통한 책쾌까지 모두 체포되었다고 한다. 

책 수요 커지면서 책 대여점 '세책점' 등장 

책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책쾌 외에도 다양한 책 유통 경로가 등장한다. 1576년 출간된 책 『고사촬요』의 끝 부분에는 민간인의 집에서 책을 판매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책의 마지막 장에 는 이 책을 사고 싶다면, 수표교 아래 북쪽 수문 입구에 있는 하한수의 집으로 찾아오라는 글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민간인도 책을 팔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사촬요 /국립중앙박물관
고사촬요 /국립중앙박물관

이처럼 책쾌를 통한 책 매매 외에 책을 사고 팔거나, 빌리는 일이 민간에서 활발하게 이뤄지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책을 만드는 일도 호황을 맞았다. 그 전에는 개인이 책을 필사해서 소장하는 사례가 많았으나 전문적으로 책을 필사하는 필사쟁이가 활동하기 시작했다. 또 필사만으로는 늘어나는 책 유통 수요를 감당하기 힘들다 보니 이를 위해 목판으로 찍어 만든 '방각본'이 등장했다. 방각본은 대량 유통을 위한 것으로 책의 만듦새나, 종이의 질이 완벽하진 않았으나 서민들도 누구나 책을 볼 수 있도록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책을 낭독해주는 '전기수'라는 직업도 생겼으며 비용 때문에 책을 구매하지 못하는 이들이 이용할 수 있는 책 대여점 '세책점'이 등장하기도 했다. 청계전의 유명한 다리인 수표교나 광통교를 중심으로 책을 판매하는 행상 형태의 서점과 세책점들이 들어서면서 더 이상 책을 들고 다니면서 판매하는 일이 필요 없게 된다. 책쾌가 서서히 없어지기 시작한 것인데, 조선시대 책 전문가로서 활동한 책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책 유통이 활발해 지며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다.  
 

서울중구 수표교 /국립중앙박물관

다양한 책 유통 경로는 옛 조상들의 지식에 대한 높은 관심을 느낄 수 있게 한다. 특히 고객이 원하는 책은 물론 구하기 어려운 책들을 구해 추천하기도 했다는 책쾌는 언뜻 현대 독립서점의 북 큐레이팅을 연상하게 한다. 책이 흔하지 않았던 시절 세상의 모든 책을 자신의 머릿속에 소장하고 다녔던 책쾌의 활약은 현대에도 더욱 주목하게 되는 힘을 가진다. 이는 조선시대에 특권층 외에도 많은 이들이 책을 향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케 하는 존재인 만큼 큰 의미가 있다. 

2017년 내내 뜨거운 감자였던 전안법은 현실과 다른 불합리함으로 수공예 작가들의 목을 죄어오는 올가미 같았습니다. 극적으로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많은 작가들이 한숨 돌릴 수 있게 됐지만 아직 바뀌어야 할 부분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핸드메이커는 이러한 불합리에 ‘NO’를 외치기 위해 시작됐습니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은 정말 매력적인 일입니다. 그들은 실을 꿰 엮기도, 펜과 물감 으로 그리기도, 흙을 빚어내기도, 금속을 녹여 두드리기도, 정성스런 요리를 만들어 내기도 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만들고 있는 세상을 함께 들여다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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