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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스케치] 인류 누구나 누리는 위대한 유산을 인천에서, 국립세계문자박물관 《문자와 문명의 위대한 여정》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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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스케치] 인류 누구나 누리는 위대한 유산을 인천에서, 국립세계문자박물관 《문자와 문명의 위대한 여정》 1부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3.07.06 18: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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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문자의 탄생과 기록
인천에 개관한 국립세계문자박물관 /김서진 기자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문화체육관광부는 국내 최초로 전 세계 문자자료를 수집·연구·전시하는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을 6월 29일 인천 송도 국제도시에 개관했다. 국비 611억원의 예산을 투입한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의 총면적은 1만5650㎡ 규모를 자랑한다. 박보균 문체부 장관은 "박물관이 K컬처 매력의 원천인 한글과 세계의 문자를 잇는 역사·문명의 통합 플랫폼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한 바 있다.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은 프랑스 샹폴리옹 박물관과 중국 문자박물관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로 지어졌다. 2013년 훈민정음학회가 건립을 건의하고 문체부가 2014년 기본구상 연구를 완료한 뒤 2019년 착공해 2023년 6월 29일 인천 송도 국제도시에 문을 열었다. 건립과 전시공사 등에 국비 620억 원이 투입, 소장품 확보에 지난 4년간 100억 원 등 720억 원의 예산을 들였다.
 

《문자와 문명의 위대한 여정》 /김서진 기자

현재 상설전시관에서는 《문자와 문명의 위대한 여정》이 전시 중이다. 소장품 543점 가운데 136점을 공개했으며, 복제품 44점까지 총 180점이 전시되었다. 전시 설명은 9개의 언어로 번역되어 볼 수 있으며 복제품 중 25점은 직접 만져보는 촉각 체험도 가능하다. 무엇보다 인류 최초의 문자인 쐐기문자부터 이집트문자, 한자를 거쳐 현재의 한글에 이르기까지의 흐름을 디지털 이미지로 볼 수 있다.

인류에게는 말과 소리가 있었다. 문자가 없던 선사 시대에는 말에 표정과 손짓을 보태 생각과 감정을 전달했다. 그러나 말은 입에서 나오는 순간 사라져, 소통이 필요했던 인류는 그 장벽을 뛰어넘어야 했다. 그 열망으로 만들어진 인류의 발명품이 바로 문자다. 말과 소리는 문자로 기록되기 시작했고 말로 전하던 생각과 감정은 모두 문자에 담겼다. 문자는 시간이 흐르고 공간이 바뀌어도 사라지지 않았고 인류는 문자를 통해 소통의 범위를 점점 확장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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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서 볼 수 있는 암각화 미디어아트 /김서진 기자

동굴벽화의 암각화는 인류가 남긴 최초의 기록이다. 선사시대 사람들은 그들의 일상과 생각과 소망 등을 바위나 동굴 벽에 그림으로 그렸다. 선사시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남긴 그림은 동물을 사냥하는 장면으로 이 그림에는 사냥의 성공을 축하하고 풍요를 기원하는 주술적 의미가 담겨 있다. 동굴벽화와 암각화는 인류 삶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며 인류의 예술과 종교 생활의 시작이었다. 인류의 사고력이 발달할수록 그림은 점차 간략해져 추상적인 기호로 변화해 갔고 이는 문자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수메르어 회계 점토판> /김서진 기자

인류 최초의 문학작품은 수메르인들에 의해 쐐기문자로 기록되었다. 수메르인들은 신과 관련된 작품을 가장 의미 있게 생각했다. 쐐기문자로 기록된 문학 작품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서아시아 전역으로 퍼졌다. 쐐기문자로 이룩한 문화적 전통은 고대 서아시아에 흩어져 살고 있던 거주민들과 밀접한 관계를 주고받으며 형성되었고 후대에도 계속해서 차용되며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점토판은 도시 움마의 특정 관청에서 일년동안 출납한 가축 수를 수메르 쐐기문자로 기록한 장부다. 이는 수메르 시대 움마 사회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문서다. 점토판을 다섯 단으로 나누고 줄을 그어 정리했다. 이 문서에 적힌 가축들은 신전에 바치는 제물로 살진 황소, 풀 먹인 양, 털이 있는 양 등 용도에 따라 세분화했다.

문서 말미에는 가축을 맡아 돌보는 목동이 맹세했다는 내용이 있다. 목동은 계약이 끝났을 때 제공해야 할 가축 수를 맞추지 못하면 염소 한 마리를 대신 지급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메르인들은 가축의 출납이 발생할 때마다 크기가 작은 점토판에 그 내역을 적어 보관하다가 일정 기간이 지날 때마다 큰 점토판으로 옮겨 정리했다. 이 문서를 통해 고대 수메르 사회의 행정 문서 작성법 및 보존 방식을 알 수 있다. 
 

<구데아 좌상> /김서진 기자

라가시의 왕 구데아가 에닌누 신전 건립 후 닌기르쑤 신에게 바친 조각상이다. 이 조각상은 짙은 녹색 섬록암으로 만들었으며 머리 부분은 훼손되어 사라졌다. 구데아가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무릎 위에 에닌누 신전의 평면도가 그려진 서판이 놓여 있고 우측에 눈금이 그려진 자와 첨필도 조각되어 있다.

내용은 닌기르쑤 신전 건립 후 구데아가 조각상을 설치한 뒤 정기적으로 제물을 바쳤다는 말이다. 또한 구데아가 왕위에 등극한 과정과 구데아가 이룬 평화로운 세상, 에닌누 신전 건립에 대한 찬양이 담겨 있다. 
 

<텐트-하피의 미라 형태의 석관> /김서진 기자

텐트-하피의 석관은 고대 이집트 마지막 토착 왕조인 제30왕조 혹은 그리스 지배기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름이 텐트-하피인 여인의 현무암 석관으로 그의 어머니 텐트 제후티의 이름도 함께 기록되었다. 석관의 얼굴은 사실감 있게 묘사했으나 인체 비례에는 맞지 않게 크게 형상화되었다.

석관 주인이 여성인 것을 고려, 통상적으로 턱에 붙이는 오시리스의 수염은 생략되었다. 석관의 바깥쪽과 안쪽은 여러 단을 나누어 성각문자와 이집트의 신들, 석관의 주인과 그의 영혼인 '바'가 새겨져 있다. 망자의 '바'가 분묘를 무사히 통과해 '아크'로서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왼쪽부터 <카노푸스 단지>와 <네페르이브레-사네이스의 파양스 샤브티> /김서진 기자

이집트는 지역적 특성으로 기후가 온난하고 외세의 침입이 적었다. 풍부한 농산물을 바탕으로 오랜 기간 안정적으로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문명 초기부터 축적된 다양한 지식은 서기관과 신관을 통해 수천년에 걸쳐 기록되고 전승되었다. 고대 이집트는 측량, 계산, 치료 등의 실용적인 지식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러한 기록들은 지식의 취합, 확산, 전승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카노푸스 단지는 고대 이집트인들이 죽은 사람을 미라로 제작하며 시신에서 꺼낸 장기를 보관하던 특수 용기다. 일반적으로 용기의 몸체 부분과 뚜껑으로 구성되며 뚜껑은 사람 혹은 동물 형태의 수호신으로 형상화해 만들었다. 이 카노푸스 단지는 신관이었던 프삼테크 멘티의 것이다. 몸체에는 성각문자로 생전에 그가 맡았던 다양한 직함이 새겨졌다. 신전수석재무관, 셈 신관, 미라제작자, 모든 미라 제작소 감독관, 향 담당 신관 등의 직함을 통해 당시 신전의 여러 업무를 관리했던 전문 신관의 업무 범위 등을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로제타석> /김서진 기자

로제타석은 기원전 196년, 그리스 지배기 이집트를 다스려던 프톨레마이오스 5세 에피파네스가 멤피스에게 반포한 왕실 포고문이다. 1799년 7월 중순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군이 북부 삼각주 지대에 위치한 엘라시드에서 상 줄리앙 요새의 확장공사를 진행하던 도중 발견되었다. 발견될 당시 비석의 절반 이상은 이미 파괴된 상태였다. 로제타석의 세 종류 문자는 각각 다른 독자를 대상으로 했다.

성각문자는 프톨레마이오스 5세를 영원히 축복할 이집트의 신과 신관들을 위해, 민용문자는 피지배 계층인 이집트 현지인들을 위해, 그리스문자는 당시 공용문자로 그리스 지배자들을 위해 새겨졌다. 로제타석이 발견되고 20년 후인 1822년, 프랑스의 젊은 언어학자 장프랑수아 샹폴리옹은 서로 다른 언어와 문자를 대조하는 방식으로 특수하게 반복되는 패턴을 찾아 성각문자의 기본적인 체계를 밝혀냈다. 로제타석은 고문자 해독의 역사에서 비석이 차지했던 상징적 지위 덕분에 '미지의 무언가를 해독할 수 있는 열쇠'라는 대중적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드레스덴 문서> /김서진 기자
규모가 꽤 큰 <드레스덴 문서> /김서진 기자

드레스덴 문서는 유럽 침략 이전의 마야문자에 대해 알 수 있는 세 개의 문서 중 하나로 아코디언 형태로 접을 수 있게 되어 있다. 드레스덴 문서, 마드리드 문서, 파리 문서로 각각 불리는 이 문서들은 소장처를 따라 명명되었으며 후고전기에 만들어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당시 멕시코 총독이던 에르난 코르테스가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카를5세에게 바치려 가져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책 대부분이 여러가지 색깔로 그려진 화려한 그림책이었기에 당시 신대륙이라 불리는 곳에 호기심을 갖고 있었던 유럽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인상적이었던 것. 마야의 신관들이 제사를 올릴 때 사용한 일종의 기도서와 같은 역할을 하거나 과학적인 기록을 적었다. 종교적인 행사를 준비할 때 사용하기도 했다. 

드레스덴 문서를 통해 마야인들이 고도로 발달한 수학·과학·천문학적 지식을 갖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숫자 '0'의 개념을 일찍이 사용하고 있었던 흔적과 20진법을 이용해 달력을 계산한 내용 등이 보인다. 현재 침략 이전의 마야에 대해 알 수 있는 단서는 앞서 언급했던 세 개의 문서가 전부다. 하지만 마드리드 문서의 경우 보존 상태가 좋지 않고 파리 문서는 일부분만이 남아 있다. 그에 비해 드레스덴 문서는 현재 남아 있는 3권의 문서 중 가장 양호한 상태로 발견되었고 보존 상태가 좋아 대부분의 내용을 식별할 수 있다. 
 

<세라비트 엘카딤 스핑크스> /김서진 기자

원시나이문자는 1905년 페트리에 의해 이집트 세라비트 엘카딤에서 발견되었고 1916년 가디너에 의해 해독되었다. 가디너는 시나이반도에서 알파벳의 가장 초기 형태가 시작되었다는 가설을 세우고 이 문자에 '원(原)'시나이문자라는 이름을 붙였다. 고대 이집트의 동쪽에 위치한 시나이반도와 팔레스티나 지역에는 셈족이 살았는데, 셈족 노동자들이 기원전 2천년대 초반에 이집트문자의 영향을 받아 쓰기 쉽고 간결한 알파벳 문자 체계를 발전시킨 것으로 추측한다. 원시나이문자는 인류 최초 알파벳의 조상이자 셈어 알파벳의 시초가 되었다. 

이 스핑크스는 원시나이문자가 기록된 가장 오래된 유물이자 최초로 발견된 유물이다. 인류 최초의 알파벳이 쓰인 유물로서 그 가치가 높다. 스핑크스 오른쪽 옆면의 마지막 글자는 소실되었고 원시나이문자의 특성상 몇몇 글자는 판독하기 힘들기 떄문에 정확하게 읽고 해석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스핑크스 오른쪽 어깨에 쓰인 고대 이집트 성각문자는 "터키석의 여주인, 사랑스러운 하토르'로 이 스핑크스를 하토르 여신으로 비정할 수 있다. 
 

<콥트어 오스트라카> /김서진 기자

콥트문자는 1세기 후반부터 11세기까지 콥트어를 기록하기 위해 이집트에서 사용한 문자다. 당시 기독교로 개종한 이집트인들은 성서의 번역 등을 위해 기존에 이집트에서 사용하던 성각문자, 신관문자, 민용문자 체계를 포기했다. 그 대신 그리스문자에 자음 6자를 추가한 콥트문자를 만들었다. 추가한 자음은 이집트어 고유의 음을 표기할 수 있도록 민용문자 체계로부터 변형한 것이다. 이는 한 문화권에서 종교적 이유로 문자 체계가 바뀐 매우 드문 사례다.

이 오스트라카는 고대 이집트의 아메네모페트란 인물이 이집트 테베에 조성한 분묘에서 발견되었다. 아메네모페트는 신왕국 시대 제18왕조의 아멘호테프2세 치세에 총리 대신으로 활동했던 인물로 그의 분묘는 매장지로 사용되지 않고 콥트교 수사들의 은신처로 이용되었다. 이 오스트라카 역시 콥트교 수사 프란제와 이 지역에서 생활했던 수사들이 남긴 것들로 작성된 내용은 대부분 편지글이다.

오스트라카는 개인적 이유로 작성된 서신이라는 점에서 실생활에서 콥트문자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흥미로운 유물이다. 여기에는 고독한 삶을 추구했던 수사들의 생활상과 함께 당시 주민들의 음식·의복·질병·육체노동·여행 등 다방면에서 이들의 생활을 재구성할 수 있는 소중한 단서를 제공한다. 
 

<킬라무와 석비> /김서진 기자

킬라무와 석비는 9세기경 삼알왕국을 다스리던 킬라무와의 업적을 알리는 기념비다. 1902년 독일 발굴팀이 튀르키예 진치를리 회위크의 왕궁 유적에서 이를 발견했다. 석비 상부 왼쪽에 조각된 킬라무와 부조는 왼손에 수련을 들고 오른손으로 상징물들을 가리키고 있다.

이 부조는 아시리아 양식과 삼알 고유의 양식이 공존한다. 석비의 명문은 고대 아람문자로 총 16행이 새겨졌으며 가운데 굵은 선을 기준으로 위아래로 나뉜다. 이 석비는 기원전 1천년대 전반 시리아-팔레스티나 지역의 역사 및 종교적 정보를 담은 사료로서 가치가 있다.

아람문자는 고대 근동 세계에서 공용문자로 사용되었던 문자다. 아람문자를 최초로 사용한 아람인이 육상 무역에 종사하던 상업 민족이어서 교역을 통해 아람문자는 주변 지역에 널리 퍼졌다. 기원전 6세기경에 페르시아제국이 아람어를 국제 공용어로 선포함에 따라 아람문자도 공식 문자가 되어 고대 근동 전역으로 널리 퍼져나갔다. 아람문자는 동방 세계로 전파되어 근동의 히브리문자, 아랍문자 등에 영향을 주었고 아람문자에서 파생된 문자들은 다시 중앙아시아로 전파되어 소그드문자, 고대 튀르크문자 등의 기원이 되었다.  
 

<마하박가패엽경> /김서진 기자

이 패엽경은 총 121매의 폴리오로 구성되었으며, 스리랑카의 싱할라문자로 앞뒷면에 약 10줄씩 기록되었다. 이는 야자나무 잎을 종이처럼 재단한 다음 날카로운 철필로 긁어 내용을 적은 전형적인 패엽경의 모습을 보여준다. '패엽'이라는 말은 본래 잎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빠뜨라'를 음사한 것이다. 이 패엽경은 불교 수행자들의 계율을 담고 있는 율장 가운데 『마하박가』의 후반부를 담고 있다. 이 필사본은 패엽경의 물리적 형태 및 제작 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흔적이 잘 남아 있다.  

동남아시아는 지리적으로 크게 인도차이나반도와 말레이 제도로 나뉘는데, 동남아시아는 고대부터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여러 민족의 문화, 종교, 언어가 공존하며 다양한 문자가 탄생했다.

인도에서 유입된 남부 브라흐미문자는 동남아시아의 각 지역에 따라 일정한 형태의 변화를 거치면서 여러 문자로 발전했다. 이 브라흐미문자로부터 파생된 문자들은 고대의 동남아시아 언어들, 즉 지금의 베트남에 해당하는 참파왕국의 참어, 미얀마와 타이의 몬어, 캄보디아의 크메르어, 인도네시아의 자바어 등을 표기하는 문자로 발전했다. 
 

<람캄행왕 비문> /김서진 기자

람캄행왕 비문은 타이문자로 새겨진 최초의 비문이다. 람캄행은 수코타이왕조의 3대 왕으로 1283년에 타이문자를 만들어냈다고 알려져 있다. 이 비문은 돌기둥 4면에 새겨져 있으며 1면의 1행부터 18행의 첫 단어까지는 왕실의 이력을 기록하고 있다. 1면 18행부터 4면 11행의 다섯번째 단어까지는 당시의 정치와 경제, 사회와 법제도, 문화와 풍습, 종교와 신앙에 대한 서술이다. 나머지 부분은 람캄행왕의 위업을 칭송하고 있다.

비문의 내용에 불교의 가르침을 기반으로 어버이의 마음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온정주의적 국왕의 면모가 잘 드러나 있다. 기록 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타이에서 13세기의 역사 기술은 몇 안 되는 비문에 의존하고 있다. 수코타이 역사를 '비문 속의 역사'라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 비문은 문자형이 뚜렷하게 남아 있고 수코타이왕조의 상황을 다방면에서 다루고 있어 타이 역사 연구에 가장 중요한 사료로 꼽힌다. 
 

<미야제디 석주> /김서진 기자

미야제디 석주는 야자꾸마가 그의 아버지 짠싯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문이다. 석주의 4면에 버마어, 쀼어, 몬어, 팔리어 등 총 4가지 언어로 기술되었다. 이를 통해 당시 여러 언어군의 종족들이 공존했음을 알 수 있다.

비문에 따르면 1112년 야자꾸마는 아버지 짠싯따왕이 임종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영주로 있던 북부 친에서 바간으로 내려온다. 그리고 과거 생모 땀불라의 유품과 토지를 정리하고 짠싯따의 쾌유를 비는 마음을 담은 금불상을 제작해 바치지만 아버지는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한다. 이에 그는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과 그의 치적을 담은 기념비를 세웠다.

비문의 완성 연대는 미얀마력 475년으로 이 기록은 최초의 버마어 표기이자 바간 왕조의 역사, 문화, 종교적인 내용을 함께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미야제디 비문의 버마 문자는 안정적인 몬문자 표기와는 달리 불안정한 형태다. 같은 단어라도 표기의 통일성이 없고 오타들이 그대로 기록되었다. 또한 동일한 뜻의 조사 형태도 일부는 몬문자로, 일부는 버마 문자로 표기된 점을 통해 몬문자를 거쳐 버마문자로 자리잡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김승영 <바벨탑> /김서진 기자
바벨탑의 꼭대기를 올려다봤을 때 /김서진 기자

김승영은 물의 작가, 성찰과 사유의 공간을 작품으로 보여주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1980년 후반부터 물, 이끼, 숯, 돌, 낙엽, 냄새 등을 비롯한 자연 재료와 함께 빛과 음향, 사진 기계장치 등의 다양한 매체로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자아정체성과 존재에 대한 탐구는 1997년 이후 인간관계와 사회에 대한 관심으로 작품 세계를 확장시켰다.

1999년 뉴욕 P.S 1 MoMA 국제레지던시 참여 후 다양한 언어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한 인간의 소통과 욕망,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잊혀져 가는 사물에 새로운 형태와 의미를 부여해 삶의 흔적을 공간에 투영시켜 깊은 성찰의 공간을 보여주고 있다. 세계문자박물관에 설치된 작품 <바벨탑>은 성경에 나오는 인간의 욕망과 언어의 기원을 보여주는 바벨탑의 형상을 여러 국가에서 만든 다양한 형태의 스피커로 작품을 제작했다.

지금까지의 전시는 프롤로그와 1부에 불과하다. 2부는 훨씬 더 많은 유물들과, 그에 대한 설명들이 기다리고 있다.
 

2017년 내내 뜨거운 감자였던 전안법은 현실과 다른 불합리함으로 수공예 작가들의 목을 죄어오는 올가미 같았습니다. 극적으로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많은 작가들이 한숨 돌릴 수 있게 됐지만 아직 바뀌어야 할 부분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핸드메이커는 이러한 불합리에 ‘NO’를 외치기 위해 시작됐습니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은 정말 매력적인 일입니다. 그들은 실을 꿰 엮기도, 펜과 물감 으로 그리기도, 흙을 빚어내기도, 금속을 녹여 두드리기도, 정성스런 요리를 만들어 내기도 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만들고 있는 세상을 함께 들여다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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