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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가 한 번도 방문하지 않은 불교 최고(古) 성지, 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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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가 한 번도 방문하지 않은 불교 최고(古) 성지, 산치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3.01.31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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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치 /flickr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신라의 승려 혜초는 4년간 천축국과 여러 이웃 나라들을 돌아보고 <왕오천축국전>이란 책을 남겼다. 여기서 천축국은 인도를 가리키는데, 예로부터 인도는 부처가 태어난 나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부처는 인도를 비롯해 여러 곳을 다니며 불교를 전파했다.

그런데 신기한 건 인도에 붓다가 한 번도 방문하지 않은 곳이지만, 가장 오래된 불교 성지가 있다는 점이다. 1989년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산치 불교유적군'은 넓게 펼쳐진 땅을 내려다보는 언덕에 위치해 있다. 산치 불교유적군은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석조 건축물들이 있고, 인도 건축에 있어 아주 중요한 기념물이기도 하다.
 

산치의 중심인 제1호 스투파 /flickr

산치 유적은 인도 마우리아 왕조 제3대 아소카 왕에 의해 만들어졌다. 유적의 중심은 언덕 정상에 있는, 반구형의 돔 모양을 한 구조물이다. 이 돔 모양의 스투파는 높은 계급을 상징하는 차트라(불교 스투파의 정상부에 올려지는 천계의 상징)을 씌웠는데, 유적을 보호하고 기념하는 의미이기도 했다.

전체적인 건축 감독은 아소카 왕이 맡았는데, 특이한 건 그의 아내가 왕과는 다르게 평범한 상인의 딸이었다는 점이다. 산치는 왕비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며, 두 사람이 결혼한 특별한 장소였던 것이다. 특히 제1호 스투파는 건축 과정에 왕비도 같이 감독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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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치 스투파는 인도 문화유산에 대한 중요성을 나타내는 의미로 인도 지폐에도 그림으로 묘사되어 있다. 오늘날 산치의 불교 유적군은 마우리아 왕조 시대부터 굽타 왕조 시대까지 이어진다. 아마 인도에서 가장 잘 보존된 불교 유적지라고 하면 단번에 산치 유적을 꼽을 정도다.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되고, 커다란 기념물인 거대한 산치 스투파는 제1호 스투파라고도 불린다.
 

산치 유적지에서 내려다보는 풍경 /flickr

수 세기 동안 제1호 스투파 주변은 성문, 난간벽 등이 세워지고 점점 확장되었다. 인근에는 제2호 스투파, 제3호 스투파도 세워졌다. 굽타 왕조 시대에 들어서는 다양한 신전이 세워졌으며 전체적으로 봤을 때 산치는 불교 초기의 예술적 표현에서부터 종교의 쇠퇴에 이르기까지 긴 시간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 또한 인도의 고대 불교 건축이 발전하는 데에도 큰 공을 세웠다.
 

후광을 가진 부처의 모습 /flickr

흙으로 쌓은 무덤이 부처를 나타낼 수 있다는 의구심은 부도가 생겨나면서 자연스러운 일이 됐다. 불교에서 최초의 부도는 부처의 유해 일부를 포함하고 있었으며, 이후 부도는 부처의 몸과 관련 있는 기념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불교 이전에는 성인들이 대개 무덤에 묻혔는데 일부는 화장을 하기도 했지만 때때로 정좌를 틀고 앉아 명상하는 자세로 묻히는 경우도 많았다.

부처의 유골은 그의 삶에서 일어난 중요한 사건들과 관련된 곳에 세워진 부도에 묻혔다. 붓다가 탄생한 룸비니, 최초로 설법을 한 장소인 사르나트, 열반한 장소인 쿠시나가르 등 여러 장소에 각기 불교와 관련된 유적지들이 세워졌는데 실제 사건이나 전설로 내려오는 이야기들이 깃들어 있다.
 

 서원 #45 /flickr

전설에 따르면 불교를 받아들인 최초의 왕이라 불리는 아소카 왕은 약 84,000여 개의 부도를 만들고 부처의 유해를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믿거나 말거나 같은 이야기가 있다. 아소카 왕의 목표 중 하나는 불교로 개종한 개종자들에게 그들의 새로운 믿음을 받쳐 줄 수 있는 무언가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아마 아소카 왕이 없었다면 불교는 전 세계적으로 큰 영향력을 주지 못했을 거란 말도 있다. 이 인도의 통치자는 단순히 그의 국민들에게 평화와 행복을 가져다주기 위해 불교를 받아들였지만 그의 선택은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영향을 주었다.

아소카 왕은 전쟁에서 죽은 희생자의 수가 엄청나다는 것을 깨닫고 충격을 받은 와중에 불교를 알게 된다. 불교에서 무기와 전쟁보다는 도덕으로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모든 사람들이 이 종교를 따르게 된다면 그의 땅을 지배하고 있던 전쟁 또한 끝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아소카 왕은 죽기 전 부처의 명을 받들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평온해지고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궁리했다.
 

기둥을 받치고 있는 장식들 /flickr

그는 그의 메시지를 대륙에 퍼뜨리기 위해 비문이 새겨진 부도와 여타 기념물들을 세웠다. 또 부처의 삶과 관련된 곳이 아닌 곳에도 그는 부도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소카 왕은 부도에 올 수 없는, 먼 곳에 사는 사람들도 불교를 접할 수 있도록 여러 지역에 부도를 세웠다.

불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부도는 일종의 믿음과도 같았다. 불교의 핵심 요소이기도 한 카르마는 사람이 어떤 행동을 했을 때, 그 행동에 따른 선악의 결과를 가져오는 원인이다. 흔히 말하는 '업보'는 사람이 다음 생에 태어날 때 큰 영향을 준다고 한다. 그래서 수행자가 부도를 지으면 다시 태어났을 때 가난하지 않고, 고생하지 않는 삶을 산다는 말도 있다. 
 

부서진 흔적이 역력한 사원의 모습 /flickr

마우리아 왕조가 붕괴되고 잠시 정체되어 있었던 산치 유적지는 예술적 발전과 번영을 가져다준 굽타 왕조의 통치 기간 동안 조금씩 부활했다. 굽타 왕조 시기 인도 건축은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오랜 세월을 견뎌낸 산치는 이 시기 동안 균형 잡힌 비율, 절제된 장식미와 우아함을 자랑하는 건축물들로 발전했다.

그러나 1400년 전까지 산치는 굽타 왕조가 멸망하고 불교가 쇠퇴하면서 방치되었고, 1818년 헨리 테일러 장군이 유적지가 온전하다는 것을 발견하면서부터 대중의 관심을 다시 받게 된다. 18-19세기에 걸쳐 영국과 마라타 왕국 간에 벌어진 전쟁인 마라타 전쟁에서 영국군 장교였던 헨리 테일러 장군은 1818년 산치 스투파의 존재를 확인한 최초의 사람인데, 당시 장군이 발견했을 때 그 장소는 완전히 버려진 상태였다.

이후 1822년 허버트 머독 장군이 산치 스투파에 접근하는 데 실패했고, 중심부에 도달할 수 없게 되자 그 장소는 또다시 버려진다. 근무 중에도 틈나는 대로 당시 거의 관심을 끌지 못했던 유적 답사를 속행하며 고고학 조사에 전국적인 조직의 필요성을 역설했던 영국 고고학자 알렉산더 커닝엄이 1851년 산치와 그 주변 부도를 공식적으로 조사하고 발굴한다.
 

제1호 스투파 주변 사원들 /flickr

물론 그 중간에서 아마추어 고고학자들과 보물 사냥꾼으로 인해 1881년까지 유적지가 많은 손상을 입긴 했지만, 1912년부터 1919년까지 영국의 인도 고고학자인 존 마셜의 감독 하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유럽인들은 아소카 왕에 의해 지어진 산치 스투파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정치적 세력으로 인도에 정착한 영국인들도 박물관 설립을 위해 유물들을 영국으로 옮기길 원했다. 이들은 대신 복제본을 가져갔고 원본은 현장에 일부 남아 있기도 했다. 오늘날 산치 불교 유적군엔 3개의 스투파, 다수의 사원을 포함해 약 50여 개의 기념물이 남아 있다. 
 

제3호 스투파 앞에 설치되어 있는 문, 화려한 장식이 눈에 띈다 /flickr

훼손과 복구 작업을 거쳐 완성된 산치 유적지는 인도에서 가장 인상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유적지로 꼽힌다. 여러 스투파와 수많은 장식으로 이루어진 기둥이 특별하지만, 화려한 장식으로 뒤덮인 문 또한 볼거리다. 문에 달린 화려한 장식은 부처, 또는 아소카 왕의 생활을 담고 있다. 후기 인도 예술의 토대를 형성한 가장 훌륭한 표본이라는 극찬을 받기도 했다.
 

제1호 스투파 /flickr

산치 유적지는 아소카 왕에 의해 세워진 이래로 꾸준히 인도에서는 불교의 중심지였다. 산치 스투파는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식 석조 건축물로 현재 보는 부도는 처음 지어졌던 원래 크기 부도의 두 배라고 한다. 산치 스투파는 반구형의 돔인 '안다'와, 스투파 위에 난간으로 둘러싼 사각형의 구조물인 '하르미카', 스투파 상부에 올려진 원형의 구조물인 '차트라'가 기본 구성이다.

돔 모양의 안다는 부처의 유해가 묻힌 무덤을 묘사했다. 누각을 뜻하는 하르미카는 신성한 매장지를 뜻하며, 차트라는 햇빛을 가리는 우산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 인도에서는 계급이 높은 사람이 걸어갈 때 뒤에서 시종이 우산을 들어 태양을 피하게 했고, 자연히 우산은 높은 사람의 권위를 상징하게 됐다. 스투파 위에 있는 차트라는 그 안에 묻힌 사람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세 개의 우산 모양을 한 차트라는 각각 불교의 핵심인 부처, 달마, 상하(공동체)를 상징한다. 
 

제3호 스투파 /flickr

제3호 스투파는 샤리푸트라의 사리가 안치된 곳이라 제1호 스투파만큼 인기가 많다. 샤리푸트라는 석가모니의 제자로 부처가 입멸한 뒤 6개월 만에 영면에 들었으며, 소승불교의 수행자로서 존경받는 인물이다. 
 

북부에 위치한 토라나의 동쪽 기둥 /flickr
북부에 위치한 토라나의 서쪽 기둥 /flickr

산치 스투파 주변에는 '토라나'라는 석재로 만든 화려한 문을 볼 수 있는데, 이 석재들은 인근 비디샤에서 온 상아 조각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한다. 상아 조각가들은 비문을 만들어 봉헌했는데, 한 비문에는 "Vedisakhi dam takarhi lupakamm katam"이라 쓰여 있다. 이는 'Vidisha(비디샤)에서 온 상아공들이 조각했다'라는 의미로, 상아공들은 부처의 삶과 일상적인 모습을 함께 조각해 부조를 보는 사람들에게 불교의 신조를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과 연결해 친숙하게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산치를 비롯한 대부분의 부도는 지역 주민들이 돈을 기부했다고 하며, 기부한 사람들은 부처의 삶 중 좋아하는 장면을 선택하며 자신의 이름을 같이 새겼다. 부도에서 특정 장면이 반복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제2호 스투파의 화려한 문 장식 /flickr

유네스코는 산치 불교유적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이유에 대해 건축 비례의 완성도와 조각 장식의 풍부한 표현 기법과, 유례없는 예술적 성취로 평가받는 제1호 스투파를 손꼽았다. 또 산치의 탑·사원·수도원 등 불교 기념물군이 건축 시기와 높은 수준면에서 인도 특유의 유물이라 평했다.

특히 동물, 식물, 인간, 불교 설화를 바탕으로 생생하고 아름답게 표현한 기법과 천장이나 조각한 기둥에 드러난 생생한 독창성이 융합하여 초기 불교 예술의 비길 데 없는 걸작을 만들어 냈다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소카 왕은 국민들에게 편안과 행복을 전파하기 위해 건물들을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지금까지 남아 후대의 사람들에게도 같은 감정을 전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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