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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탐구] 마르셸 뒤샹을 화가로 이끌고, 마티스의 찬사를 불러내다···오딜롱 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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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탐구] 마르셸 뒤샹을 화가로 이끌고, 마티스의 찬사를 불러내다···오딜롱 르동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3.08.08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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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 낭만, 꽃》 /전남도립미술관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전남도립미술관이 11월 5일까지 개최하는 전시 《영원, 낭만, 꽃》은 2023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의 개최를 기념하며 꽃으로 표현되어 온 예술작품 속에서 낭만성을 찾고자 한다. 생성하고 소멸하는 삶의 표상인 꽃은 인간의 전 생애 속에서 다양한 의미를 가지며 시각예술로 표현되어 왔다. 

전시는 총 다섯 가지 섹션으로 나뉘며, 세 번째 섹션인 <시대를 넘어서>에서는 고전주의와 인상주의, 상징주의로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며 시대를 넘어서는 꽃 도상을 살펴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원화가 전시되는 화가 오딜롱 르동은 다른 화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친 '고독한 화가'다.

그는 모네와 같은 해에 태어났으며, 이번 전시에서 모네의 작품과 같이 볼 수 있다. 르동은 인상파 화가들이 활동한 시대에 살았지만 자연이 주는 순간적인 인상을 작품에 표현하려는 미술의 흐름을 따르려 했던 모네나 드가, 르누아르와는 달리 '보이는' 것보다 '느껴지는' 것을 중시했다. 
 

<Vase of Flowers> /flickr

오딜롱 르동은 상징주의 예술가들 중에서도 중요하면서도 독창적인 예술가 중 하나다. 그는 프랑스 보르도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르동의 아버지는 1830년 루이지애나에서 노예무역(노예를 상품으로 거래한 근세 유럽의 무역형태)으로 부를 쌓았다고 한다. 르동의 이름은 어머니의 이름인 '오딜레'에서 따와 오딜롱이라 지어졌다고. 간질로 인해 건강이 좋지 않았던 르동은 어렸을 때부터 삼촌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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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어린 시절은 고독했다. 그는 '구름이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며, 그 찰나의 변화무쌍한 빛의 마법을 즐겁게 따라다녔다'고 회상했다. 그럼에도 르동은 자신을 '그림자를 찾아다니는 슬프고 나약한 아이'로 묘사하기도 했다. 그는 큰 커튼 밑이나, 집안의 어두운 구석을 찾아 숨어 지내며 특별한 기쁨을 느꼈다고 회고한다. 어렸을 때부터 존재한 그의 우울함과 비관적인 감정들은 그의 예술, 특히 누아르나 상징주의적 작품에서 적극적으로 표현되었다. 

르동은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그렸고, 10살이 되던 해 학교에서 그림으로 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상을 받고 난 후 1855년 스타니슬라스 고랭에게 사사받았다. 고랭은 이 작은 예술가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르동은 "그가 나에게 한 첫 마디는, 나는 바로 나 자신이며 내 감정과 느낌이 없다면 연필로 한 획도 그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했다. 수채화가였던 고랭은 르동에게 프랑스 화가 들라크루아, 프란시스코 고야 등 낭만주의 예술가들을 알려 주었다.
 

<The Black Sun> /flickr

15살부터 정식으로 그림을 배우던 르동은 아버지의 권유로 인해 전공을 건축으로 바꾸게 된다. 여담이지만 르동의 동생은 이후 나중에 유명한 건축가가 된다. 르동은 1864년 파리의 에꼴 데 보자르 건축예술학교의 입학 시험에 떨어지면서 건축가로서의 꿈을 접고 프랑스의 화가이자 조각가 장 레옹 제롬에게 잠시 회화를 배운다. 고향 보르도로 돌아온 그는 1865년 조각을 시작했고 프랑스의 화가 로돌프 브레댕은 그에게 에칭(etching)과 석판화를 가르쳤다.
 

 <Strange Flower> /flickr

1870년대는 르동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다 준 시기였다. 순조롭게 쌓아 가던 그의 예술적 경력은 1870년 징집이 되고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끝날 때까지 군인으로 복무하면서 잠시 중단된다. 전쟁이 끝나고 르동은 파리로 이주해 목탄과 석판화 작업을 이어간다. 그는 목판 특유의 검은색 드로잉 작품을 '누아르'라 불렀다. 누아르에서 르동이 구현한 톤, 질감, 음영은 같은 시기 조르주 쇠라의 콩테 크레용 드로잉에 비견될 정도였다고. 그만큼 검은색은 르동에게 상상력을 표현하는 데 이상적인 매체였다.

1872년, 르동은 화가 앙리 팡탱 라투르를 만나 석판화를 배웠다. 1874년 그의 아버지가 무일푼으로 세상을 떠나자 르동은 대량으로 제작하고 판매할 수 있는 석판화를 생계 수단으로 선택한다. 1876년에는 작가 스테판 말라르메를 만나 말라르메의 집에서 열리는 정기 모임에 참석하면서 상징주의에 속한 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을 만난다. 1878년에 이르러서야 그의 작품 <Guardian Spirit of the Waters>으로 작품성을 인정받는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르동은 주목받는 작가는 아니였다. 프랑스 작가이자 미술 평론가인 위스망스의 소설 『거꾸로 À rebours』에서 르동의 그림을 수집하는 퇴폐적인 귀족이 등장하면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한다.
 

<Buddha in His Youth> /flickr

1890년대 들어 르동은 파스텔과 오일로 작업을 했고, 1900년대 이후부터는 검은색의 목판화는 만들지 않았다. 재미있는 건 그는 힌두교와 불교 등 종교 문화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다. 부처의 모습은 그의 작품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주제다.

르동의 작품들은 환상, 꿈, 상상의 세계를 주제로 한다. 그는 검은색으로 표현하는 누아르 시리즈로 이름을 알렸고, 이전 그림을 재작업한 석판화는 관객층을 넓히면서도 특정한 주제나 문학적 구절을 탐구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였다. 다만 르동의 경력 전반기는 흑백의 작업이 다였다. 누아르라 부르는 검은색의 단색 구성에서 그는 검은색의 표현적인 기능에 집중했다.
 

<Tête de Persée> /flickr

그의 작품 테마 중 하나는 몸에서 떨어져 나간 머리다. 자유롭게 떠다니거나, 마치 눈알처럼 축소되어 보이는 잘린 머리는 일상 세계의 속박에서 벗어나 꿈과 주관을 탐구하며 더 높은 의식 상태에 도달하고자 하는 작가의 열망을 담고 있다. 그는 가장 좋아하는 예술적 주제에 대한 질문에 "나의 괴물들이다. 내가 가장 개인적으로 표현한 것은 바로 괴물이다"란 대답을 했다고 한다.

괴물에 대한 그의 묘사는 풍부한 상상력의 산물이며, 생물진화론을 주장한 찰스 다윈의 진화 이론에 큰 영향을 받았다. 폴 고갱은 르동과 친구가 되며, 그의 지인이 만드는 환상적인 예술을 깊이 이해했다. 고갱은 "르동이 괴물을 그린다는 말이 왜 나왔는지를 모르겠다. 그들은 상상의 존재고, 르동은 상상력이 풍부한 몽상가다"라 했다. 
 

<Vase of Flowers> /flickr

르동은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 스테판 말라르메의 낭만주의와 상징주의적 작품들에 매료되었다. 르동은 더 다채로운 팔레트를 만들었고, 파스텔과 유화로 그린 초상화와 정물화는 화려한 색채가 가득한 것이 특징이다. 그가 컬러를 사용하게 된 변화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불교나 기독교 같은 종교에 작가의 관심이 높아진 것이라 하지만, 재료에 상관없이 르동은 계속 주관적인 경험에 관심이 있었다. 르동에게 색은 표현을 위해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영역을 탐구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Guardian Spirit of the Waters> /flickr

<바다의 수호신>은 커다란 머리가 날개를 단 채로 고요한 바다 위를 떠다니며 작은 범선을 내려다보고 있다. 갈매기는 공중을 날고 있고, 머나먼 수평선이 보인다. 이 생명체는 무섭게 생겼지만, 어딘가 자비롭고 신성한 기운을 풍긴다. 작가의 몽환적인 이미지를 사실적으로 묘사했으며, 20세기 초현실주의를 연상시킨다.
 
르동은 종종 자신이 '심연 위, 나라가 없는 곳'이라 생각하는 바다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을 아쉬워했다고. <바다의 수호신>은 그의 환상적인 감성이 잘 드러난 작품이며, 자신의 또다른 탄생을 소망하는 상징이기도 하다. 
 

<Closed Eyes> /flickr

<눈을 감고>는 눈을 감고 어깨를 드러낸 채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얼굴에 꽉 맞는 가면을 쓴 인물을 묘사하고 있다. 눈을 감은 모습이라는 모티브는 르동에게 신비함, 꿈, 명상, 내면의 삶 등을 불러일으켰다. 덧붙여 감긴 눈은 죽음을 의미한다고들 하며, 상징주의자들에게 감긴 눈은 현실 세계로부터의 궁극적인 탈출과 의식적인 삶의 한계를 상징했다.

<눈을 감고>는 르동의 작품에서 처음으로 색채를 사용함으로써, 그의 커리어의 전환점이 된 작품이다. 르동은 이전까지는 검은 목탄 드로잉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눈을 감고>에서도 색채를 완전히 쓴 것은 아니다. 유화를 얇게 칠해 옅은 색조로 반투명하면서도 미묘한 효과를 주었다. <눈을 감고>는 상징주의의 아이콘이 되었고, 인물의 성별이 모호하다는 점에서 상징주의자들에게 매우 인기 있는 작품이 되었다. 
 

<Cyclops> /flickr

<키클롭스>에서 호메로스의 『오디세이』 속 신화에 나오는 애꾸눈의 괴물 키클롭스(폴리페모스)는 바다의 요정 갈라테아가 꽃으로 둘러싸인 동굴에서 잠을 자는 동안 바위 언덕의 뒤쪽에 있는 모습이다. 르동은 후기 회화에서 고전 신화의 한 장면을 자주 묘사했다. 르동은 바위투성이의 땅 위로 솟아오른 키클롭스와, 아름다운 꽃 속에 있는 요정을 대조적으로 표현했다. 거대한 눈을 가진 키클롭스는 호머의 오디세이에 나오는 인간을 잡아먹는 괴물이 아닌, 온화한 생명체다.

키클롭스와 바다 요정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묘사한 귀스타브 모로와는 달리 르동은 신화를 주제로 하면서도 이야기를 비극적으로 다루진 않았다. 그림에서 갈라테아는 얼굴을 부분적으로 가린 채 잠들어 있으며, 이것은 갈라테아가 꿈의 세계로 향햐는 것을 암시한다. 키클롭스는 잠든 요정을 바라보는 대신 고개를 기울여 호기심에 찬 시선으로 관객을 바라본다. 처음 요정에게 시선을 빼앗겼던 관객은 내면을 지키는 무서운 얼굴의 거인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The Angel of Destiny> /flickr

그는 1913년 뉴욕에서 개최된 미국 최초의 국제 현대미술전 아모리 쇼에서 단일 작품으로는 가장 큰 규모의 전시회를 개최했다. 그리고 3년 후인 1916년, 7월 6일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모호하고, 정의할 수 없는 것이라 설명했다. 르동은 "내 그림은 영감을 주지만 정의할 수 없다. 음악이 그러하듯 그림은 우리가 결정할 수 없는 모호한 영역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인상파의 현실 묘사에 동조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한 보이는 것의 논리’를 사용하려는 환상적·상징적 경향을 보였다. 그의 대부분의 작품들은 기이한 존재, 그로테스크함으로 채워져 있지만 그의 목표는 자신의 마음 속 존재하는 것을 회화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일기에서 "난 종종 시각적으로 보이는 아주 작은 부분까지 그림으로 그렸지만,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남았다. 다음날 나는 기억을 통해 상상력을 발휘하도록 놔두었고, 이 방법으로 그 갈증을 달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르동은 폴 고갱과 같은 동시대 예술가들뿐만 아니라 후기 현대 예술가들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피에르 보나르는 르동을 두고 "우리 세대 모두가 그의 매력에 빠졌다"고 전했고, 마르셀 뒤샹은 "나의 출발점은 르동의 미술"이라고 경의를 표했다. 앙리 마티스 또한 르동의 파스텔이 자신의 다채로운 팔레트에 영향을 주었다는 걸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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