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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탐구] 낙서와 드로잉의 경계를 넘나드는 558억원 그 이상의 가치, 사이 톰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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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탐구] 낙서와 드로잉의 경계를 넘나드는 558억원 그 이상의 가치, 사이 톰블리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2.12.05 18: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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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Untitled) /필립스 옥션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세계 3대 글로벌 옥션 중 하나인 필립스 옥션은 11월 16일-17일 양일간 뉴욕 파크 애비뉴 필립스 사옥에서 하반기 뉴욕 경매를 개최했다. 이번 뉴욕 경매는 30여 개국에서 응찰을 받았고 낙찰률 98%, 낙찰 총액은 한화 약 1900억을 기록했다.

이날 경매에서 최고 낙찰가는 한화 약 558억 원에 낙찰된 사이 톰블리의 '무제(Untitled)' 그림이 주인공이 됐다. 사이 톰블리는 그림과 낙서, 드로잉을 장난스럽게 결합하는 독창적인 양식을 선보인 미국의 대표적인 추상주의 화가다.

사이 톰블리는 ‘팝 아트의 아버지’로 불리는 미국의 화가 재스퍼 존스, 콤파인 페인팅으로 유명한 로버트 라우센버그와 동시대를 살았다. 그는 독일의 거장인 안젤름 키퍼, 미국의 신표현주의 화가이자 영화감독인 줄리앙 슈나벨 등 젊은 예술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루브르 박물관 천장의 그림, 사이 톰블리가 작업했다 /flickr

그를 대표하는 작품들은 전형적인 회색, 노란색 또는 오프 화이트 색상의 배경에 자유롭게 그려낸 그라피티나 흡사 낙서 같은 작품들이다. 영국 런던의 테이트 모던(Tate Modern), 독일 뮌헨의 브란트호스트 박물관(Museum brandhorst) 등 세계 굴지의 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그의 작품들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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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버지니아 렉싱턴에서 태어난 톰블리의 아버지는 MLB 아메리칸 리그 중부지구 소속 프로야구단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투수였다. 야구선수였던 아버지는 아들의 이름을 미국 메이저 리그의 전설적인 투수였던 사이 영의 이름을 따 지었다고. 어린 시절 톰블리는 시어스에서 주문한 아트 키트를 작업하곤 했고, 그의 부모는 예술에 대한 톰블리의 관심을 지켜봤다. 운동의 피가 흘렀던 가족과는 달리 그는 책 읽는 것을 좋아했던 어린아이였다.

톰블리는 12세가 되던 때 화가인 피에르 도라와 같이 미술 수업을 들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뉴욕 예술학생연맹에서 공부하던 중 로버트 라우셴버그를 만나게 된다. 라우센버그는 톰블리에게 당시 예술가들의 교류 장소기도 했었던 블랙 마운틴 칼리지에 다니지 않겠냐는 권유를 하게 된다. 1951년 톰블리는 블랙마운틴칼리지에서 추상표현주의 미술의 유명한 액션 화가인 프란츠 클라인, 추상표현주의의 창시자 중 한 명이라 불리는 로버트 머더웰 등과 함께 공부했다. 
 

톰블리의 작품을 감상하는 관람객 /flickr

이후 로버트 머더웰은 1951년 톰블리의 첫 번째 개인전을 주선하기도 했다. 로버트 머더웰 자신은 그에게 가르칠 것이 없다며 아트 딜러인 샘 쿠츠를 소개해 주었고, 덕분에 톰블리는 1951년 뉴욕 쿠츠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 수 있었다. 당시 톰블리의 작품은 프란츠 클라인의 흑백 행위적 표현주의와 파울 클레의 작품에 영향을 받았다고. 1952년에는 버지니아 미술관에서 그에게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스페인 등을 여행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톰블리는 라우센버그와 함께 아프리카와 유럽 등지를 다녔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톰블리는 뉴욕에서 일하면서 로버트 라우센버그, 재스퍼 존스와 함께 예술가들 사이에서도 점점 유명해지기 시작한다. 비유적인 화풍은 사라지고, 그림은 최대한 단순화된 추상화가 되어 갔다. 1953년 톰블리는 뉴욕 맨해튼의 권위 있는 스테이블 갤러리에서 라우센버그와 함께 공동 전시회를 열었다.

스테이블 갤러리 관장이었던 엘리너 워드가 당시 가까운 친구였던 라우센버그와 함께 전시회를 열지 않겠냐는 제안을 톰블리에게 한 것이다. 그러나 워드가 방문객들의 논평이 담긴 책을 뺐을 정도로 전시는 대중들로부터 좋은 평을 얻지는 못했다고. 워드는 "몇몇 미술가들을 빼고는 모두들 적대적이었다. 한 유명한 미술 비평가는 충격을 받은 나머지 말 그대로 자신의 이마를 부여잡고는 거리로 뛰쳐나와, 그 길로 달아났다"라고 회상했다.
 

무제(Untitled) (1957) /flickr

그는 1957년 로마로 작업실을 옮겼다. 로마는 뉴욕과는 거리가 멀었고, 톰블리는 뉴욕 화가들과의 거리를 두면서 자신만의 작업 스타일을 만들 수 있었다. 톰블리의 작품은 라우센버그, 프란츠 클라인, 로버트 머더웰의 단색 작품 모두에 영향을 받아 흑백으로 시작했다. 어두운 캔버스 위에 하얀 선을 그어 마치 뭔가에 긁힌 듯한 것이 특징인 드로잉 기법을 개발했다.

전통적으로 붓을 사용하는 채색 방법 대신 손가락으로 연필이나 크레용을 이용해 빠르면서도 거칠게 그린다. 그래서 톰블리의 그림은 촉각적인 느낌을 준다. 그는 특유의 작업 방식으로 그림에 '흉터'를 냈다. '맹목적인' 듯한 느낌의 그의 드로잉은 후기 작품에서 길쭉하고 왜곡된 형태와 곡선을 그리는 토대가 되었다. 

톰블리가 있던 때는 팝아트가 지배적이었고, 회화나 조각을 작업할 때 역사적인 서사나 스토리는 배제하는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톰블리는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온 이후 자신의 관점을 고대, 고전 문화에 맞추었다. 1960년대 그는 종종 신화 속 인물들의 이름을 그림에 넣곤 했다. 신화는 그에게 있어 아주 흥미로운 주제였다. '비너스의 탄생', '레다와 백조' 등 신화를 바탕으로 일련의 작품들을 작업했다. '레다와 백조' 같은 경우는 그림과 낙서, 드로잉을 결합하는 특이한 양식을 도입했다. 
 

레다와 백조(Leda and the Swan) /flickr

톰블리의 가장 성공적인 작품이라고도 꼽히는 '레다와 백조'는 백조로 변신한 목성이 레다를 유혹하는 로마 신화가 주제다. 전통적으로 '레다와 백조' 작품이라고 하면 백조와 벌거벗은 여성의 에로틱한 이미지를 묘사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에 반해 톰블리는 목성의 존재를 암시하는 거친 모양의 소용돌이와 긁힘 자국, 지그재그 모양이 사방으로 보이는 등의 여러 이미지를 결합했다. 다양한 그라피티가 충돌하는 이 이미지 속 톰블리는 알아볼 수 있는 하트 모양이나 직사각형 모양의 창문을 그렸다.

직사각형의 창문은 뭔가가 폭발하는 듯한 이 그림에 안정감을 제공하면서, 마치 그림 속에서 빠져나가 외부 세계로 갈 수 있는 통로 같은 재치 있는 장치다. 뉴욕 타임스의 공동 수석 미술 평론가인 로베르타 스미스는 '그의 업적의 핵심은 추상표현주의를 뒤집는 것이 아닌, 추상적 표현주의를 다른 문화와 연결시키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톰블리의 작품은 대부분 이탈리아 로마에 기반을 두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발견한 역사와 고대 문화에 대한 아름다움에 솔직한 자신의 반응을 보인 것이기도 하다.

1960년대 톰블리의 예술은 이탈리아에서는 호평을 받았지만 미국에서는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 1963년 뉴욕 카스텔리 갤러리에서 열린 그의 전시회에서 '코모두스에 대한 담론 Discourse on Commodus'을 전시했는데 미국의 미니멀아트 미술가이자 이론가인 도널드 저드는 이 전시회를 일명 '실패작'이라 묘사했으며 더 나아가 '이 그림들에는 아무것도 없다'라는 냉소적인 평가를 내렸다고. 그의 그림은 항상 아이들이 그린 낙서, 의미 없다는 평가가 따라다녔다. 미국 미술에 큰 영향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톰블리는 자신에게 붙은 명성과 유명세를 피했고 언론과의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았다. 
 

일남에서의 50일 : 아킬레스의 방패 (Fifty Days at Iliam : Shield of Achilles) /flickr
사계(Four Seasons) /flickr

1980년대 톰블리의 작품은 대중들에게 인기가 높아졌지만 많은 비평가들은 여전히 한 카테고리 안에 넣기 어려운 그의 작품을 좋게 보진 않았다. 1994년 그를 기념하는 회고전에서 저명한 미술비평가이자 뉴욕 현대미술관의 회화·조각 부문 담당인 커크 바네도 치프는 "그의 작품은 많은 비평가들을 불편하게 한다. 많은 대중들뿐만 아니라 이제 막 예술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는 잔인할 정도로 어려운 작품이다"라고 말하기도.

톰블리는 그리스와 로마 신화, 프랑스의 신고전주의, 고대와 현대의 벽에 그려진 그라피티에 영감을 얻었다. 고대의 역사를 대하며 그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냈다. 낙서 같은 글과 언어는 톰블리의 추상적 예술의 토대가 되었는데, 단어뿐만이 아닌 그는 눈으로 식별할 수 없는 낙서와 얼룩을 캔버스에 손으로 직접 스케치하고 선 기반의 구성을 만들어 뭔가를 쓰는 것에 집중했다. 그림과 낙서, 드로잉과 그라피티의 여러 경계를 넘나들며 자유롭게 결합하는 그의 독창적인 양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이오니아 해 옆에서(By the Ionian Sea) /flickr

팝아트와 미니멀리즘이 주를 이루던 뉴욕 화가들에게서 벗어나 그는 로마에서 자신의 세계를 만들고 그가 매료됐던 신화적 이미지들을 특유의 곡선과 기호로 표현했다. 1970년대 중반 그는 거의 20년간 작업하지 않았던 조각도 작업했고, 중세 항구 도시였던 가에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바다에 대한 많은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2011년 7월 5일 그는 로마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로마에 묻힐 것을 바랐다. 그의 아들 또한 현재 로마에서 거주하며 화가로 활동하고 있다. 톰블리의 유언장에 따라 그의 작품과 재산은 뉴욕의 사이 톰블리 재단에 기부되었다.

톰블리의 작품은 '그저 낙서일 뿐이다. 내 아이들도 그릴 수 있다'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것은 망치를 든 사람이라면 누구나 로댕처럼 조각할 수 있고, 페인트 통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잭슨 폴록처럼 페인트를 흩뿌려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뜻도 된다고 비평가들은 말한다. 
 

장미(The Rose (V)) /flickr

흔히 높은 가치를 지닌 미술이나 예술 역사 속에서 그는 연필로 쓴 단어, 크레용으로 그린 낙서처럼 보이는 '낮은' 가치의 미술 화풍을 만들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있다. 적어도 그가 세상을 떠남으로써 그의 부재는 예술계에 큰 손실이 됐고, 그 공백을 채우는 데에는 적어도 수십 년이 걸릴 것이라 비평가들은 말한다. 

추상표현주의라는 말 자체가 자유롭고, 자발적으로 개인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인 만큼 사이 톰블리 또한 자신의 손을 사용해 캔버스 속 자유로운 세계를 창조했다. 커크 바네도 치프는 '예술은 어디로 향하고, 어디에서 멈춰야 하는지 등 이전까지 체계화되지 않은 개인만의 규칙을 조정하는 것이다'라는 글을 썼다. 톰블리 또한 혼란한 세상 속 자신만의 규칙과 질서를 정해 낙서 같은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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