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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스케치] 한양도성의 북문 숙정문의 역할과 변화상을 알아보는 특별한 전시, 한양도성박물관 《숙정문 : 폐쇄된 성문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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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스케치] 한양도성의 북문 숙정문의 역할과 변화상을 알아보는 특별한 전시, 한양도성박물관 《숙정문 : 폐쇄된 성문을 열다》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3.05.1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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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정문 : 폐쇄된 성문을 열다> /김서진 기자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서울역사박물관은 2023년 한양도성박물관 상반기 기획전  《숙정문 : 폐쇄된 성문을 열다》를 9월 10일(일)까지 한양도성박물관 2층 기획전시실에서 개최한다.

한양도성박물관에서는 2017년부터 매년 도성의 여덟 성문을 주제로 기획전시를 개최하고 있다. 올해는 그 일곱 번째 전시로 한양도성의 북문(北門) 숙정문(肅靖門)에 대한 전시를 준비하였다. 전시는 〈폐쇄된 성문〉, 〈숙정문과 기후 의례〉, 〈다시 열린 성문〉 등 세 부분으로 구성하였다.

자본주의 산업화 이전의 도시들은 대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인류가 수천 년 전부터 지표상의 특정 공간을 성벽으로 둘러싼 것은 성벽 안쪽이 특별한 기능과 상징성을 가진 영역임을 표시하고 그 영역을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맥락에서 한양도성을 처음 축조할 때 도평의사사에서도 "성곽은 안팎의 경계를 엄격히 하고 나라를 굳건히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도성이란 왕이 거처하는 성으로서 여러 성 중 으뜸가는 성, 모든 국가 기능이 집중된 수도를 의미한다. 
 

한양도성 순성길은 총 여섯 구간으로 나뉜다 /김서진 기자

〈폐쇄된 성문〉 부분에서는 한양도성의 정북(正北)을 지키는 문으로 건설되었던 숙정문이 폐쇄된 이유와 이후 달라진 위상 및 성문 관리·운영 방식의 변화 등을 소개한다. 옛 숙정문의 모습을 묘사한 「도성도(都城圖)」, 「한양도(漢陽圖)」 등의 고지도와 각종 문헌 자료들이 전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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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성길은 창의문에서 백악산을 넘어 혜화문에 이르는 구간, 혜화문에서 낙산을 지나 흥인지문까지 이어지는 구간, 흥인지문에서 광희문을 지나 장충체육관에 이르는 구간, 장충체육관 뒷길에서 남산공원까지 이어지는 구간, 남산의 백범광장에서 돈의문 터까지 이어지는 구간, 돈의문 터에서 시작해 인왕산을 넘어 윤동주 시인의 언덕까지 이어지는 구간 등 총 여섯 구간이다. 
 

순성길과 관련 설명을 볼 수 있다 /김서진 기자
혜화문 /김서진 기자

한국인들은 고대부터 산의 능선에 성을 쌓는 축성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한양도성은 이를 계승해 자연에 대한 개입을 최소화하면서도 위엄과 효율을 극대화했다. 도시의 외곽선이 자연의 선형에 따라 결정되었기 때문에 내부의 가로 체계와 도시 구조도 자연의 형상과 조화를 이루었다. 이는 대로를 중심으로 인위적이며 기하학적인 도로망을 형성한 동시대 아시아 도시들과 확연히 다른 점이다.

한양도성은 다양한 지형과 지질에 따라 서로 다른 축성 기법을 사용했으며 무너진 구간을 보수할 때마다 진전된 기술을 도입했으니 한국 축성 기술의 발전 과정을 아로새긴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또 출입, 보수, 관리, 순찰 등과 관련한 노동, 놀이, 예술의 배경이자 무대이기도 했다. 서울이 팽창하기 시작한 뒤 성벽 주변에 생긴 마을들은 오래된 문화유산과 공존하는 현대적 생활 양식을 보여준다. 
 

해당 모니터로 볼 수 있는 각자성석 /김서진 기자

각자성석은 글자를 새긴 성돌로 요즘 말로 '공사 실명제'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각자성석은 삼국시대 고구려 평양성에서 발견된 것이다. 한양도성의 전 구간에 걸쳐 300여 개가 발견되었다. 한양도성의 각자성석은 시대별로 다르게 나타난다. 태조대에는 천자문 자호와 소구간을 표시하는 숫자를, 세종대에는 군현의 이름을, 조선 후기에는 공사시기·담당 군영명·공사 책임자·공사 감독자 등을 새겼다.

각자의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군영등록 등 국가기록문헌의 내용과 일치하므로 한양도성의 구간별 축성 시기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또한 조선시대 도성 관리의 철저함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기록과 유물이 일치한다는 점에서 한양도성의 역사적 가치를 증명해 준다.  
 

『향산문집』 조선 말 경상북도 안동 출신 이만도가 남긴 글을 모아 간행한 문집. 1916년 그의 조카인 이중철과 이강호 등이 편집·간행했다. 권1에 수록된 「북문제영」은 숙정문에서 기청제를 지낼 때 지은 시이다 /김서진 기자

〈숙정문과 기후 의례〉 부분에서는 조선시대 가뭄과 홍수를 막기 위해 치러졌던 기우제(祈雨祭)와 기청제(祈晴祭)를 통해 숙정문의 역할을 살펴본다. 기우제 및 기청제 예법과 절차를 규정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비롯하여 『문헌통고(文獻通考)』, 『향산문집(響山文集)』등의 유물과 관련 영상들이 함께 전시되어 관람객들의 이해를 도울 예정이다.

비가 올 때까지 몇 번이고 다양한 의례 양식을 반복했던 기우제와 달리 기청제는 홍수의 상황에서 지체 없이 단순한 형태의 의례를 신속하게 치르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기청제의 여러 양식 중 성문에서 거행되던 제사를 '영제'라 한다.

조선시대에는 『국조오례의』에 규정된 '구우영제국문의'에 따라 국초부터 숙정문을 비롯해 숭례문, 흥인지문, 돈의문 등 네 국문에서 거행하는 사문영제가 시행되었다. 제사의 규모로는 소사에 속하며 별도의 제단 없이 문 위에 임시로 해당 방위 산천의 신위를 설치하고 산천이 있는 곳을 향해 지내는 망제 형식을 취했다. 의례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문의 개폐는 자유롭지 못했으며 승정원의 통제를 받았다. 

'한양도' 위백규의 『환영지』에 실린 지도를 모본으로 제작한 지도. 궁궐, 성곽, 문루 등 도성 안 주요 시설들과 한강, 청계천, 북한산, 백악산, 인왕산 등 도성 밖 지형지물을 간결하게 묘사했다. 도성의 여덟 성문 중 유일하게 문루가 없는 형태로 그려진 숙정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김서진 기자

여러 날 비가 오지 않아 나라에 큰 가뭄이 들면 숭례문을 닫고 숙정문을 열었다. 이것은 『문헌통고』 「도우」에 기록된 동중서의 기우하는 방법 - 남문을 닫고 북문을 열어 놓는다- 을 따른 것이다. 양의 기운이 너무 강해 가뭄이 발생했으니 양을 억제하고 음을 보충해 비를 맞이하려는 음양론적 논리인데 남쪽의 숭례문이 양기, 북쪽의 숙정문이 음기에 해당한다. 1474년 예조에서 정리해 올린 기우의례의 9개 조목에 '북문을 열고 남문을 닫는 절차가 포함되었다. 이후 1704년 마련된 기우제의 12차 단계에서는 11차에 '남문을 닫고 북문을 열며 시장을 옮긴다'로 확대되었다. 

조성 이후 대부분 폐쇄된 상태가 유지되었던 숙정문에는 다른 문들에 비해 적은 숫자의 수문군이 배치되었다. 1751년 반포된 『수성윤음』에 따른 삼군문 -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의 도성 방어구역에 따라 조선 후기 숙정문의 관리는 훈련도감이 담당했다. 『만기요람』「군정편」에 의하면 숙정문의 수문군 인원은 2명이다. 훈련도감이 담당하던 또다른 성문인 돈의문과 창의문의 수문군이 6명이었던 것에 비하면 그 수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 또 항상 닫아두어 북문의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창의문, 소의문, 광희문과 함께 도성의 간문으로 분류되어 표신만을 사용해 유사시 여닫았다. 
 

『경도잡지』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이 지은 세시풍속지. 서울의 문물 제도와 풍속, 연중 행사 등을 기록했다. 제2권 '세시'에서는 정월대보름에 숙정문을 오가는 도성 내 부녀자들의 풍습에 대해 소개했다 /김서진 기자

숙정문은 1413년 창의문과 함께 폐쇄되었다. 두 문으로 통하는 길을 막아 경복궁의 지맥을 온전케 하기 위함이었다. 그 결과 숙정문은 국가적 공역이 있을 때를 제외하면 철저히 일반의 출입이 금지된 문으로 남았다. 창의문이 이후에 북교로 나가는 왕의 행렬, 혹은 조지서, 총융청, 평창 등을 드나드는 관원·군인들의 통로로 활용되었던 것과 대조적이다. 또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는 숙정문 폐쇄의 이유를 성안 남녀 간의 음란한 풍조를 막기 위해서였다고 전한다. 정월 보름 전에 이곳을 다녀가면 액땜을 할 수 있다는 속설에 따라 부녀자들의 출입이 많았는데 여기에 남자들도 모여들어 풍기가 문란해지자 문을 닫았다는 것이다. 
 

‘다시 열린 성문’ /김서진 기자

〈다시 열린 성문〉 부분에서는 해방 이후 한양도성의 보수·복원 과정에서 문루 재건과 함께 복원되고 시민에게 개방되기까지 현대사 속 숙정문의 변화를 소개한다. 숙정문 복원 및 개방과 관련된 각종 문서와 도면 등이 함께 전시된다.

오래된 성곽 도시들에게 근대화란 인구 증가에 따라 도시 공간이 성벽 밖으로 팽창하고 새로운 교통수단이 등장하여 도로가 신설·확장되며 신무기 개발로 인해 성벽의 군사적 가치가 감소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전 세계 많은 도시들의 성벽이 근대화 과정에서 헐렸고 한양도성 역시 근대도시 성곽의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서울의 근대도시화는 외세의 침탈과 맞물려 있었다. 한국을 강점한 일본은 평지의 성벽을 조직적으로 허물었으며 수백 년간 서울의 상징 구실을 한 성문들을 철거하거나 방치했다. 일본 신토 사원인 조선신궁을 건립하면서 남산 일원의 성곽을 훼손했고 경성운동장을 지으면서 동대분 주변의 성곽을 무너뜨렸다. 한양도성은 존엄한 땅을 표상하는 상징물에서 망국의 아픔을 드러내는 폐허로 바뀌었다. 
 

'조선신궁' 남산에 자리잡은 조선신궁의 모습. 신궁과 참배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한양도성의 성벽이 크게 훼손되었고 숭례문 앞에는 조선신궁참도라고 새겨진 대형 석등을 세웠다 /김서진 기자
'한양도성 복원공사 사진' 서울시 문화공보실에서 촬영한 1970년대 한양도성 복원공사 모습. 1975년부터 시작된 '서울성곽 정화사업'의 면면을 확인할 수 있다 /김서진 기자

1945년 8월 15일, 한국인들은 일본의 식민통치에서 해방되었지만 곧바로 자주적 정부를 세울 수는 없었다. 한동안 혼란이 계속되었고 외국으로 나갔던 사람들이 귀환해 서울에 정착했다. 일본인들은 물러갔으나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들어왔기 때문에 서울의 주택은 이들을 모두 수용할 수는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성벽 주변에 굴을 파거나 토막을 짓고 거주했다.

6·25전쟁 중에는 서울역과 가까운 남산 일대에 공중폭격이 집중되어 숭례문이 일부 파손되었고 성벽 일부 구간은 시가전 와중에 총탄 세례를 받기도 했다. 휴전 후에는 월남민과 상경민들이 성벽을 훼손하면서 판잣집을 지었다. 현재 성벽 주변에 있는 마을들은 대개 휴전 직후에 형성되었다. 1953년부터 서울 복구 사업에 착수한 정부는 그 해에 숭례문을 보수했으나 한양도성의 전 구간을 보수할 여력은 없었다. 
 

'한양도성 보수공사 도면' 태창건축사사무소에서 작성한 한양도성 보수공사 설계도. 삼청지구 및 청운지구 성곽의 보수에 대한 내용으로 보수해야 할 구간을 표시하고 성돌 가공과 쌓기 등 보수 방식에 대한 설명을 도면에 상세히 기록하였다 /김서진 기자

한양도성은 1936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고적으로 지정되었으나 도성을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인식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더구나 해방 직후의 혼란과 전쟁을 겪으면서 피폐해진 생활과 의식, 전통문화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태도 등은 도성 보존에 적대적인 환경을 조성했다. 민간인들이 집을 지으면서 성벽을 축대로 사용하는 일은 일반적이었고 정부나 교육기관, 종교 단체마저 성벽을 훼손하면서 건물을 짓거나 도로를 만들곤 했다. 혜화문 옆의 성벽은 고등학교의 축대가 되었고 남산 성벽 주변에는 자유센터, 타워호텔, 외인아파트 등의 대형 건물이 건립되었다. 수많은 성돌이 이들 건물의 축대를 쌓는 데 사용되었다. 세조 때 신설되었다가 폐쇄된 남소문 터는 도로공사로 깎여 나갔으며 광희문은 제자리에서 남쪽으로 15미터 옮겨 복원되었다.

1962년 1월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었고 이에 따라 숭례문은 국보, 흥인지문은 보물, 한양도성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사적으로 지정된 이후에도 한동안 도성의 훼손은 지속되었다. 한양도성에 대한 인식이 바뀐 것은 1968년 1월 21일 북한군 특수부대가 서울까지 침투하여 백악 성벽 주변에서 국군과 총격전을 벌이는 사건이 발생한 뒤였다. 정부는 이 사건 직후 숙정문을 보수했으며 서울시에 '서울성곽복원위원회'와 '서울성곽복원사업추진본부'가 구성되어 멸실된 구간의 성벽을 새로 쌓고 무너진 부분을 보수하는 공사를 시작했다. 
 

도성을 복원한 사람들 /김서진 기자

1970년대 '서울성곽 정화사업'을 시작으로 한양도성 보수·복원 사업이 꾸준히 진행되었다. 한양도성의 보수·복원에는 초기 사업 계획을 수립·추진하는 담당 공무원부터 자문위원, 건축가, 석수, 목수, 와공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가 참여했다. 국가 및 서울시는 보수·복원을 위한 기본계획 및 실행 계획을 수립하고 자격을 갖춘 문화재 전문 업체를 선정해 보수·복원 사업을 진행했다.

수립된 계획 아래 건축가는 보수·복원 공사를 위해 현장 실측 및 설계를 담당하고 문화재 시공 전문 업체의 석수가 석재의 채취, 운반, 가공, 성곽 쌓기를 담당했다. 성문과 문루 공사에는 목재를 가공하는 목수와 기와를 설치하는 와공 등이 참여했다. 이 밖에도 보수·복원 공사를 감독하는 현장 감독관과 문화재 전문위원이 자문으로 참여하는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및 기술자가 한양도성의 보수·복원 사업을 수행했다. 
 

'돌거북' 오간수문 물가름돌 위에 설치되었던 거북 모양의 석수. 2003년 청계천 복원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발굴되었다. 물가름돌은 성 밖으로 빠져나가는 물의 압력으로부터 수문 통수부의 간벽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오간수문에는 총 네 개가 설치되었고 좌우 양쪽 끝의 물가름돌 위에 돌 거북을 하나씩 두었다 /김서진 기자
'진단구' 남산 백범광장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도기호와 접시, 성곽 외부 수혈에서 발굴되었다. 진단구는 건물을 지을 때 땅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땅에 묻는 매장품이다. 나쁜 기운을 그릇에 가두고 빠져나오지 못하게 막는다는 의미로 묻어둔 것으로 추정된다 /김서진 기자

1993년 북한군 특수부대의 서울 침투 이후 25년 만에 인왕산 성벽 주변 지역에 대한 민간인 출입 금지 조치가 해제되었다. 2007년에는 숙정문과 백악 주변 성벽도 민간인에게 개방되었고 서울 시민들은 한양도성 전 구간을 둘러보며 옛 순성놀이의 정취를 되살릴 수 있게 되었다.

2008년 동대문운동장을 철거하는 과정에서 이간수문을 비롯한 성곽 유구가, 2013년에는 회현동 남쪽의 남산 기슭에서 성벽의 판축과 기초부가 양호한 상태로 발굴되었다. 한양도성은 2012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되었으며 2013년부터 매년 한양도성문화제가 열린다. 해방 이후 성벽 주변에 형성된 마을들도 옛 성벽의 현대적 이용 사례를 보여주는 문화유산으로 파악해 서울시와 마을 주민들이 바람직한 보존과 관리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창의문과 숙정문 /김서진 기자

한양도성의 참모습을 확인하려는 진지한 노력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시작된다. 1999년 주한러시아대사관 건립 예정부지에 대한 유적 시굴조사를 시작으로 숭례문 주변, 정동 일대, 장충동 일대, 남산 백범광장 등지에서 시굴과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조사를 통해 땅 밑에서 수백 년간 성벽을 지탱해 온 기초 부분의 실체가 드러났고 지형과 지질에 따른 축성 기법의 차이도 확인할 수 있었다.

한양도성이 자연과 한 몸이 된 것은 성을 쌓은 사람들이 성 쌓을 자리의 자연조건에 가장 잘 부합하는 재료와 기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지상부에서는 완전히 멸실되어 흔적조차 남지 않았던 성벽 선을 다시 찾은 것도 큰 성과였다. 10여 년간 틈틈이 진행된 발굴조사 결과 한양도성의 완전성을 이해하고 진정성 있는 보존 방안을 마련할 수 있는 단초가 열렸다. 지하에 있는 유구 또한 한양도성의 일부라는 사실을 함께 인식하고 보존할 방도를 찾는 것이 남은 과제다.
 

전시 전경 /김서진 기자

숙정문은 조선 초 한양도성의 북문으로 건설되었으나 항상 닫아 두었던 까닭에 실제 성문의 역할은 하지 못했던 문이다. 다른 성문들이 도성과 주요 간선도로가 만나는 접점에 있었던 것과 달리 백악산 험준한 자락 가운데 위치한 숙정문은 접근성이 좋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농사가 국가 경제의 근본이었던 조선에서 강우와 관련된 의례를 행함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문이었다.

나라에 가뭄이 심하거나 장마가 지속될 때 옛 조상들이 찾았던 풍수적 해법에는 항상 숙정문이 있었다. 전시 관계자 측은 "이번 전시는 수도 성곽의 성문으로 조성되었으나 정작 출입 기능은 하지 못했던 숙정문의 역할과 위상에 대해 살펴보는 자리를 마련했다"며, "오랫동안 닫혔다가 이제 한양도성을 순성하러 백악 구간을 오르는 누구에게나 열린 숙정문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고 전했다. 전시는 9월 10일까지.

 

2017년 내내 뜨거운 감자였던 전안법은 현실과 다른 불합리함으로 수공예 작가들의 목을 죄어오는 올가미 같았습니다. 극적으로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많은 작가들이 한숨 돌릴 수 있게 됐지만 아직 바뀌어야 할 부분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핸드메이커는 이러한 불합리에 ‘NO’를 외치기 위해 시작됐습니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은 정말 매력적인 일입니다. 그들은 실을 꿰 엮기도, 펜과 물감 으로 그리기도, 흙을 빚어내기도, 금속을 녹여 두드리기도, 정성스런 요리를 만들어 내기도 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만들고 있는 세상을 함께 들여다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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