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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스케치] 경제학보다 미술이 좋았던 화가는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고독한 예술을 펼쳤다, 《그 너머_원계홍 탄생 100주년 기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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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스케치] 경제학보다 미술이 좋았던 화가는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고독한 예술을 펼쳤다, 《그 너머_원계홍 탄생 100주년 기념전》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3.04.03 09: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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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너머_원계홍 탄생 100주년 기념전》 /김서진 기자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성곡미술관은 원계홍 화백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한국현대미술의 흐름 속 원계홍의 예술 세계를 재조명하고 아직 알려지지 않았거나 흐릿하게 지워져 가는 그의 업적들을 다시 복원해 알리기 위한 《그 너머_원계홍 탄생 100주년 기념전》을 개최한다. 1940년대 초 경제학을 공부하기 위해 도쿄로 건너간 원계홍은 경제학보다는 미술이 좋아 유럽에서 유학한 이노쿠마 겐이치로 작가가 운영하는 사설미술아카데미에서 회화 공부를 시작했다.

이후 서울로 돌아온 그는 자신의 아틀리에에 홀로 파묻혀 그림을 그리고, 일본에서 보고 배운 세잔느, 클레, 칸딘스키 같은 작가들의 미술이론 등 서양의 현대미술론을 스스로 파고들며 자신의 예술 세계를 일구기 위한 고독한 연구에 몰두했다. 그렇게 원계홍은 1978년 12월 그의 나이 55세 공간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이어 화가로서 자신감을 얻은 그는 이듬해인 1979년 공간화랑에서 제2회 개인전을 열었고 1980년 제3회 《중앙미술대전》에 초대작가로 작품을 출품했다.
 

제1회 개인전 《원계홍 작품전》 리플릿 /김서진 기자

이후 원계홍은 1980년 로스엔젤레스로 건너가 그해 12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원계홍의 나이 고작 57세 되던 해였다. 그의 안타까운 타계 이후 1984년 6월 서울의 공창화랑에서 원계홍 유작전이, 1989년 7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원계홍 회고전이, 1990년 12월 공간화랑에서 유작전이 열렸으며 이어 성곡미술관에서 그의 전작을 아우르는 회고전을 연다.

이번 전시는 아카이브 자료와 함께 회화 작품 100여점으로 구성되며 평소 원계홍 작가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던 故 이경성 국립현대미술관 관장과 오광수 미술평론가, 현대미술사가인 김현숙 박사가 한국현대미술사 속에서 원계홍의 위상을 파악하고 그의 작품 세계와 그 가치에 대해 피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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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물' /김서진 기자
'장미', '장미와 레몬' /김서진 기자

"1962년작 정물화는 안정적 구도, 사과와 기물들의 배치 관계, 투명하고 생동적인 색채법 등에서 세잔느풍이 완연하다. 1979년 첫 개인전이 끝난 직후에도 『공간』지면을 통해 세잔느 화론을 토대로 한 구도론, 색채론을 피력했다. 세잔느에의 경도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현재로서는 추적이 어려우나 1962년의 세잔느풍 정물화 이후 17년이 경과했음에도 여전히 불변의 본질을 추구하는 세잔느 화론에 동조하고 있으니 원계홍의 스승은 세잔느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불변의 구조(보편적 원리)와 오브제의 생명성(감성)의 동시성을 구현하고자 했던 세잔느 화론에서 나아가 원계홍은 '여백'을 조형의 주요 요소로 끌어들였다. 탁자 위 석류, 배, 포도 등 색색의 과일과 함께 큰 백자 제기를 배치한 <정물>은 그 대표적 사례다. 각 기물들은 상호 대조적인 긴장 속에서도 조화를 이루며 확고한 실재성을 드러내고 있다. "

-김현숙(한국근현대미술사가) 「원계홍의 작품세계」-
 

원계홍 작가노트 /김서진 기자

"예술이란 항상 일종의 긍정 작업이어서 말하자면 경이와 향수를 긍정하는 것이 된다. 기본적 형태, 색채, 선 등은 충분히 조직되어 명확히 한정된 심상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존속할 것이라고 바라지만 그 심상이라고 하는 것도 다만 무엇이든 심상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구성적인 심상이 아니면 안 된다. 구성적인 심상이라고 할 때 그것은 내부에 생명을 강화시킬 힘이나 원망을 환기시켜 생존할 권리를 주장하며 그 이상의 발전을 조성하는 심상을 말한다.

몬드리안은 좋게 말해 일종의 신비주의자로 자연을 싫어했다. 방 안을 순백으로 칠하고 조망을 없이 해놓고 생활했다. 개성을 미워하고 절대성을 순수를, 그리고 완전성을 믿고 있었다. 그는 예술에서 일체의 우발성을, 일체의 감성을 배제하는 것을 염원했다. 그는 완전측정의 예술을 탐내 표현주의와 마주하는 위치에 있었다. "
 

원계홍 작가노트 /김서진 기자

"예술이 염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존재의 과정을 강조하는 것. 일생을, 인간의 숙명이 갖는 의의를 단호히 주장하는 것. 만약 이것이 없었더라면 있는 것은 다만 허무주의, 다양한 형식의 자기기만뿐일 것이다. 모조품일 뿐이다, 라고.

예술가의 세계란 쟁투와 질투, 야망과 절망, 책모와 불성실 등이 소용돌이치는 절망적인 곳이며 거기서 살아남는 자는 선인만에 한한다고 할 수는 없다. 끈질기지 않으면 안 되고 또한 겸허하고, 탈속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최대의 위험은 성공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그림에서 받는 쾌락의 충격은 소생하는 기쁨의 체험, 전달된 감동에 의한 충격인 것이다. "

-원계홍 작가 노트-
 

'소녀' /김서진 기자
'마리아' /김서진 기자

"그는 그림밖에 몰랐으며 그림을 그리는 것 외에 어떤 직장도 가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가까운 화가들과 어울리면서도 미술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정식 미술학교를 다니지도 않았으며 어떤 공모전이나 그룹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기인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그의 작품에 대한 태도나 조형적 사고에 있어 어느 누구보다도 진지했기 때문에 기인이라 부르는 것도 어울리지 않는다."
 

골목길, 인물 습작 등이 있는 원계홍의 스케치북 /김서진 기자
'꽃(글라디올러스)' /김서진 기자

"그의 작품세계는 초기엔 주로 정물에 집중된 반면 만년엔 풍경에 일관했다. 틈틈이 인물도 그려지고 있으며 발표되지 않은 작품 가운데는 추상 작품도 발견된다. 이 한정된 소재의 범주 역시 그의 삶의 태도에서 나타나는 집중적인 현상과 관계가 있는 듯하다. 전기의 정물과 후기의 풍경은 다소 차이를 드러내 보인다. 정물이나 인물 계통이 일반적인 소재의 관념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라면 풍경은 일반적인 풍경의 범주를 벗어나고 있다. 전기가 비교적 관습에 충실하다면 후기는 예외적이라고 할 만큼 일반적 관습에서 벗어나 있다. "

-오광수(미술평론가) 「원계홍의 세계_심상과 본질」-
 

'빨간 건물' /김서진 기자
'골목풍경' /김서진 기자

원계홍 화백의 작품은 주로 1970년대 작업한 10호 내외의 유화다. 골목 풍경과 정물화가 주를 이루며 나머지는 인물화와 추상화, 드로잉 등이다. 그중에서도 1970년대 말 작업한 골목 풍경 연작은 한국의 경제개발 이전 서울 변두리의 뒷골목을 단순하고 명쾌한 필치로 그려냈다. 이때 텅 빈 골목길은 사실 묘사에 충실하기보다는 원계홍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던 세잔느의 풍경화처럼 단순한 기하학적 구성과 명료하고 순도 높은 색채로 담아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좀더 다가서 보면, 그의 전 작품에 스며들어 있는 회색조와 머뭇거리는 붓자국들은 아직 무엇인가 더 그려야 할지, 아니면 그만 멈추어야 할지를 결정하지 못한 채 미완성인 양 캔버스 전체를 배회한다. 이러한 원계홍의 의도적 배회가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바로 원계홍 회화의 고유성일 테다. 그것은 순수하고 우직하게 창작에만 몰두했던 한국의 초기 서양화가들처럼 원계홍 역시 오직 예술을 위한 예술에만 매진했던 데서 오는 예술혼의 깊이 때문일 것이다. 현대미술의 사라짐의 위기에서 그의 예술은 결코 그러한 잡다한 시대적 상황들에 종속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기와지붕(명륜동)' /김서진 기자
'거리풍경' /김서진 기자

"미학적인 측면으로 돌아볼 때 골목, 지붕들, 장미, 인물없음 등 원계홍 회화의 여러 오브제나 특성들은 세간에서 이야기되는 우수나 고독 등의 통속적 성격과는 관계없이, 단지 완벽한 순도에 도달하고자 한 선생의 회화세계, 선생의 미학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의 소재로서 의미만을 가질 뿐이다. 그러한 선생의 미술세계로 인도하는 그만의 '회화적 언어'가 그 완성도에 있어 거의 정점에 달했을 때 선생이 작고했다는 것은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윤영주 「그 너머(Beyond)-소장가의 원계홍론」-
 

'약수동 골목' /김서진 기자

"원계홍의 풍경은 단순한 분위기로서의 풍경이 아니다. 장소로서의 실존에 다가가는 숨가쁜 감동의 결정체다. 부인의 증언에 의하면 사생을 나갈 때는 언제나 새벽을 택했다고 한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미명에 주로 그렸다. 그래서인지 골목길에는 인적이나 하다못해 고양이나 개라도 어슬렁거림직한데 생명체라곤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부재의 풍경>이란 이름이 붙기도 한다.

특히 골목길에 인간의 모습이 배제된 것을 두고 그의 은자품 태도의 반영이라 보는 견해도 없지 않다. 어쩌면 인간의 모습을 배제함으로써 인간의 감정을 배제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일체의 인간적 감정을 제거하고 구조로서의 풍경만을 오롯하게 현전시키려는 의도다. "

-오광수(미술평론가) 「원계홍의 세계_심상과 본질」-
 

'지붕' /김서진 기자

"때묻은 건물과 인간 부재의 뒷골목에서 인간의 노스탤지어를 연상시키는 그의 그림에서 세기말적인 우수를 느꼈다. 그러나 인간 부재의 형이상학적 거리풍경을 보고서는 화가 기리꼬의 작품을 연상하기도 했다. 위틀리로(스페인 화가 미구엘 위틀리)이건 기리꼬이건 그가 자신의 작품 속에서 현대인의 무서운 고독을 폭로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한 화가 원계홍이 정신적으로 도달한 세계는 드가가 갖고 있던 높은 의미의 정신성이다.

그 정신성은 지적인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에 20세기의 지적인 혁명의 선구자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화가 원계홍은 하나의 인간 속 야성, 지성, 인간에 대한 깊은 불신 같은 것이 엇갈려 그 자체가 20세기의 갈등이라고 볼 수 있다. 갈등은 여러 가지 요소가 엉켜 이루어진 상황으로서 그의 표정은 무서운 고뇌에 차 있는 것이다. 그 고뇌는 자기를 위한 고뇌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고뇌인지도 모른다. 왜냐면 그가 바로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

-故 이경성 전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원계홍 회고전에 부쳐」-
 

제2회 개인전 《원계홍 근작전》에서의 원계홍 /김서진 기자

"원계홍은 부친의 뜻에 반해 화가의 길로 갔다.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명문 처가에 대한 부담감, 비타협적인 성격에 마지막까지도 부친이 남겨준 부천 과수원을 팔아 살아야 했던 컨텍스트 속에서 그가 갈 곳은 오직 한길 그림을 그리는 것뿐이었다. 그는 인적 없는 새벽에 화구를 메고 이 골목 저 골목을 그렸다. 그의 화론이라 할 수 있는 「화필을 손에 들고 자연과 명상」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는 정열을 가지고 사력을 다해 웬만한 요소는 다 버리고 "본질을 추출한 회화"를 남겼다고 생각한다. "

-김태섭  「나의 소장기」-
 

야외에서 작업 중인 원계홍 /김서진 기자

"야생적이고 도도한 예술가 원계홍은 나는 물론 모든 사람을 속인으로 단정하고 상대를 해주지 않았었다. 그것은 일종의 올가미인 동시에 미화된 콤플렉스인지도 모른다. 특히 원계홍과 같이 천성적으로 반역아이고 천재인 사람의 경우에는 여간해서는 그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야생아라고 했지만 이 유형의 예술가에게는 속인과의 정상적인 인간관계가 불가능했는지도 모른다. 화가 원계홍을 대했을 적 나는 인상파 화가들이 한참 기고만장했을 때의 모습을 상상했다. 유럽의 전통과 정면으로 대립해 인상파라는 새로운 예술을 창조시킨 그들의 높은 기개가 바로 화가 원계홍의 모습에서도 살필 수 있다. "

-故 이경성 전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원계홍 회고전에 부쳐」-
 

전시 전경 /김서진 기자
전시 전경 /김서진 기자

성곡미술관 측은 원계홍 화백을 다시 마주할 수 있게 해 준 공로를 일찌감치 작가의 작품 세계에 대해 깊은 공감력을 가졌던 소장가 김태섭, 윤영주에게 돌렸다. 예술 애호가였던 두 사람은 탁월한 안목으로 일찍이 원계홍 작가의 가치를 높이 평가해 작품을 수집하고 소장함으로써 이름 없이 먼지처럼 흩어져 버릴 뻔했던 작가의 작품을 남겼다.

어떤 작품을 가치 있는 예술 작품으로 탄생시키는 데는 작가의 수준 높은 창작 활동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그 작품의 예술성을 평가하고 인정함으로써 헛되이 사라지지 않도록 단단히 잡아주는 소장가의 역할 역시 매우 중요하다. 미술계의 기인이자 외곬수였던 원계홍은 두 예술 애호가의 관심 덕분에 다시 세상에 나와 빛을 발할 수 있게 되었다.

성곡미술관 측은 "예술을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못다 핀 작가의 작품을 보듬은 소장가의 마음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울림을 주길 바란다"라고 전했다. 전시는 5월 21일까지. 

 

2017년 내내 뜨거운 감자였던 전안법은 현실과 다른 불합리함으로 수공예 작가들의 목을 죄어오는 올가미 같았습니다. 극적으로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많은 작가들이 한숨 돌릴 수 있게 됐지만 아직 바뀌어야 할 부분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핸드메이커는 이러한 불합리에 ‘NO’를 외치기 위해 시작됐습니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은 정말 매력적인 일입니다. 그들은 실을 꿰 엮기도, 펜과 물감 으로 그리기도, 흙을 빚어내기도, 금속을 녹여 두드리기도, 정성스런 요리를 만들어 내기도 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만들고 있는 세상을 함께 들여다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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