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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스케치] 인류 누구나 누리는 위대한 유산을 인천에서, 국립세계문자박물관 《문자와 문명의 위대한 여정》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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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스케치] 인류 누구나 누리는 위대한 유산을 인천에서, 국립세계문자박물관 《문자와 문명의 위대한 여정》 2부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3.07.07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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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인쇄술의 발전과 기록, 문자의 예술화
전시 전경 /김서진 기자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처음 만들어진 문자는 일부 계층의 전유물이었다. 이들은 정치와 정교와 지식을 독점하고 사람들을 지배하는 수단으로 문자를 활용했다. 그러나 도시와 상업이 발달하고 새로운 시민 계층이 성장하면서 일반 사람들도 문자가 필요해졌다. 늘어난 문자 수요는 다양한 독서층을 형성하며 그대로 인쇄술의 발전을 이끌었다.

인쇄술을 통해 다수의 사람들이 손쉽게 문자를 접할 수 있었고 소수의 사람만 누리던 지식이 일반인에게도 전수되었고 지식은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우리나라는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 인쇄술을 발명해 사용화시켰고 이를 바탕으로 통치에 필요한 서적뿐 아니라 민간의 실용서까지 다양한 책을 보급할 수 있었다. 
 

<구텐베르크 인쇄기> /김서진 기자

인쇄술을 통한 문자의 보급으로 인류 사회는 혁명적인 변화를 맞이했다. 그 변화의 중심에는 서적 출판에 의한 종교, 지식, 정보의 확산과 대중화가 있었다. 동아시아는 여러 글자로 맞추어진 하나의 판에 종이를 대고 솔을 이용해 손으로 문질러 찍어내는 방식을 사용했다. 반면 유럽은 회전력을 이용해 압력을 가하는 기계 장치인 스핀들 프레스를 사용해 찍어내는 방식으로 인쇄했다. 동아시아는 문자의 특성상 활자 인쇄보다는 목판 인쇄를 통해 책의 수요에 대응했고 유럽은 기계 장치의 자동화와 같은 기술 개발을 통해 인쇄 속도와 수량을 지속적으로 늘렸다.

구텐베르크는 금속활자뿐만 아니라 활자 인쇄에 적합한 인쇄기를 개발했다. 이것은 포도주나 기름 압착기의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인쇄기에 달린 손잡이를 당기면 연결된 나사가 돌면서 아래로 움직이는데 그 때 생기는 압력이 수평 상태의 나무판자로 전달된다. 이 판에는 인쇄된 종이를 장착할 수 있었고 판 밑에는 조판이 끝난 활자가 놓이게 된다. 한 장씩 인쇄할 때마다 활자에 잉크를 칠해 인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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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상가상 15세기 종이는 깨끗하게 인쇄하기엔 너무 딱딱하고 미끈거렸다. 이 때문에 인쇄공들은 작업하기 4-5일 전에 종이에 물을 뿌려 축축하게 했다. 적절한 잉크를 만드는 것도 복잡했다. 그때까지 목판 인쇄에 사용하던 잉크는 매끈한 금속 활자에 칠하기에 너무 묽었다. 이 때문에 구텐베르크는 걸쭉하면서도 빨리 마르는 잉크가 필요했다. 그는 여러 원료를 혼합하고 실험을 거듭해 최적의 잉크를 만들었다.  
 

<월인천강지곡 금속활자 인판> /김서진 기자

인류의 모든 문화와 문명은 문자 위에 세워졌다. 생성과 소멸의 과정에서 드러난 문자의 저력은 대단했다. 문자는 낡은 시대를 저물게 하고 새로운 시대를 불러 오는 위대한 힘을 보여주었다. 인류는 문자를 사용해 소통 방식에 혁명을 가져왔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 제도를 끊임없이 개혁했다.

가장 눈부신 인류의 소통 혁명은 인쇄술에 기반한 문자 대중화에서 비롯되었고 인쇄기의 발명으로 책이 무한 복제되었다. 문명을 지탱한 숨은 조력자는 바로 종이였다. 인쇄술은 인류 지식의 대중화를, 번역은 인류 지식의 확산과 공유를, 기록은 인류 지식의 전승을 이끌었다. 매체와 서체는 시대의 기술을 반영하며 문자의 현재와 미래를 이끈다. 
 

<룩 번 띠엔> /김서진 기자

쯔놈은 13세기부터 20세기까지 베트남어를 기록하기 위해 베트남에서 사용되었던 문자다. 베트남에서는 이미 기원전부터 한자가 사용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쯔놈이 만들어졌다. 쯔놈은 11-12세기 처음 나타나기 시작해서 13-14세기 완전히 확립되었다. 18-19세기는 쯔놈의 황금시대로 수많은 문학 작품이 창작되었고 이를 쯔놈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프랑스가 식민지 베트남에 라틴 문자 기반의 '쯔꾸옥응으'를 보급하고 1918년 공문서에서 한자 사용이 폐지되자 쯔놈도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베트남 사람들은 한자의 소리와 뜻을 빌리거나 한자의 다양한 조합과 변형을 통해 쯔놈을 만들었다. 베트남은 동남아시아 국가 중 유일하게 한국 일본과 같은 한자 문화권에 속한다. 비록 현재는 라틴 문자를 사용하고 있지만 쯔놈은 뿌리 깊은 베트남의 문화 전통을 상징한다. 

『룩번띠엔』은 19세기 베트남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2,082행의 쭈옌터놈이다. 쭈옌터놈은 쯔놈으로 쓴 운문 소설을 가리킨다. 작가인 응우옌딩찌에우는 1822년 베트남 남부 자딘에서 태어났다. 작품 속에 나타난 남주인공의 모친상과 실명, 정혼자와의 파혼, 한의학에 대한 견식 등은 작가의 생애가 투영된 자전적 소설 내용이라 할 수 있다.

『룩번띠엔』작품 속에 나타나는 유교와 불교, 도교 사상은 작가의 예술적 재능을 윤리 도덕을 바탕으로 표현한 것이다. 남주인공 룩번띠엔, 여주인공 끼에우응우옛응아, 어부, 나무꾼, 동자로 묘사된 인물들은 고결한 인품과 지혜와 재능을 대표한다. 또한 그들은 강직하고 비분강개한 성격과 넓은 아량을 가지고 의를 중시하며 위험이나 어려움에 직면한 사람들을 만나면 그냥 넘기지 않는 의로움을 가진 인물로 묘사되었다. 
 

<루터 성서> /김서진 기자

이 성서는 1523-1524년에 인쇄된 루터의 독일어 성서 중 구약의 일부다. 고대 히브리어와 아람어(성경히브리어와 가장 밀접한 셈족 계통의 언어)로 기록된 구약을 루터와 그의 동료들이 독일어로 번역했다. 로마 교회의 면죄부 판매에 항의하는 루터의 글은 인쇄술의 도움을 받아 순식간에 독일 전역에 퍼졌다. 이 때문에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한 루터는 1521년 보름스 제국 회의에 불려갔지만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다. 이후 루터는 신변의 위험을 느껴 바르트부르크성에서 시골 귀족으로 변장하고 은둔 생활을 했다.

이때 루터는 11주만에 그리스어 신약을 독일어로 번역했는데, 루터가 번역한 신약은 비텐베르크에서 3천부가 인쇄되었다. 이에 고무된 루터는 비텐베르크로 돌아가 구약 번역에 착수했으며 12년에 걸쳐 완역했다. 루터의 독일어 신약이 출간된 1522년부터 그가 사망한 1546년까지 50만 부가 넘는 루터 성서가 인쇄되었다. 이와 같은 루터 성서의 확산은 독서 혁명을 의미했다. 민중이 독서층으로 처음 형성되었고 이들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향기로운 봄(춘향전)> /김서진 기자

번역은 다른 언어를 자신의 언어로 바꾸는 과정이다. 번역을 통해 문화권과 문화권은 서로 다른 지식을 이전하거나 공유할 수 있었다. 번역으로 특정 문화권에 옮겨진 타문화의 성취물은 점차 현지에 정착하게 되고 본래의 문화와는 다른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게 된다. 이를 통해 인류 문화는 지역적인 한계를 넘어 널리 소통하고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번역을 통한 교류와 소통은 모든 민족과 문화의 특수성과 개별성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할 때 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문화에 대한 상이성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불어판 춘향전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춘향전』과 몇 가지 차이점을 보인다. 우선 이도령은 이몽룡이라는 이름 대신 '이도령(I-Toreng)'이라 불린다. 또한 춘향은 기생 월매의 딸이 아닌 평민의 딸로 등장하는데 이도령은 춘향을 쉽게 만날 수 없어 애를 태운다. 이를 돕기 위해 한 노파가 돈을 받고 춘향과 이도령의 만남을 주선하는 역으로 새로이 등장한다. 이도령은 춘향에게 접근하기 위해 여장을 하고 친분을 쌓으며 서로 상대방이 남성이었으면 결혼을 했을 것이란 대화를 나누며 장난으로 서약서를 교환한다.

이도령은 즉시 자신이 남성임을 밝히고 맹세를 했기 때문에 결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후 이도령이 아버지의 관직 임명으로 인해 서울로 가게 되어 이별한 뒤 신임 사또가 춘향에게 수청을 들 것을 요구하는 것 역시 춘향의 신분으로 인해 결혼을 요구하는 것으로 바뀐다. 그 뒤는 우리가 아는 『춘향전』과 같다. 『향기로운 봄』은 모든 나라의 문학 작품을 접할 수 있도록 의도한 기욤 소총서의 기획에 걸맞게 유럽인들에게 한국의 풍습이나 생활상을 소개하고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뉘른베르크 연대기> /김서진 기자

기록이란 매체에 구애받지 않고 개인 혹은 단체에서 문서를 생산하는 행위와 그 생산물을 뜻한다. 문자 발명 이전 인류의 주요한 소통 수단은 말이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기억들은 시간이 지나며 그 내용이 소실되거나 변형되었다. 문자가 발명되며 인류는 자신들의 경험과 지혜를 기록할 수 있었다. 인류가 세계를 이해하고 그 지식을 확산하는 데 문자와 기록이 크게 기여했다. 이렇듯 과거의 흔적들은 기록을 통해 후대에 전승되었고 기록의 축적으로 인류 문명은 진보할 수 있었다.

『뉘른베르크 연대기』 혹은 『셰델 세계연대기』는 고대부터 전해 온 여러가지 많은 문헌을 바탕으로 세계의 역사를 연대순으로 백과사전처럼 담고 있는 책이다. 독일의 역사학자 하르트만 셰델의 대표작으로 독일어본과 라틴어본 두 가지로 뉘른베르크에서 1493년에 제작되었다.『뉘른베르크 연대기』에서는 초상화가 여러 번에 걸쳐 반복해서 사용되었고 도시 전경이 양면 크기로 담긴 삽화도 31점에 이른다.

『뉘른베르크 연대기』는 역사적 사건들과 유명한 도시들을 여섯 시기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다. 이것은 성서의 「창세기」에 등장하는 창조의 6일과 유사하다. 연대기는 세계의 역사를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의 구조에 따르고 있는데 이는 일반적인 중세 연대기 서술의 전통이다. 『뉘른베르크 연대기』는 역사적 사실을 찾아볼 수 있는 백과사전의 기능을 가진 것뿐만 아니라 1490년경 도시 문화의 실제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많은 도시의 모습이 처음으로 인쇄본에 등장하고 그 외에도 도시의 역사, 도시 이름의 어원, 문화, 경제, 상업 등 분야에서 동시대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사실들도 많이 기록되어 있다.
 

여러 종이와 함께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점자도 보인다 /김서진 기자

인류는 돌, 진흙, 뼈, 쇠, 나무, 종이 등에 문자를 기록했으며 이를 서사 재료라고 한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진흙으로 만든 점토판을, 고대 이집트인들은 나일강에서 흔히 자라는 파피루스를, 고대 중국인들은 나무를 깎아 만든 간독을, 유럽인들은 동물 가죽을 가공한 양피지를 서사 재료로 사용했다. 인류 역사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서사 재료는 종이로, 인쇄술의 발전과 함께 책의 수요가 증가하는 상황을 떠받쳐야 했다. 제지술은 그 상황에 맞게 기술적으로 진화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나라얌> /김서진 기자

첨필은 인도 남부와 스리랑카 등지에서 사용되었던 뾰족한 스타일러스 형태의 필기구로 '나라얌'이라 불린다. 이들 지역의 서사 재료는 나뭇잎으로 만든 패엽이었다. 나라얌으로 패엽을 긁어 글자를 쓰고 그 위에 그을음으로 만든 잉크를 바른 후 이를 닦아내면 글씨가 새겨진 곳이 검은색으로 뚜렷하게 보인다. 이들 지역은 필기구와 서사 재료의 영향으로 문자의 형태도 곧은 직선보다는 둥근 직선이다. 직선으로 글자를 쓰면 패엽이 떨어져 나가기 때문이라고.
 

휴대용 필기구 <페너> /김서진 기자

휴대용 필기구는 펜(붓)과 잉크(먹물)를 일체화해여 휴대할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빠른 것은 13세기부터 사용된 것이 있으나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만년필이 등장하기 전인 18-19세기다. 휴대용 필기구는 모양이 약간 달랐지만 세계 모든 지역에서 사용되었다. 유럽에서는 페너와 에튀, 이슬람권에서 칼람단, 한국에서는 행연과 먹통, 일본에서는 야타테라고 했다. 
 

<아랍문자가 장식된 그릇> /김서진 기자

동쿠파체는 이란과 이라크를 포함한 이슬람 동부 지역에서 발전한 쿠파체를 가리킨다. 동쿠파체는 10~13세기 무렵 전성기를 맞이했고 쿠란 필사나 문서 기록뿐만 아니라 도자기나 건축물 장식에도 두루 사용되었다. 서쿠파체는 이집트 서쪽의 리비아, 튀니지, 알제리, 모로코 등을 포함한 마그리브 지역에서 발전한 쿠파체를 가리킨다. 서쿠파체는 사각형의 형태를 지녔던 기존의 쿠파체에 비해 곡선과 원의 사용이 두드러지게 강조된 서체다. 그릇 안쪽 테두리에는 '그 주인에게 영원한 영관, 부, 행복, 안녕, 관용, 축복, 그리고 장수를 기원한다'라는 내용이 동쿠파체로 새겨져 있다.

손으로 썼던 문자와 기록은 기계로 곧 넘어갔다. 타자기는 즉석에서 종이에 글자를 찍어내는 기계 장치다. 상업적으로 성공한 최초의 타자기는 미국의 숄스와 글리든이 만들었다. 이들은 1868년 특허를 얻은 뒤 제조업체 레밍턴사와 손을 잡았다. 숄스의 타자기는 1873년부터 대량 생산되었고 시장을 개척하며 사실상의 표준을 제시했다. 기계식 타자기는 1980년대 전자산업의 성장과 함께 쇠퇴했다. 비록 타자기의 시대는 저물었지만 그 유산은 여러 곳에 남았다. 특히 키보드라는 입력장치는 타자기 외에도 컴퓨터와 스마트폰까지 문자를 입력하는 거의 모든 장치에서 활용되고 있다. 
 

<언더우드 타자기> /김서진 기자

언더우드 타자기는 기계식 타자기 역사상 가장 성공한 제품이다. 1900년 출시된 뒤 약 3백90만대가 팔려 언더우드라는 이름을 타자기의 대명사로 만들어 주었다. 성공 이유는 경쟁 제품보다 빠르고 편리하게 타자할 수 있었기 때문. 당시 많은 타자기는 종이가 말려 들어가 있는 플래턴의 아래쪽에 글자를 찍었기 때문에 글자가 어떻게 찍히는지 눈으로 보면서 타자할 수 없었다. 찍힌 글을 보려면 타자를 멈추고 종이를 밀어 올려 확인하고 다시 집어넣어야 했다. 언더우드 타자기는 타이프바의 궤적을 바꾸어 플래턴 위쪽에 글자를 찍히게 했고 이를 통해 '보면서 쓸 수 있다'라는 구호를 내세워 광고했다.

또한 시프트 키를 이용해 넉 줄의 키보드에 84개의 글자와 문장 부호를 담았는데 이것은 최대한 많은 글자를 담으면서도 손을 많이 움직이지 않고 외워서 타자할 수 있는 최적의 배열로 입증되었다. 언더우드는 숄스가 고안한 '쿼티 키보드'를 채택해 이 자판 배열에 익숙한 사용자들을 끌어들였다. 잉크 공급 방식도 유지 관리가 편하고 수명이 긴 리본을 채택해 사용자의 편의를 도모했다. 언더우드는 이들 기술을 최초로 발명한 건 아니지만 이들을 하나로 묶어 완성도 높은 제품을 만들어 냄으로써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오스본1 휴대용 컴퓨터> /김서진 기자

오스본1은 오스본 컴퓨터 사에서 1981년 발표한 세계 최초의 휴대용 컴퓨터다. 약 11㎏의 적지 않은 무게에 크기도 요즘의 데스크탑 컴퓨터와 비슷하다. 배터리가 내장되어 있지 않아 직접 전원을 연결해야 했지만 키보드를 닫은 후 이동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이슈가 되었다. 출시된 이후 8개월 동안 1만대 이상이 팔리며 호평을 받자 여러 기업이 휴대용 컴퓨터 개발에 뛰어들었다. 4년 후인 1985년 도시바 컴퓨터가 모니터 부분을 폴더 형태로 여닫을 수 있는 T1100을 출시했다. 
 

전시 전경 /김서진 기자

문자는 기록이라는 본연의 역할을 넘어 점차 감성의 대상으로 그 역할이 확장되었고, 곧 문자는 예술이 되었다. 문자가 예술성을 획득한 근본적인 원인은 형태와 표현의 다양성이다. 초기 문자는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형성되었고 서사 도구가 변화하며 자연스럽게 문자의 형태도 변화했다. 서체는 서사 도구의 변화와 함께 서사자가 빠르고 편리하게 문자를 기록할 수 있는 방향으로 형태가 진화했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문자와 사라진 문자를 포함한 다양한 문자들은 그 어느 것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각 문자마다 고유의 멋을 갖고 있는 이유는 문자가 목적에 부합하는 결과물이고 시간이 숙성시켰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새로운 형식의 문자가 나타나고 서체가 나타날 것이며 인류는 서체를 통해 점점 더 다양한 사상과 감정을 교감하고 감상할 것이다.

국립세계문자박물관 전시 《문자와 문명의 위대한 여정》은 현재 상설전시로 진행 중이다. 말 그대로 온 공간을 채우는 빼곡한 문자를 질리도록 보고 싶다면, 또는 나라마다 다른 수많은 언어가 어떤 식으로 긴 시간을 버텨 남겨지고 때로는 사라졌는지를 알고 싶다면 꽤 유용한 전시일 듯 싶다.

2017년 내내 뜨거운 감자였던 전안법은 현실과 다른 불합리함으로 수공예 작가들의 목을 죄어오는 올가미 같았습니다. 극적으로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많은 작가들이 한숨 돌릴 수 있게 됐지만 아직 바뀌어야 할 부분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핸드메이커는 이러한 불합리에 ‘NO’를 외치기 위해 시작됐습니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은 정말 매력적인 일입니다. 그들은 실을 꿰 엮기도, 펜과 물감 으로 그리기도, 흙을 빚어내기도, 금속을 녹여 두드리기도, 정성스런 요리를 만들어 내기도 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만들고 있는 세상을 함께 들여다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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