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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탐구] 나치와 싸운 위조범은 수많은 생명을 구했다, 아돌프 카민스키...향년 97세 나이로 영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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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탐구] 나치와 싸운 위조범은 수많은 생명을 구했다, 아돌프 카민스키...향년 97세 나이로 영면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3.01.23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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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아돌프 카민스키 /사라 카민스키 공식 SNS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여기, 합법이 아닌 불법으로 1만여 명의 목숨을 구한 사람이 있다. 흔히 작품이나 지폐 등에 유명한 '위조'로 프랑스에서 1만여 명의 유대인을 구한 위조 전문가 아돌포 카민스키가 1월 9일 파리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NYT는 보도했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프랑스 저항군의 조직원이었던 아돌포 카민스키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약 14,000여 명의 유대인의 생명을 구한 문서를 위조했다. 그는 30여 년간 기타 운동 단체들, 주로 민족해방전선에 뛰어든 단체와 사람들을 위해 금전의 대가 없이 서류를 위조해 주었다고 한다. 
 

아돌프 카민스키의 젊은 시절 /아돌프 카민스키 공식 페이스북

아돌포 카민스키에겐 많은 별명이 있다. 위조범, 밀수업자, 사진작가, 저항운동가 등이다. 그는 1925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지만 1930년대 초 가족과 함께 프랑스로 이주했다. 그의 직업, 그의 삶을 결정하게 한 것은 그가 처음 받은 아르헨티나 국적의 여권이었다.

10대부터 그는 공장에서 일을 해야 했다. 1940년대 독일 침공 당시 가족이 프랑스 노르망디에 살고 있었고, 유대인들의 주변 상황이 점점 나빠지면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였다. 카민스키는 옷을 염색하는 가게의 아르바이트부터 시작했다. 그는 2016년 NYT가 제작, 에미상을 수상한 단편 다큐멘터리에서 "난 그곳에서 색깔의 마법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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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 주인은 그에게 색을 바꾸거나 없애는 비법을 알려주었다. 그는 버려진 군복을 염색하고, 얼룩이 묻은 드레스를 세탁하면서 화학 기술을 습득해 나갔고 어떤 얼룩도 능숙하게 지울 수 있는 전문가가 되었다. 화학에 관심이 많아진 그는 버터를 만드는 유제품 회사에서 화학자의 조수로 부업을 하게 된다. 크림의 지방 함량이 얼마인지 측정하기 위해 샘플에 메틸렌블루를 넣고 젖산이 색을 분해할 때까지 기다리던 카민스키는, 젖산이 신분증을 만드는 데 주로 쓰이는 워터맨블루 잉크를 지우는 최적의 지우개가 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아돌프 카민스키 /뉴욕타임즈 공식 유튜브

1943년 카민스키는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어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있던 아우슈비츠를 비롯, 다른 수용소로 가던 도중 파리 외곽의 환승 수용소였던 프랑스 드랑시로 이동하던 중이었다. 다행히 카민스키 가족은 아르헨티나 여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풀려날 수 있었다고. 그러나 여전히 일촉즉발인 상황에서 이들은 서류 위조를 생각해 낸다. 당시 카민스키는 18살이었고, 저항군은 화학 염료에 대해 잘 아는 카민스키를 데리고 다녔다.

아돌포 카민스키의 딸 사라 카민스키가 쓴 책에서는 저항군과 카민스키의 대화를 엿볼 수 있다. 저항군이 잉크의 얼룩을 제거할 수 있냐고 물었을 때 카민스키는 그게 자신의 특기라 대답했고, 그러자 저항군이 '그렇다면 지워지지 않는 잉크도 가능하냐는 질문을 던진다. 카민스키는 그런 건 없다고 했지만, 이후 카민스키가 만든 최초의 위조문서는 자신을 '줄리앙 켈러'라는 이름의 알자스인으로 통과하게 만든 여권이었다.

가명을 쓴 그는 파리의 한 지하 실험실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핵심 요원으로 일했다. 무보수로 일하는 것은 물론, 발각될 시 죽는 것까지 각오한 이들은 가명을 쓰고 문서를 조작했다. 카민스키는 동료들에게 젖산을 사용해 문서를 위조할 것을 제안했고 이 실험실의 책임자가 되었다.
 

한 시간마다, 그는 30여개의 위조 서류를 만들었다 /뉴욕타임즈 공식 유튜브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가 자행한 유대인 대학살인 '홀로코스트' 기간 동안 유대인들을 구하기 위해 수천 개의 문서를 위조했다. 그는 초등학교 때 학교 신문을 편집하면서 배웠던, 다양한 서체를 만들어 활용했고 정부가 사용하는 서체 또한 모방할 수 있었다. 그는 공문서와 비슷하게 서류를 위조할 수 있었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는 다락방에 틀어박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위로 여권과 서류를 만들었다. 서류에 적힌 '유대인'이라는 글자를 지우기도 했고, 아예 사람의 이름과 국적을 바꿔버리기도 했다.

아마 그에게 있어 제일 유명한 일화는 체포될 위기에 처했던 300여 명의 유대인 아이들을 위한 위조 서류를 그와 동료 위조범들이 만들어야 했던 일이다. 그는 단편 다큐멘터리에서 "가능한 오랫동안 깨어 있어야 했다. 간단하다. 한 시간에 약 30개의 위조 서류를 만들었다. 내가 한 시간을 잔다고 하면 30명이 죽는다는 얘기가 된다. 그래서 난 기절할 때까지 일하고 또 일했다. 기절했다 깨어나면 또 계속 일을 했다. 멈출 수 없었다"라고 밝혔다.

카민스키는 이스라엘 신문 하아레츠(Haaretz)와의 인터뷰에서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다"라며, "어두운 밤, 작은 등불이 밝혔던 나무 탁자의 냄새, 펜과 잉크통을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란 말을 남겼다. 하아레츠는 '카민스키의 위조범 경력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1940년대의 격변의 시기, 주요 혁명과 대의를 위해 봉사했다'라고 말했다. 
 

어떤 때에 합법이 인간성에 반한다면 /뉴욕타임즈 공식 유튜브
당신은 싸워야 한다 /뉴욕타임즈 공식 유튜브

그는 당시 파리 경찰이 위조범을 찾아다녔다는 것을 회고하며, 한때 신분증과 잉크를 넣은 가방을 들고 다녔지만 경찰에게 걸릴 때마다 이 가방엔 샌드위치만 들어 있다며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단편 다큐멘터리에서 그는 자신이 한 짓이 모두 불법이라고 시인했다. 그러나 이어 그런 말을 남겼다. "합법적인 것이 인간성에 반할 때, 당신은 싸워야 한다"라고.

그는 홀로코스트 시대가 끝나고 나서 전문 사진작가로 일하다가, 나치가 패배했음에도 또 다른 다양한 곳에서 자유를 위한 싸움은 계속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는 자신이 유대인들을 구했던 경험을 떠올려 수천 명의 난민, 이민자, 투사들을 위한 문서를 비밀리에 위조하는 일을 계속했다. 
 

아돌프 카민스키와 그의 딸 사라 카민스키 /뉴욕타임즈 공식 유튜브

카민스키는 "모든 인간의 신념과 피부색이 무엇이든 이들은 평등하다. 윗사람도, 아랫사람도 없다"고 말한다. 그는 나치의 손에 죽을 뻔한 유대인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위조를 하는 데 30여 년의 시간을 바쳤다. 그는 그 시간 동안 아무 대가를 받지 못했고, 심지어 그 일을 그의 가족들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의 딸 사라 카민스키는 하아레츠와의 인터뷰에서 "가족과 같이 저녁 식사를 하며 대화를 하던 중에 알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어렸을 땐 위조라는 게 어떤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라고 밝혔다. 사라는 자신의 아버지가 위조범이라는 걸 알았을 때, 제 아버지가 누구보다도 도덕적이고 규칙을 존중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전혀 믿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사라는 "아버지는 항상 우리에게 법을 지키라고 가르쳤기 때문에 우리는 아버지가 불법을 저질렀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며, "아버지가 불법적인 일을 저질렀지만, 그건 그만큼 강력한 도덕적인 범위 안에 존재했다는 것 또한 이해했다"고 전했다. 
 

아돌프 카민스키 /아돌프 카민스키 공식 페이스북
사람들은 그를 위조범이라고 부르지만 그는 개의치 않다 /뉴욕타임즈 공식 유튜브

카민스키는 2023년 1월 9일 9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어떻게 위조범이 되었냐는 질문에 '우연히, 필요에 따라서'라는 말을 했다. 300여 명의 유대인 아이를 구하는 위조 서류를 만드는 과정에서 한 쪽 눈이 실명되기도 했던 그는 아무리 억압되고 핍박받는 어딘가에서라도 숨겨진 예술가가 존재하기를 바랐다.

그가 죽었을 때 NYT, 워싱턴포스트, 르몽드, 하아레츠 등 여러 유력 언론사들은 그의 특별한 예술성에 대한 찬사를 보내며 며칠간 그의 기사를 기고했다. 불법에, 위조로 점철된 그의 삶이지만 불법이라는 한 꺼풀을 벗겨낸 그의 삶은 수많은 생명들은 구한 한 줄기 빛으로 찬란하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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