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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탐구] 지상 최대의 쇼에 몰린 예약만 20만명, 고요의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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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탐구] 지상 최대의 쇼에 몰린 예약만 20만명, 고요의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3.02.21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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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tress and Maid' /flickr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현재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레이크스뮤지엄에서는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페르메이르' 전시가 열리고 있다. 

레이크스뮤지엄은 암스테르담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규모가 큰 곳으로 현재 37점의 작품만 남아 있다고 알려지는 페르메이르의 작품 중 4개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 전시에서 박물관 측은 전 세계 이곳저곳에 퍼져 있던 페르메이르의 작품 중 28점을 네덜란드로 송환했다. 네덜란드 마우리츠하이스 미술관이 소장하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도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다. 

특히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3월까지만 전시한다고 하니 페르메이르의 여러 작품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기도 하다. 레이크스뮤지엄의 타코 디비츠 전시 감독은 이번 전시를 두고 "워싱턴 국립미술관에서 1995년부터 1996년까지 21점을 모은 이후 최대 규모"라 소개했다. 
 

'The Geographer' /Public Domain

네덜란드의 유명한 화가라고 하면 으레 렘브란트를 떠올리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를 같이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페르메이르라는 이름은 몰라도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란 작품은 누구든지 보자마자 '아!'라는 소릴 낼 것이다. 페르메이르는 오늘날 가장 신비로운 초상화로 평가받는 작품을 남겼음에도 살면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고,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약 200년 가까이 잊혀졌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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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메이르는 렘브란트와 함께 네덜란드 미술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사람이었지만 사는 동안에는 네덜란드의 델프트와 헤이그에서 적당한 명성을 얻은, 지방의 화가일 뿐이었다. 유명한 화가라면 많은 작품을 남기기 마련이지만 페르메이르는 적은 수의 작품을 남겼다.

그는 부유하지도 못했고, 심지어 사후에 그의 아내와 아이들은 빚을 지고 살아야 했다. 그의 작품이 빛을 보게 된 건 독일의 구스타프 프리드리히 바겐이 비엔나체르닌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던 <회화의 기술-알레고리>를 페르메이르의 작품으로 특정하고, 프랑스 미술사학자 테오필 토레가 본격적으로 그의 작품을 연구하면서였다. 이후로 페르메이르는 네덜란드의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하나로 인정받게 된다.
 

'The Procuress' /flickr

최근까지 페르메이르에 대해 알려진 건 많지 않다. 그는 델프트에 평생 살면서 오로지 그림을 그리는 데에만 집중한 것으로 보인다. 1623년 네덜란드 델프트에서 태어난 그는 개혁교회에서 세례를 받았고, 그의 아버지는 중산층 노동자였으며 여관을 운영했다. 그는 미술품을 수집하던 미술상 아버지와 주부인 어머니 사이에서 자랐다. 

1640년대 10대가 된 페르메이르는 견습 화가로 일하게 된다. 그의 아버지는 페르메이르의 재능을 인정하고, 많은 돈을 들여 스승을 고용했다. 확실한 증거가 남아 있지 않아 어떤 사람에게 그림을 배웠는지는 모르지만, 많은 역사학자들은 렘브란트의 유명한 제자였던 17세기 중반 델프트 화파의 주요 인물이었던 '카렐 파브리티우스'나 델프트 태생의 '피터르 판 그로엔웨겐'이라 추측하고 있다.

20대가 된 페르메이르는 아버지로부터 미술 거래 사업을 물려받았는데, 이 거래소를 이끈 지 1년도 되지 않아 결혼을 하게 된다. 
 

'Girl Reading a Letter by an Open Window' /flickr

흥미로운 건 1653년 페르메이르가 델프트의 부유한 가톨릭 집안의 딸 카타리나와 결혼했다는 점이다. 두 부모 모두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결혼에 반대했지만, 페르메이르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 결혼식을 진행했다. 결혼한 후에 페르메이르는 아버지의 뒤를 따라 세인트루크 길드에 화가로 가입을 하게 된다. 대개 길드에 들어가면 회원들은 회비를 지불하는데, 페르메이르는 재정적인 어려움과 그의 재능 등을 이유로 회비를 면제받은 것으로 추측한다.

그의 초기 화풍은 네덜란드의 렘브란트와 헤리트 반 혼트호르스트 같은 위트레흐트 카라바조파 화가들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1662년, 페르메이르는 세인트루크 길드의 수장이 되었고 델프트의 수많은 후원자들과 예술가, 수집가들과도 막역하게 지냈다.

그러나 1672년 루이 14세의 프랑스 군대가 네덜란드를 침공하며 일명 '재앙의 해'가 찾아온다. 네덜란드의 사회·경제 상황은 급격히 나빠졌으며, 제3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동안 영국과 독일 함대가 네덜란드를 공격했다. 법원, 극장, 상점, 학교가 문을 닫았고 중산층 가정들은 무너졌으며, 경제는 붕괴하기 시작했다. 미술 시장 또한 직격탄을 맞았다. 작품들의 가격은 폭락했고 페르메이르 또한 늘어나는 빚을 감당할 수 없었다. 우울증과 광기에 휩싸인 그는 1675년 12월 16일 세상을 떠난다.

그의 아내는 페르메이르의 죽음의 원인을 경제적 압박에 의한 스트레스로 해석했다. 「프랑스와의 긴 전쟁 기간 동안 남편은 자신의 예술품을 판매할 수 없었고, 오히려 손해를 입었다. 그는 거래하던 거장들의 작품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는 아내의 기록이 남아 있다.

미술 시장의 붕괴는 화가이자 미술상이었던 페르메이르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페르메이르와 아내 사이에는 11명의 아이들이 있었고, 아내는 아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작품을 갖다 팔거나, 고등법원에 페르메이르의 채권자들에게 빚을 탕감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전해진다.
 

페르메이르의 새겨진 곳 /flickr

사망 이후 그의 작업실에는 의자 2개, 이젤 2개, 팔레트 3개, 캔버스 10개와 책상, 서랍이 있는 작은 나무 찬장 등이 남았다. 그는 델프트에서는 존경받는 화가였지만 델프트 밖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유일한 후원자는 페테르 반 라이번이라는, 수집가이자 미술 중개상이었다. 그는 지역 유지로 돈이 많았고, 페르메이르의 모든 작품을 샀다는 이야기가 떠돌았을 정도다. 여러 명이 그의 작품을 구입한 것도 아니었고 페테르 반 라이번이 그의 작품을 거의 싹쓸이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이 외부의 여러 갈래로 퍼져 나갈 가능성도 적었다.

설상가상 이 후원자가 1674년 세상을 떠나면서 당시 작품을 판매할 수 있는 경로도 끊긴 셈이나 다름없었다. 그림을 사 줄 후원자도 사라졌고, 가난해진 그가 부인과 아이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입장에서 자신만의 개성이 담긴 그림을 그린다는 건 어려웠을 것이다. 전쟁 속 혼란스러운 상황에 부딪친 그는 어떤 날은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돌아다녔을 정도로 혼돈에 빠졌다. 재정적인 불안, 광기, 우울함은 한 화가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The Glass of Wine' /flickr

페르메이르의 그림은 주로 네덜란드 중산층의 가정을 배경으로 한두 명의 인물이 등장하며, 한쪽 창을 통해 빛이 들어오는 구성을 보인다. 노랑과 파랑의 섬세한 조화, 뛰어난 빛의 효과, 정교한 구성이 특징인 그의 그림은 사실적이면서도 시적이며 고요한 분위기가 넘쳐흐르는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그는 울트라 마린 블루 안료를 쓴 것으로 유명한데, 당시 이 색소는 엄청나게 비싸 예술가들이 선뜻 사용하기 어려웠다. 색상과 색소는 페르메이르에게 아주 흥미로우면서도 중요한 요소였고, 그의 오랜 후원자인 페테르 반 라이번은 파란색 안료인 라피스라줄리, 붉은색의 카르민 등 고가의 안료를 구입해 페르메이르에게 가져다줬다고 한다. 페르메이르는 귀한 안료로 그림을 그렸던 만큼 그가 빚을 지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고.

페르메이르는 이 색뿐만이 아닌, 암갈색 천연 안료인 황토색을 이용해 따뜻한 빛을 그려냈다. 그의 작품에서 빛은 피부, 직물, 보석 등을 표현하는 데 탁월하게 적용되어 페르메이르는 '빛의 주인'이란 칭호를 얻었다. 그의 그림 주제들은 평범한 우유 배달부, 넒은 집에서 사는 부유층들, 상인들의 사치와 화려함 등 17세기 네덜란드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남긴 작품의 개수가 현저히 적어, 과학자들은 엑스레이, 현미경, 표본분석 등을 통해 안료의 성분과 어디서 생산됐는지에 대한 것, 그림에 지워진 부분과 페르메이르가 어떤 순서로 그림을 그렸는지에 대한 것들을 연구 중이다.
 

'Girl with a Pearl Earring' /flickr

영화로도 제작되고, 수많은 패러디로도 쓰인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페르메이르의 역작이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작품이다. 페르메이르의 인생 자체가 알려진 바가 몇 없는지라 그의 이 작품 또한 신비스러운 부분이 많다. 검은 배경을 두고 웃는 듯한 모습으로 관람자를 보는 여성의 모습은 미묘한 느낌이 강하다.

단순하지만 조화로운 구성, 안료를 투과한 빛이 만들어낸 선명한 색채, 그리고 여성의 귀에서 반짝이는 진주 귀걸이는 그림 전체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빛을 잘 쓰기로 소문이 난 페르메이르인 만큼, 입가를 따라 옅은 분홍색과 흰색의 하이라이트로 인해 신비주의라는 분위기를 더한다. 덕분에 관람자들은 초상화 속 여성과 눈이 마주쳤을 때 여성이 말을 하려다 멈춘 건지, 아니면 숨을 들이쉬는 과정인지 저절로 궁금해하게 된다.
 

벽에 새긴 뱅크시의 작품 /flickr

머리에 터번을 두른 이 여성의 정체는 실존 인물이 아닌 17세기 네덜란드에서 화가들이 많이 그렸던 '트로니 Tronie'라고 한다. '트로니'란 가상의 인물을 그리는 것을 말한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현대 미술가들에게도 꾸준한 영감을 주고 있다. 영국의 그라피티 예술가 뱅크시는 영국 브리스톨의 한 외벽에 이 초상화를 짙은 파란색 페인트로 그렸다. 
 

'The Allegory of Painting' /Public Domain

페르메이르의 그림들은 크기가 50㎝를 거의 넘지 않는다. 하지만 <회화의 기술-알레고리>는 다른 작품들과 다르게 크기가 100㎝가 넘는다. 캔버스에서 한 예술가는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파란색 옷을 입은 여성을 그리고 있다. 여성 뒤에는 여러 국가를 그린 큰 지도가 걸려 있다. 여성의 오른쪽에는 서명이 있지만 날짜는 보이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이 작품이 1665~1668년 사이, 또는 1670~1675년 사이에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작품에서는 화가와, 그가 모델로 삼은 대상인 눈을 내리깐 여인의 모습만이 보인다. 화가는 페르메이르 본인이고, 모델인 젊은 여성은 그의 딸이라 추측하는 사람도 많다. 화가는 스케치가 보이는 이젤 건너편에 검은 옷을 입고 앉아 있다. 그는 짧고 펑퍼짐한 바지와 오렌지색 스타킹을 신고 있는데 이는 루벤스의 유명한 자화상처럼 그 시대에 보이는 꽤 비싸고,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옷이었다.

또한 대리석 타일 바닥의 표현, 화려한 황금 샹들리에의 표현은 페르메이르의 원근법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보여준다. 왼쪽 창문을 통해 작업실을 비추는 빛은 매우 부드럽고 자연스럽다. 페르메이르는 빛이 사물들과 만나 자연스러운 반사와 흡수 표현을 구현해 책 표지의 미끄러움이나 푸른 천의 광택 등 사물의 질감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이 작품은 페르메이르가 빚을 지고 있던 상황에서도 누구에게도 팔지 않았던 그림으로, 페르메이르 본인에게도 꽤 각별한 작품이다. 
 

'The Milkmaid' /Public Domain

<우유 따르는 여인>은 여성이 평상에 놓인 통에 우유를 조심스레 따르는 모습을 보여준다. 배달원 앞에 놓인 테이블에는 다양한 종류의 빵이 보인다. 여성은 빳빳한 린넨 모자를 쓰고, 파란색 앞치마를 두르고, 작업용 소매를 팔뚝 위로 걷어올린 모습을 하고 있다. 왼쪽 창에서는 페르메이르 특유의 트레이드 마크인 은은한 빛이 흘러나온다. 메트로폴리탄박물관의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회화 큐레이터였던 월터 리드케는 이 그림을 두고 '모나리자 효과'라 부른다.

그는 "현대 관객들에게 그림 속 여성은 수수께끼다. 그는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으며, 일상적인 일을 하고 있다"며, "관람객들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한다"고 말한다. 페르메이르는 요리하는 여성을 그림으로써 당시 윤리적인 모습을 전달한다. 여성이 단정한 옷차림으로 평범한 재료와 낡아빠진 빵을 사용해 무언가를 만드는 모습은 17세기 네덜란드에서 가장 강력했던 가치 중 하나인 가정의 미덕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The Astronomer' /flickr

페르메이르의 그림에 등장하는 많은 것들은 그의 개인 작업실에서 썼던 가구나 여러 모티브들을 토대로 했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그가 아는 여성들이거나, 후원자들의 친척이 대부분이었으며, 제자도 없었고, 해외로 나간 적도 없었다. 그래서 그의 작업장을 물려받을 사람도 없었고, 오랜 시간 동안 해외에서 그를 알아보는 사람도 없었다. 두 명의 예술 역사가와 비평가에 의해 사후 200년이 지나고 나서야 명성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의 빛을 쓰는 기술은 사물의 질감을 생생하게 만들고, 색상의 깊이를 느끼게 하며, 사람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가 남긴 작품의 수는 적지만, 그의 빛나는 천재성이 담긴 유산들은 지금도 많은 사람을 마주하고 있다. 

2017년 내내 뜨거운 감자였던 전안법은 현실과 다른 불합리함으로 수공예 작가들의 목을 죄어오는 올가미 같았습니다. 극적으로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많은 작가들이 한숨 돌릴 수 있게 됐지만 아직 바뀌어야 할 부분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핸드메이커는 이러한 불합리에 ‘NO’를 외치기 위해 시작됐습니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은 정말 매력적인 일입니다. 그들은 실을 꿰 엮기도, 펜과 물감 으로 그리기도, 흙을 빚어내기도, 금속을 녹여 두드리기도, 정성스런 요리를 만들어 내기도 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만들고 있는 세상을 함께 들여다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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