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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스케치] 조선시대, 다양한 계층에 분포해 활동했던 여성들의 묵묵한 삶 《한양 여성, 문 밖을 나서다-일하는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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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스케치] 조선시대, 다양한 계층에 분포해 활동했던 여성들의 묵묵한 삶 《한양 여성, 문 밖을 나서다-일하는 여성들》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3.05.15 15: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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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여성, 문 밖을 나서다-일하는 여성들> /서울시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서울역사박물관은 서울역사문화특별전 《한양 여성, 문 밖을 나서다-일하는 여성들》을 10월 3일까지 기획전시실(1층)에서 개최한다. 

조선시대 한양에는 내명부의 수장인 왕비부터 혜민서 의녀 등 관청에서 일하는 여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신분 계층의 여성들이 도성 안팎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이들은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국가 체제 안정에 이바지했다.

뿐만 아니라 사회가 강요하는 유교적 여성관에 매몰되지 않고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는 종교 활동과 가계 살림에 보탬이 되는 상업활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듦으로써 한양이라는 도시공간을 더욱 활기찬 삶의 공간으로 바꾸어 놓았다. 
 

'규문 안에서' /김서진 기자

조선시대 여성 생활 공간은 신분이 높을수록 제한되었는데 이러한 공간은 규문 안 규방으로 대표된다. 어려서부터 규방에서 『예기』, 『소학』, 『내훈』등 여러 규범서를 통해 유교적 여성관에 맞는 교육을 받았고 출산·육아·자녀교육·부모공양·가정관리까지 생활과 관련된 모든 일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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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은 혼인 이후에도 규방에 머무르면서 길쌈을 통해 가족의 옷을 만들고 음식을 만들어 손님을 맞고 제사를 도왔다. 이와 함께 가계 경영도 맡아 집안에서 보유한 토지와 노비를 관리해 가계 수입을 늘리는 데 매진하기도 했고 이 역시 규문 안에서 이루어졌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여성의 바깥출입이 활발해지고 평민과 천민 여성들에 대한 규제도 비교적 덜 엄격해지기 시작했다. 
 

약저울 /김서진 기자
의녀가 썼던 도구들 /김서진 기자

의녀는 태종 때 여성을 진료하기 위해 생긴 직업이다. 지방의 어린 비녀 중 영리한 아이는 한양으로 보내 천자문을 시작으로 진맥과 침술, 약 제조 등을 교육했다. 이렇게 배운 내용을 정기적으로 평가해 상벌을 내리고 맥의녀, 침의녀, 약의녀로 구분했다. 의녀는 여성을 대상으로 진맥과 시침을 했지만 처방은 의원이 맡았다. 외에도 여성 관련 범죄 수사나 궁중 행사에도 동원되었고 악기와 춤을 익혀 기녀로 일하기도 했다. 
 

궁에서 일한 여성들 /김서진 기자

궁녀는 궁에서 일하는 여성으로 크게 내명부 품계를 받는 여관과 그렇지 않은 여종으로 구분된다. 여관은 상궁과 나인이 있으며 여종은 여관 밑에서 그들을 돕는 하인인 비자, 방자, 무수리 등이 있었다. 여관은 궁궐 안 대전, 세자궁, 대비전 등과 궁궐 밖 별궁에 소속되어 육아, 바느질, 자수, 요리, 세탁 등 가사 업무와 재산 관리, 행사 운영 등을 맡았다. 궁녀는 나이가 들어 일을 할 수 없거나 모시던 상전이 죽게 되면 궁에서 나올 수 있었다. 
 

혜경궁 홍씨가 받은 밥상 /김서진 기자
유기 13개 그릇에 담긴 음식들 /김서진 기자

1797년 윤 2월 9일 정조와 함께 화성능행에 나선 혜경궁 홍씨는 배다리를 건너 노량진에 도착한다. 여기서 혜경궁 홍씨는 아침 수라상으로 흑칠을 한 원반과 협반에 각각 유기 13개, 화기 3개에 담긴 음식을 받았다. 
 

'도성 안에서 일하다' /김서진 기자

한양에는 여성들이 운영하는 시전인 여인전들이 있었다. 여인전에서 판매하는 물건들은 여성 소비와 관련되어 있었다. 여인전은 규모가 작고 영세해 국역을 부담하지 않는 무푼전이었지만 그곳의 상인들은 각 관청의 잡역에 동원되거나 각종 물건을 바쳐야 했다. 외에도 장도, 비녀 등을 판매하는 도자전과 가체를 파는 체계전 역시 여성과 관련된 물품을 팔았지만 여인전은 아니었다. 
 

화장도구 /김서진 기자

분, 연지, 색실 등을 팔았던 분전은 방물전이라고도 했는데 지방에는 방물장수가 오가며 물건을 팔았지만 한양에는 따로 가게가 있었다. 도성 안팎으로 내분전과 외분전이 있었는데 내분전은 종각과 영희전 동쪽에, 외분전은 서소문 밖에 있었다. 

조선시대 여성들은 화장을 할 때 분, 연지, 눈썹먹을 사용했다. 분은 쌀, 기장, 분꽃씨 등으로 만들었으며 연지로는 홍화를 사용했다. 
 

다양한 족두리 /김서진 기자
족두리와 족두리 부속 /김서진 기자

조선시대 여성 예복에 갖추어 쓰던 관이다. 조선 초기에는 크기가 크고 높은 형태였으나 점차 작아졌다. 영조 이후 여성들의 사치를 막고자 가체를 금지하고 족두리 사용을 장려했지만 여성들은 족두리에도 장식을 달아 화려하게 꾸몄다. 족두리전은 근처 의전, 면주전에서 산 재료로 직접 족두리를 만들어 팔았던 것으로 보인다. 
 

빗과 빗치개 /김서진 기자

상전은 여인전은 아니었으나 여성과 관련된 참빗, 얼레빗, 면빗등을 팔았으며 상 위에 물건을 벌여놓고 판다고 해 상전이라 하였다. 

조선시대에 사용된 빗에는 얼레빗, 참빗, 음양소 등이 있다. 여성들은 달 모양의 성긴 얼레빗으로 머리를 대강 빗은 다음 살이 촘촘한 참빗을 이용해 머릿결을 다듬었다. 빗치개는 머리에 가르마를 타거나 빗살 사이에 낀 때를 빼는 도구로 머리 장식으로도 사용했다. 
 

비녀 /김서진 기자

도자전은 여성 상인이 운영하는 곳은 아니었지만 장도, 비녀, 노리개 등의 패물을 포함한 여성들의 물품도 취급했다. 비녀는 여성의 쪽 진 머리가 풀어지지 않도록 꽂거나 관이나 가체를 머리에 고정하는 장신구다. 금, 은, 소뿔, 나무 등이 재료로 사용되었고 비녀 머리 부분은 용, 봉황, 원앙, 대나무, 국화, 호도, 콩 등의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봉잠, 금비녀, 옥비녀, 진주비녀 등은 신부 외에 착용을 금지했다. 
 

조선 시대 왕비의 뒷모습 /김서진 기자

농경국가인 조선에서 왕과 왕비는 농업을 장려하기 위해 직접 농사짓고 누에를 치는 친경례와 친잠례를 실시했다. 왕비의 친잠례는 조선시대에 8번에 걸쳐 궁궐 안에서 행해졌다. 친잠례에서 왕비는 양잠의 신인 서릉씨에게 제사를 지낸 후 뽕잎을 따 누에에게 먹였으며 이후 누에가 뽑은 실로 제복을 지어 왕이 이를 입고 제사를 지냈다. 왕비가 주체가 되는 거의 유일한 의례인 친잠례에는 백성들이 길쌈을 통해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고 여성으로 지녀야 할 덕목을 깨닫기를 바라는 뜻이 담겨 있다. 
 

'경직도' /김서진 기자

농사와 함께 누에 치고 비단 짜는 일을 그린 것으로 『시경』의 「빈풍칠월편」에서 유래했다. 오른쪽부터 누에고치를 떼어내는 하족, 고치에서 누에나방이 나오는 잠아, 실을 뽑는 연사, 비단으로 옷을 짓는 성의 순으로 그려져 있다. 
 

'도성 밖 여성들의 염원' /김서진 기자

한양은 유교국가인 조선의 수도로서 유교의 왕도정치가 시범적으로 실현되는 순수한 공간으로 여겨졌다. 이에 따라 불교와 무속 문화로부터 왕도를 보호하기 위해 도성 안 승려의 출입과 무녀의 거주를 법적으로 금지하였으며 여성이 사찰에 가는 것 역시 금지했다.

그러나 조선 전기 도성 안에는 많은 사찰이 있었으며 이 중 일부 비구니 사찰에는 왕실 여성들이 계속해서 출가했다. 무녀의 경우 도성 밖 활인서에 소속되어 인근에 살며 도성 안 병자들을 돌봤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사찰들이 도성 밖으로 밀려나면서 여성들은 도성 밖 사찰을 기도처로 방문했고 왕실 여성들은 전국 곳곳의 사찰에 불사를 이어 나갔다. 
 

수성구지 /김서진 기자

인왕산 기슭에 있던 수성궁 옛 터를 그린 것이다. 옥류동천과 백운동천이 합류되는 지점으로 왕실 여성들이 출가한 수성궁과 자수궁이 위치했다. 자수궁은 태조 아들 이방번의 집이었으나 세종의 출가한 후궁들에게 내려진 뒤 비구니 사찰이 되어 자수원으로 불렸다. 

조선 초 도성 내에는 흥천사, 원각사 등의 대규모 사찰들이 있었다. 비구니 사찰인 정업원, 인수원, 자수원에는 왕이 죽은 후 남겨진 후궁이나 권력에서 밀려난 왕실 여성들, 늙은 궁녀들이 출가했다.

16세기 이후 사찰은 점차 도성 밖으로 밀려났다. 왕실 여성들은 한양 인근은 물론이고 전국 각지의 사찰의 불사를 통해 왕실의 번영을 빌었으며 한양 여성들은 도성 인근 사찰에 찾아가 가족의 안녕, 죽은 가족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다음 생에는 남성으로 태어나 진리를 얻기를 빌기도 했다. 
 

남양주 수종사 팔각오층석탑 발견 불상 /김서진 기자

1493년과 1628년 두 차례에 걸쳐 왕실 여성들이 발원한 불상이다. 1493년에는 태종의 후궁 명빈 김씨와 성종의 후궁 숙용 홍씨 등이 왕실의 안녕과 백성의 안정을 위해 함께 발원하였고 1628년에는 폐위에서 복위된 인목대비가 아버지 김제남과 아들 영창대군의 극락왕생을 위해 23구의 불상을 조성했다. 
 

왼쪽부터 호구아씨, 중불사, 창부광대씨 /김서진 기자

한양 무녀들은 무적에 등재되어 무세를 부담했다. 이와 함께 한양에 사는 가난한 백성들의 구제와 치료를 맡은 관서인 활인서에 소속되어 병자들을 돌봤다. 활인서는 도성 밖에 위치하여 전염병이 도성 안으로 유입되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조선 초 혜화문과 서소문 밖에 있던 것이 19세기 들어 시구문으로 불리던 광희문 밖으로 옮겨졌다. 활인서 주변에는 공동묘지나 사형장 등이 위치했는데 이 근처에 무녀들이 모여 살며 죽은 혼령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천도굿등을 지냈다. 
 

무당내력 /김서진 기자

서울굿 중 서대문 밖에서 주로 행해진 굿거리 절차를 그림과 함께 설명한 것이다. 무관과 관련된 신을 모시는 장면을 그린 장군거리에서 무녀는 무복인 청철릭을 입고 언월도와 삼지창을 들고 있다. 
 

'삼불사할머니'와 금성당 무구 (신칼, 무당방울, 등채) /김서진 기자

금성당 본당의 무신도 중 하나로 삼불사할머니는 수명과 복을 관장하며 아기를 점지해 주는 신이다. 금성당은 은평구 진관동에 있으며 세종대왕의 여섯째 아들로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죽음을 당한 금성대군을 모신 굿당이다. 금성당은 1880년대 초반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벽에는 여성들의 생활상을 그림으로 볼 수 있다 /김서진 기자

18세기 한양에는 약 30만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며 그중 절반은 여성이었다. 도성 안에는 궁궐 안 왕비부터 시전의 여성 상인, 관청의 여종까지 거의 모든 신분에 해당하는 여성들이 살았다. 이 중 왕비는 왕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도록 돕고, 누에를 먹일 뽕잎을 직접 따는 친잠례를 통해 길쌈을 장려하는 등의 모범을 보였다.

관비 중 일부는 궁중을 보살피는 궁녀 또는 병든 여성을 치료하는 의녀가 되었으며 도성 곳곳의 시전에서는 여성 상인이 가계 경영을 위해 과일, 채소, 족두리, 화장품 등을 팔았다. 이렇듯 도성 안 다양한 계층의 여성들은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곳곳에서 일하며 조선의 수도 한양을 지탱하고 움직이는 역할을 했다. 

김용석 서울역사박물관장은 "이번 전시를 통해 규문 안 여성부터 도성 안팎에서 활동했던 여성들의 일과 삶을 살펴보길 바란다"라고 전했다. 전시는 개천절인 10월 3일까지 5개월간 서울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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