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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 3, 그리고 다양한 색채라는 의미를 도기에 담다···당삼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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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 3, 그리고 다양한 색채라는 의미를 도기에 담다···당삼채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3.08.24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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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 위에 탄 사람들을 묘사한 당삼채 /flickr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신석기 시대부터 발생하여 중국 미술의 한 갈래이자 전 세계적으로는 도자기 공예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공예품인 중국의 도자기는 서구권에서는 도자기를 가리키는 용어로 'china'가 사용되고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당삼채는 중국 당나라 때 세 가지 색깔의 유약으로 장식된 도기로 대체로 황색·녹색·백색의 삼색 위주이기 때문에 ‘당삼채’라고 일컫는다.

다만 “삼채”(三彩)는 세 가지의 색채만을 사용한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색채를 뜻하지만 대체로 황색, 녹색, 백색으로 색칠된 경우가 많아 당삼채라 일컫는다. 당시 귀족들 사이에 유행한 후장의 풍속과 함께 발달한 것으로, 주로 장안·낙양 귀족들의 장례용으로 제작되었고 묘릉에 부장되었다.
 

사람 모양의 당삼채 /flickr

사실 당삼채라고 불리는 이 도기는 역사 문서에 기록된 적은 없었다. 당삼채라는 이름은 골동품집 상인들과 수집가들의 입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한다. 1942년 중국의 한 골동품 수집가 'Zhao Ruzhen'은 그의 저서인 『골동품 가이드』에서 당삼채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아주 좋은 건 유약이 없는 흰색 바탕에 노란색, 녹색 및 파란색의 세 가지 색으로 칠해져 있다"라고 책에 썼다.

당삼채는 중국 당나라와 그 무덤에서 발견된 도기다. 중국에서 처음 자기를 발명하고 나서도 약 500년이나 지난 후에야 당삼채가 만들어진 셈이다. 중국과 서양에서 녹색, 황색, 백색을 사용해 줄무늬 효과가 보이는 당삼채는 상인들이 시금치 달걀요리라 부르기도 했다고. 당삼채는 고대 중국 도자기의 소성 기술의 집합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나라에서 특히 인기 많았던 유약 도기로, 중국 뤄양에서 가장 먼저 출토되었고 많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뤄양 당삼채라고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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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그릇 모양 /flickr

당삼채는 유약을 바른 토기로 두 번의 소성 과정을 거치지만 다른 청자보다 상대적으로 제작이 쉽고 비용도 저렴하다. 대부분의 당삼채는 크기가 작고, 매장용으로 만들어진 게 많다. 사람, 낙타, 말의 형상으로 부장품을 만들거나, 수작업으로 만든 인형에 도공들의 개성을 부여하기도 했다. 허베이성과 허난성에 위치한 가마터에서 발견된 매장용 도자의 점토는 당나라 도공들이 당시 썼던 점토와 유사했다고 한다.

당삼채의 몸체는 백토로 만들고 유색 유약으로 코팅되어 섭씨 900도의 가마에서 구워졌다. 구리, 철, 망간과 코발트를 착색제로 사용해 다양한 색의 효과를 얻었다. 이후 청나라 시대 당삼채는 황제의 고풍스러운 취향을 반영해 높은 품질을 자랑했다. 당삼채는 당나라 전기에 약 100여 년간 유행하다가, 이후 어느 순간 갑작스레 사라졌다.

당나라 도자는 이전부터 꽤 높은 수준을 자랑하고 있었는데, 당나라가 618년 수나라를 통일하면서 본격적인 번영을 누리기 시작한다. 이때는 예술, 문화의 황금기로 당나라 도자기 수준에 있어서도 놀라운 발전과 혁신을 이룬 시기였다. 또 이 시기에 나온 당나라 도자기는 골동품으로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초기 당나라 도자기는 다양한 형태로 나왔지만 그중에서도 단연 뛰어났던 건 당삼채였다.
 

여성 조각상으로 보이는 당삼채 /flickr

곳곳에 세 가지의 색을 입힌 이 성형 토기는 도공들에게 약간의 복잡한 과정을 필요로 했다. 고품질의 당삼채는 가마에서 섭씨 1,100도의 온도에 구운 다음 유약을 바르고 900도로 낮춰 다시 한번 구워내는 과정을 거친다. 고온에서 유약을 바르고 구워내는 당삼채는 은근 까다로운 부분도 존재했다. 이상적인 외관의 모습을 얻기 위해 다시 구워야 하는 일도 있었고, 특히 코발트블루 유약은 안료를 페르시아에서 수입해 올 정도로 비싼 것이었기 때문에 희귀했다. 그래서 코발트블루 유약을 사용한 당삼채는 부와 지위를 상징했으며 일반적으로 왕실 귀족들의 집에서만 볼 수 있었다.

당삼채의 유약 색상은 알려져 있는 세 가지보다 사실 훨씬 다양하다. 황색, 백색, 녹색으로 주로 구성되어 있지만 이외의 팔레트에는 갈색, 파란색, 황토색 등 여러 색상이 포함되어 있다. 고대 사람들은 다양한 화학 성분을 조합하고 비율을 조절해 황색, 에메랄드색, 진한 녹색, 하늘색 등 여러 색조를 만들었다.
 

항아리 /flickr

당삼채에는 납이 많이 함유되어 있는데, 이는 소성 과정에서 서로 다른 색상의 유약이 같이 흐르도록 하는 역할을 했고 이렇게 만들어진 도기는 생생하면서도 다채로운 효과를 냈다. 당삼채는 '도기'로, 도자기라고는 부르지 않는데 일반적인 도자기에 비해 소성 온도가 낮기 때문이라고. 일반적인 도자기의 소성 온도는 섭씨 1200도 이상이지만 당삼채의 소성 온도는 그보다 낮기 때문에 도자기의 일종으로 분류된다.  
 

상상의 동물을 묘사한 듯한 당삼채 /flickr

당삼채는 사람과 동물을 조각한 조각상, 생활용기, 무덤의 수호신 등 여러 종류가 있다. 고고학 발굴을 통해 발견된 당삼채의 대부분은 무덤에서의 부장품으로 출토되었으며 도시 유적지나 가마터에서도 소수 정도가 발견되었다. 당나라가 풍요로웠을 시절, 사람들은 사치를 즐기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자신이 죽은 이후에도 현세에서 누렸던 부귀영화를 똑같이 누리길 바랐다.

그래서 이들은 무덤에 화려한 부장품들을 성대하게 넣었는데, 금과 은의 가격이 점점 올라가며 귀금속을 대신할 것으로 당삼채가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당삼채는 금은보다 가격은 저렴했고, 대신 외관은 다양한 색으로 화려했기 때문에 비싼 귀금속의 대용품으로는 제격이었다. 그래서 당삼채는 당나라 시대의 사치와 화려함을 증명하는 물건이기도 하다.

당삼채는 매장용으로 쓰였지만, 일반적인 가정 용품으로도 쓰였다는 추측이 있다. 사람, 동물, 무덤의 수호신 등을 묘사한 큰 도기는 매장용이 대부분이었고 접시, 항아리, 컵 등 일반적인 그릇들은 일상생활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일부 그릇은 장례용 부장품이 되기 전 다른 용도로 쓰였다고도 하며, 이는 하나의 물건이 단계에 따라 여러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관리직인의 모습 /flickr
활은 남아 있지 않은 모습 /flickr

사람 인형은 당삼채에서 가장 많이 보이고, 중요하게 다루는 소재다. 일반적으로 공무원, 군인, 남자와 여자 등 정치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들과 일상 시민들의 모습을 묘사했다. 머리에 유약을 바르지 않은 것이 특징이며 소성 후 안료로 이목구비를 구현해 인상을 생생하게 표현했다. 문관으로 보이는 조각상은 머리에 검은색 모자를 쓰고 있고, 군인은 머리에 투구를 쓰고 마치 활을 쏘는 듯한 포즈를 하고 있다.
 

당삼채의 대표적인 말 도기 /flickr
낙타 도기 /flickr

말과 낙타 모양의 동물 조각상도 많이 발견된다. 말은 당나라 시대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당삼채의 주제로 많이 쓰였다. 대개 풀을 뜯는 말, 안장을 쓴 말, 기수를 태운 말 등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낙타는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과 중앙아시아를 거쳐 서쪽으로 상인들의 물품을 운반하는 데 필수품이었다. 도기로 만들어진 이 동물 조각상들은 이 시대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또 교통, 무역, 오락 등 동물이 어떤 기능을 했는지를 알게 한다.
 

말을 탄 사람 /flickr
그 시절 사람들의 의복 형태를 알 수 있다 /flickr

1904년 뤄양에 현대 철도가 건설되면서 많은 당나라 무덤들이 훼손되었는데,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유약 도자기 장례용품들이 학자들의 관심을 이끌었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당삼채였다. 사람들은 당나라 문화의 위엄과 웅장함이 깃든 당삼채의 화려함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뤄양의 당나라 무덤들은 약탈이 잦았고, 이 약탈 과정에서 발견된 당삼채들은 개인 수집가의 손에 들어가거나 박물관들이 매입해 보존 중이다.

당나라 시대 도자기를 보면 당시 사람들의 생산과 소비, 심지어 매장 시스템까지 알 수 있다고 한다. 학자들은 각 조각상이 묘사하는 의상, 제스처, 표정 등 세부 사항을 연구하면서 당시 사람들의 패션 트렌드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서양이 중국 문화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여러 당삼채들 /flickr

당삼채는 당나라뿐만 아니라, 인도, 일본, 한국, 이란, 이라크, 이집트, 이탈리아 등 해외에도 수출했다. 발해삼채, 요삼채, 송삼채 등과 페르시아 삼채 등에까지 그 영향이 미쳤다고. 일본 나라시대 때, 중국의 삼채를 모조하여 만든 도기를 “나라삼채”라 하고 신라시대 때 삼채를 모조하여 만든 도기를 “신라삼채”라 불렀다고 한다. 실크로드, 지중해 연안 국가에서 발굴된 당삼채는 서양의 도자기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며 동서양을 이었던 중요한 문화물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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