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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스케치] 한국의 최초 서양화가, 동양화의 조화로움까지 이루다 《모던을 터치하다, 고희동:근대회화의 선구자》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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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스케치] 한국의 최초 서양화가, 동양화의 조화로움까지 이루다 《모던을 터치하다, 고희동:근대회화의 선구자》展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3.01.11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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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을 터치하다, 고희동:근대회화의 선구자」 /김서진 기자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대한제국, 일제강점, 해방, 그리고 6·25전쟁까지 격변의 시대를 모두 거쳐온 한 화가가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춘곡 고희동은 일본으로 건너가 한국인 최초로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한국인으로서 그린 가장 오래된 유화를 남겨 흔히 근대회화의 선구자라 불린다.

그러나 가장 '최초의', '가장 '오래된'이라는 수식어로 생애의 시작과 끝을 정의하기에 그의 화업의 길은 고난의 나날로 가득했다. 전통과 근대의 경계에서 처음으로 서양화를 도입하고 신미술의 시대를 열고자 했던 그의 노력은 시대를 앞서 나간 행보였다. 그는 머지않아 시류에 발맞춰 동양화로 전향했으나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하지 않고 서양화적 붓터치가 가미된 자유로운 형식의 회화를 보여주고자 했다. 
 

고희동 가옥 /김서진 기자
1950년대 가옥 증축 이후 고희동 가족 3대의 거주 공간 /김서진 기자

이번《모던을 터치하다, 고희동:근대회화의 선구자》전시가 열리는 고희동 가옥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미술행정가 춘곡 고희동이 1918년 직접 설계해 41년간 거주한 집이다. 관수동과 수송동을 거쳐 세 번째로 이사한 이곳은 원서동 16번지로 '원서'는 창덕궁 후원의 서쪽이라는 뜻을 가졌으며 고희동의 가족 3대가 함께 살았다.

고희동 가옥은 그가 41년간 생활한 곳이다. 전통 한옥과 일본 가옥의 절충을 시도하였으며 지상 1층이 안채와 사랑채로 나뉘어 있는데 사랑방 옆에 그림을 그리는 화실을 따로 둔 것과 채와 채 사이를 오가기 편하도록 복도를 이어낸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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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옥은 고희동이 학생들을 불러 모아 서양화를 가르치고 당대 문화예술인들과 활발히 교류한 한국 근대미술의 산실이자 근대 개량한옥의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2004년 등록문화재 제84호로 등록되었다. 
 

故 고희동 /김서진 기자

고희동은 서울 비파동 출생으로 역관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관립한성법어학교에서 프랑스어를 수학한 후 1904년 대한제국의 관리가 되었다. 이후 심전 안중식·소림 조석진 문하에 들어가 취미로 그림을 배우던 중 미술 연구 출장 명령을 받아 1909년 동경미술학교 양화과에 입학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가 되었다.

1915년 졸업과 동시에 귀국한 후 서양화가, 도화교사로서 활동했으나 1920년 후반 동양화로 전향해 전통적 수묵화법에 서양화의 색채 및 기법을 쓰는 절충 양식의 새로운 한국화를 시도했다.

미술행정가로서의 면모가 뚜렷해 1918년 최초의 근대적 미술단체인 서화협회 결성 및 총무 역임을 시작으로 1945년 조선미술협회 초대회장, 1950년 대한미술협회 회장,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초대회장을 역임하였으며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다. 
 

계산무진 /김서진 기자
군방자재 /김서진 기자

고희동은 다른 화가들과 함께 합작도를 많이 그렸다고 한다. 고희동의 사랑방과 화실에는 손님들이 끊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당대 내로라하는 서화가들과 친목을 다지며 함께 근대화단을 이끌어 나간 고희동은 그들과 협업한 '합작도'를 다수 남겼다. 
 

춘곡 고희동이 사용하던 백자 필세 /김서진 기자
관련 사진자료 /김서진 기자

동양화가로 전향한 춘곡 고희동이 직접 사용하던 화구다. 당시 이와 동일한 크기와 형태의 필세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일제강점기 대량 생산된 사기 제품 중 하나일 가능성이 크다. 1960년 『경향신문』에 소개된 고희동의 사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928년 『동아일보』에 소개된 이도영의 사진 속 필세도 같은 형태로 이도영의 사진에서는 동그란 모양의 필세가 또렷하다.

이도영과 고희동과의 친분 관계로 보아 이도영이 고희동에게 선사했거나 당시 대중적으로 사용하던 필세였기에 고희동도 같은 것을 구입해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고희동이 남긴 필세를 아들 고흥찬이 보관했다가 고흥찬의 아들 친구인 미술가 심철웅 교수에게 주었고 그가 소장하고 있다 고희동 미술관에 2022년 기증했다. 
 

춘곡 고희동이 사용하던 의자다리(삼각대) /김서진 기자
관련 사진자료 /김서진 기자

춘곡 고희동이 직접 사용하던 의자 다리(삼각대)다. 접으면 막대 하나의 모양이 되고 펴면 세 개의 다리가 되어 야외 스케치 등을 할 때 사용한 대의 일부라고 한다. 윗부분에 얹어 대는 가죽 부분이 없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고희동이 1954년 미국인 수채화 화가 동킹만과 만난 사진을 보면 야외에 그림이 놓인 휴대용 이젤을 세워 놓고 앉아 있는데 몸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크기 등을 고려하면 이러한 형태의 의자에 앉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들 고흥찬이 보관했다가 고흥찬의 아들 친구인 미술가 심철웅 교수에게 주었고 그가 소장하고 있다 고희동 미술관에 2022년 기증했다.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 /김서진 기자

고희동은 41년간 몸담았던 원서동 가옥에서의 삶을 정리한 후 1959년 74세가 되던 해 제기동 154번지로 이사했다. 1965년 80세의 나이로 눈을 감은 고희동은 타계 직전, 동경예대에 졸업 작품으로 제출한 자화상 1점을 제외하고는 남겨진 유화가 없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1972년 모두 소실된 줄 알았던 그의 유화 2점(<부채를 든 자화상>, <정자관을 쓴 자화상>)이 다름 아닌 제기동 164번지 골방에서 극적으로 발견되었다. 고희동의 아들 고흥찬이 우연히 이삿짐 꾸러미 속 잡동사니를 정리하다 발견한 것이다. 

두 점의 자화상은 곧바로 국립현대미술관에 의해 입수되었으며 특히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유화로서 가치를 인정받은 <부채를 든 자화상>은 2012년 국가등록문화재 제487호로 지정되었다.
 

정자관을 쓴 자화상 /김서진 기자

자화상이란 '내가 나를 그린 인물화'다. 자화상에는 인물에 대한 묘사를 넘어 작가가 드러내고 싶은 정체성과 심리 상태까지 표현되어 있다. 시대를 막론하고 작가라면 자화상을 통해 본인의 자의식을 표출하기 마련이다. 고희동의 현존하는 유화는 3점으로 모두 자화상인데 흥미롭게도 각 작품들은 '전통'과 '근대'의 속성을 골고루 갖고 있다.

먼저 <정자관을 쓴 자화상>은 두루마기를 입고 정자관을 쓴 조선 사대부로 본인을 표현함으로써 신분을 명시함과 동시에 민족적 자긍심이 발현되어 있다. 이는 조선 후기 다수의 자화상을 남긴 강세황의 작품을 떠올리게 하는데 70세에 그린 <자화상>에서 두루마기를 입고 관모를 쓴 정좌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정자관을 쓴 자화상>은 외광파의 영향으로 빛에 의한 밝은 색채가 두드러지긴 하나 전통적 자화상의 형식을 충실히 계승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강세황 역시 의복을 통해 본인의 심경을 나타내고 있는데 관모인 오사모에 평복 두루마기를 입은, 다소 엉뚱하고 격이 맞지 않은 모습은 늦은 나이에 출사하였으나 녹록지 않은 관직 생활을 견디며 과거를 그리워하는 복잡한 심리를 표출한 것이다.
 

부채를 든 자화상 /김서진 기자

그에 반해 <부채를 든 자화상>은 전통적 표현 방식의 틀을 깨고 본인을 더욱 개성 있고 주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냈는데 미술의 새로운 장을 연 고희동의 '근대성'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자화상이다. 과거에는 인물을 표현함에 있어 동작과 배경을 배제했다면 <부채를 든 자화상>은 일상을 가늠케 하는 다양한 장치들을 통하여 인물에 입체성을 부여한다.

<부채를 든 자화상>은 낡고 썩은 캔버스 화면에 엷은 모시 적삼과 베옷 바지를 입고 부채질을 하며 방안에 앉은 고희동의 자화상이 그려져 있고, 화면 왼쪽 위에 '1915, Ko, Hei Tong'이란 영어 사인이 기입되어 있어 동경예대를 졸업한 해에 그려졌음이 확실하다.

한여름 휴식을 취하며 상의를 열고 부채를 든 구체적인 형상의 인물 뒤에는 서양식 책과 풍경화 등의 소품이 배치되어 있는데 이는 당대 신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부각하기 위한 작가 개인의 개성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이로써 전통과 근대를 아우르는 시기,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이 남긴 이 자화상은 '근대 미술시대의 서막'을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필생애오십년첩 일부 /김서진 기자

71세의 고희동은 화필 생애 50년을 되돌아보며 짧은 감회와 그림을 담은 화첩을 제작하고 이를 아들에게 남겼다. 첫 장 '제시'에서는 오랜 세월 전성기를 함께 했던 스승과 동료의 부재로 인한 삶의 무상함을 드러내고 있으며 뒤이어 그러한 심경을 쓸쓸히 위로하는 소담한 자연의 풍경을 담았다.
 

산수도 /김서진 기자

"남호의 가을 물결 쪽빛보다 푸르고 또렷이 보이는 두세마리 해오라기 
노 젓는 소리에 모두 날아가고 노을진 산빛만 강물에 가득하네 
갑진년 가을 정초부의 칠언절수 한 수를 쓰다."

 

순서대로 '옥녀봉도', '유해금강도' /김서진 기자

고희동은 서양화가로서의 삶을 지속하지 못하고 1930년대 들어 완전히 동양화로 전향하였다. 서양화에 대한 사회적 인식 부족으로 작가에 대한 후원이나 작품의 매매로 이어지지 않았기에 경제적 어려움과 화가로서의 입지마저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동경 유학 이전 이미 두 거장인 안중식과 조석진 문하에서 화필을 잡으며 뿌리내린 동양화에 담긴 정신성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결단이었다.

비록 그는 동양화로 전향하였지만, 그간 습득해 온 서양화법을 적용하여 기존 전통 회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대상의 사실적 묘사, 원근법, 서양화식 채색법 및 음영법 등이 가미된 새로운 형식의 회화를 선보였다.

고희동은 산수화를 가장 많이 그렸으며 금강산에 대한 애착이 깊어 이를 배경으로 한 실경산수화를 다수 남겼는데 이들에서 절충화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말년으로 갈수록 전통 회화의 특성이 점차 강하게 나타나지만 필법과 채색법에서는 서양화적 요소가 꾸준히 드러난다. 
 

체험존 /김서진 기자
전시 전경 /김서진 기자

종로문화재단이 재개관 3주년을 기념해 여는 전시 《모던을 터치하다, 고희동:근대회화의 선구자》는 한국 근대 미술의 새 시대를 연 춘곡 고희동의 화필 생활 50년을 살펴볼 수 있는 자리다. 서양화가로서의 삶을 조명하는 전시 영상과 그의 다양한 동·서양화를 골고루 만나볼 수 있으며 특히 구립미술관이 새롭게 입수한 소장품 6점을 처음으로 선보인다.

이번 전시에서는 수많은 미술계 동료들을 늘 곁에 두고 화단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간 고희동의 우애가 돋보이는 합작, 소중한 지인에게 선물한 풍경화 등이 출품되며 그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은 소품도 만날 수 있다.

전시 관계자 측은 "대한제국의 관리로 시작해 선구적 화업의 길을 걸어 왔고 미술계의 발전을 위해 행정가이자 정치가로서 생애를 마무리한 고희동이 근대미술사에 남긴 발자취를 돌아보길 바란다"라고 전했다. 

2017년 내내 뜨거운 감자였던 전안법은 현실과 다른 불합리함으로 수공예 작가들의 목을 죄어오는 올가미 같았습니다. 극적으로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많은 작가들이 한숨 돌릴 수 있게 됐지만 아직 바뀌어야 할 부분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핸드메이커는 이러한 불합리에 ‘NO’를 외치기 위해 시작됐습니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은 정말 매력적인 일입니다. 그들은 실을 꿰 엮기도, 펜과 물감 으로 그리기도, 흙을 빚어내기도, 금속을 녹여 두드리기도, 정성스런 요리를 만들어 내기도 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만들고 있는 세상을 함께 들여다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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