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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탐구] 저작권에 엄격한 루이비통이 무단으로 가져다 쓴 그 그림의 주인, 조안 미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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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탐구] 저작권에 엄격한 루이비통이 무단으로 가져다 쓴 그 그림의 주인, 조안 미첼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3.04.13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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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비통 광고 /Artmajeur 유튜브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최근 프랑스의 유명 배우 레아 세이두는 한 화가의 그림을 배경으로 하고 루이비통의 카푸친 핸드백과 함께 화보를 찍었다. 그러나 이 그림이, 루이비통 측에서 무단으로 가져다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논란을 일으켰다. 그림의 주인은 화가인 조안 미첼이다.

루이비통 재단에서는 클로드 모네와 조안 미첼의 특별전 '모네-미첼 (Monet-Mitchell)을 열었는데, 전시 외에 루이비통 광고 캠페인에 조안 미첼의 그림을 쓴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조안 미첼 재단은 특정 브랜드가 상업적으로 미첼의 그림을 가져다 쓰는 걸 허락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조안 미첼 재단은 루이비통 측이 캠페인에 그림을 사용한다는 요청을 했을 때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광고에 그림을 썼다고 전했다. 사용 중단 요청까지 했지만 루이비통 측은 아직 이 일에 대한 설명이나 사과가 없었다고도 말하기도. 
 

거대한 크기의 작품 /flickr

커다란 화폭에 어지러이 죽죽 그어진 붓질에는 어떤 의미도 없어 보이지만, 이 추상적인 그림을 그린 화가는 미국 추상표현주의 운동과 깊은 관련이 있다. 미국의 화가, 조안 미첼의 감정적으로 강렬한 스타일과 붓질은 19세기 인상주의 화가들 중에서도 특히 앙리 마티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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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수의 정물화와 풍경화를 그린 마티스의 작품은 미첼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작가는 한 평론가에게 '나는 나의 풍경을 갖고 다닌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미첼은 대중적인 찬사와 함께 비판도 받은, 그 시대의 몇 안 되는 위대한 여성 화가들 중 하나였다. 지금도 그의 작품은 전세계 주요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조안 미첼 /Phillips 유튜브

피부과 의사였던 아버지와, 시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미첼은 자라면서 다이빙과 스케이트 등 다양한 예술을 즐겼다. 어렸을 적 그가 체험한 다양한 여가 활동은 그의 예술 세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한 갤러리 관장은 그의 그림을 두고 '그는 마치 경쟁적인 스포츠를 하듯 그림을 그렸다'라는 말까지 남겼을 정도.

어렸을 때부터 미첼은 그림과 시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 시인이자 작가였던 그의 어머니에 대한 영향이 컸다. 미첼은 10살이 되었을 때 '가을'이라는 제목의 시를 어머니가 연재하던 잡지에 발표하기도 했다. 미국의 시인인 로버트 프로스트, 칼 샌드버그, 소설가인 쏜톤 와일더 등 다양한 작가들이 미첼의 집을 방문해 함께 저녁을 먹었다. 또 의사였던 아버지는 종종 미첼과 함께 시카고 미술관이나 다른 박물관을 가곤 했다.

인상적인 건 미첼이 피겨스케이팅에도 재능이 있었다는 것이다. 1941년에는 파트너와 함께 페어 부문에서 상을 받았고, 1년 후에는 미국 피겨스케이팅 선수권대회 여자 주니어 부문에서 4위를 했다. 이 때문에 일부 비평가들은 특히 경쟁으로 유명한 피겨스케이팅 경기에서의 경험이 그의 그림 스타일에 영향을 주었다고 말할 정도. 누군가는 그의 붓놀림을 두고 캔버스에서 사람이 체조를 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 정도로 그의 그림에서의 힘이 넘치는 화풍은 그 당시 회화라는 매체에서는 독특함 그 자체였다.
 

미술관 벽에 걸려 있는 작품 /flickr

미첼은 시카고 미술연구소에서 미술 수업을 자주 들었고, 1944년 그림을 공부하기 위해 시카고예술대학에 들어갔다. 이후 그림을 그리기 위한 기본적인 훈련인 해부학과 미술 수업을 들었다. 미첼은 미술관 컬렉션 작품들을 시각적 자료로 참고하며 칸딘스키나 마티스, 폴 세잔의 작품들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1947년 맨해튼으로 이주하면서 미국 추상표현주의 화가이며 교육가인 한스 호프만의 수업을 듣기도 했지만, 수업 한 번을 듣고는 '나는 그가 한 말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라며 심지어 무섭다는 말과 함께 그만뒀다고. 

미첼은 많은 박물관과 미술관을 다니면서 미국 화가인 아실 고르키와 잭슨 폴록의 작품들을 보았다. 이후 그는 장학금을 받으며 프랑스 파리와 프로방스에서 공부했다. 이따금 스페인과 이탈리아로 여행도 다녔다. 이 기간 동안 미첼이 그리는 작품들은 점점 추상화로 변해 갔다. 그의 그림에서 도시 풍경과 인물들은 점점 더 추상적으로 변했고, 그는 자신의 그림을 두고 '표현주의적인 풍경'이라 불렀다. 
 

 '모네-미첼'전에 걸린 조안 미첼의 작품 /flickr
'Lucky seven' /flickr

1949년 가을, 뉴욕으로 돌아온 미첼은 추상표현주의 예술에 빠져들었다. 그는 선술집에서 예술가들과 시인들이 모이는 정기적인 모임에 참석했고, 미국 추상표현주의 화가인 윌렘 드 쿠닝 같은 화가들과 친구로 지냈다. 뉴욕의 그리니치 빌리지(Greenwich Village)에 있는 '더 클럽'은 예술가들의 강의와 토론이 이루어지는 자리였다. 

미첼은 1952년 뉴욕 뉴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이 전시의 성공은 미첼이 뉴욕 스테이블갤러리에서 매년 전시를 열 수 있게 이끌었다. 전시의 성공과 함께 그의 작품은 미첼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1950년대 그가 만든 많은 작품들은 흰색의 배경을 두고 춤추는 듯한 붓놀림이 주 요소다. 배경이 흰색인 건 미첼이 선택한 색의 순수함과 밝기를 강조하기 위해 삭막해 보일 정도의 흰색을 선택한 것도 있다. 흰색 배경 속 상대적으로 여러 색들은 생기가 넘치고, 선명하면서도 활기차 보이는 느낌을 준다.

미술비평가 피터 쉴달은 미첼의 그림을 두고 '스스로의 능력을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것처럼 보이는 유화 기법의 대가'라 평했다. 실제로 미첼은 그의 경력 내내 자신의 내면을 캔버스로 전달하기 위해 꾸준히, 지속적으로 작품을 제작했다. 1957년 비평가 어빙 샌들러는 미첼의 그림을 직접 보고 나서는 '자연이 예술의 공급원이라면, 예술가는 그것을 자신의 기억을 통해 캔버스에 옮긴다. 기억은 그에게 지워지지 않는 저장고나 다름없으며 미첼에게는 창의적인 영역의 하나가 된다.'는 글을 기고했다. 이 비평가는 미첼이 캔버스에 스케치를 시작하고 페인트와 붓, 미첼 자신의 손을 이용해 화폭에 빠르게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기도.
 

작품을 관람하는 관객 /flickr

미첼의 그림에서는 식별이 가능한 것이 없다. 그의 캔버스는 매우 컸고, 때로는 4개의 패널을 붙여 작업하기도 했다. 1960년대 화가들이 많이 썼던 아크릴 대신 미첼은 오일을 꾸준히 사용했다. 미첼의 커다란 화폭은 거침없는 붓질로 에너지가 넘치며, 강렬한 색채는 자연의 변화무쌍한 움직임을 그대로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첼은 캔버스를 새로운 이미지가 탄생하는 커다란 장(field)으로 보았고, 그곳에 그림을 완성해가면서 끊임없이 요구되는 행위 그 자체로부터 철저히 영감을 얻고 움직였다. 남성 작가 못지않은 힘찬 붓놀림과 춤추는 듯한 섬세한 색채의 조합, 그리고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교묘하게 넘나드는 그의 회화는 생의 의욕과 충만감을 들게 한다. 그의 커다란 추상 작품은 트레이드 마크인 장식적인 물감 떨어뜨리기(드립)는 그대로 둔 채, 대담하고 활기찬 붓질을 주로 한다. 

미첼의 그림 세계에서 나무, 물, 시, 음악은 이미지와 그의 기억 중 하나였다. 미첼은 "내가 갖고 다니는 기억에 남는 풍경들은 물론, 나중에 변형되던 감정들을 기억한다. 나는 절대 자연을 그대로 그림에 반영할 수 없으며, 그저 나에게 남는 것들을 그리고 싶다"고 밝혔다. 그는 내면의 풍경을 면밀하게 관찰했고, 그가 관찰한 모든 풍경은 그림을 그리는 내내 강렬한 시각적 기억의 일부였다.
 

작품을 관람하는 사람들 /flickr

일반적인 관람객들에게 그의 그림은 풍경이라 볼 수 없었다. 나무, 산, 물이라 부를 수 있는 윤곽이 그의 그림에는 없다. 다만 미첼은 수많은 여행을 다니며 본 장면들과 그가 기억하는 형상들을 작품에 담았다. 그의 그림에서는 어지러운 리듬감, 과감한 채색, 온몸으로 그리는 듯한 붓놀림이 특징이다. 그가 보는 풍경과, 자연, 시의 구절에 영감을 받는 그의 그림은 누구나 무엇이라고 인식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닌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즉 미첼의 의도는 생경한 붓놀림과 과감한 색상의 선택을 통해 자신의 느낀 기억과 감정을 관객에게도 전달될 수 있도록 하는 거였다. 미첼은 관객이 그림을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하고, 눈을 가늘게 떠 이것이 어떤 모양이고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궁금해하길 바랐다. 미첼은 '내가 그린 모든 그림에는 나무, 물, 꽃이 있지만 직접적이진 않다'라 말하기도. 그는 자신을 마지막 추상표현주의자라 불렀고, 199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추상화를 그렸다. 

1950년대, 미첼의 성공은 다른 여성 예술가들이 거의 인정받지 못했던 시기였기에 더 특별했다. 1950년대의 뉴욕의 미술 세계는 백인 남성들 중심 그 자체였다. 그 속에서 미첼은 헬렌 프랑켄탈러, 일레인 드 쿠닝 등 소수의 여성 예술가들 사이에서 업계에 뿌리박혀 있었던 성차별주의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작품을 제작하고 전시했다. 그러나 미첼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비평가들은 '여성 화가'라 불렀으며 여성 예술가들을 같은 남성 예술가들보다 아래로 평가했다.  
 

'Sunflowers' /flickr

1960년대 말, 미첼은 밝은 팔레트를 이용한 그림을 그렸다. 해바라기를 주제로 한 작품들은 '죽어가는 해바라기'의 느낌을 전달했다. 그가 서서히 나이를 먹고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면서부터 어두운 색들이 캔버스를 차지했다. 

미첼이 세상을 떠나고 남은 유언장에는, 예술가들을 도와줄 수 있는 재단의 설립을 원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1993년, 뉴욕에서 비영리 법인으로 설립된 조안 미첼 재단은 미국에 기반을 둔 화가, 조각가 등 여러 재능 있는 예술가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지금까지 약 천여 명의 예술가들이 지원을 받았고, 예술가들의 경력을 문서화하거나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교육 등을 제공한다. 이 외에도 재단은 미첼의 작품과 논문, 그의 삶과 관련된 기록들을 관리하고 있다.
 

조안 미첼 /Phillips 유튜브

2002년 그의 회고전이 휘트니미술관에서 열렸을 때 미첼의 친구이자 큐레이터인 클라우스 컬테스는 "그의 열정적인 내면은 붓을 인도했다"라고 전했다. 미첼은 예술가들 사이에서의 연대를 유지하기 위해 그의 집에 머물던 많은 예술가들에게도 개인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보낸 서신을 보면 그와 시간을 보냈던 사람들의 인생을 바꿀 정도의 영향을 주었다고 사람들이 말했을 정도. 

미첼의 건강이 나빠지고, 구강암 진단을 받으면서 그의 불안과 우울증은 점점 커졌다. 실제로 미첼의 1960대 그림들은 화가 내면의 우울한 마음을 반영한다. 그럼에도 미첼은 마지막까지 그림을 그렸고 그가 세상을 떠났음에도 조안 미첼 재단이 남아 예술가들의 창작을 지원하고 있다. 예술계에 만연했던 성차별에도 불구하고 그만의 독특한 길을 만들었던 미첼의 열정은 다음 세대의 예술가들에게도 잔잔히 이어지고 있다. 

 

2017년 내내 뜨거운 감자였던 전안법은 현실과 다른 불합리함으로 수공예 작가들의 목을 죄어오는 올가미 같았습니다. 극적으로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많은 작가들이 한숨 돌릴 수 있게 됐지만 아직 바뀌어야 할 부분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핸드메이커는 이러한 불합리에 ‘NO’를 외치기 위해 시작됐습니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은 정말 매력적인 일입니다. 그들은 실을 꿰 엮기도, 펜과 물감 으로 그리기도, 흙을 빚어내기도, 금속을 녹여 두드리기도, 정성스런 요리를 만들어 내기도 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만들고 있는 세상을 함께 들여다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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