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4-04-28 20:15 (일)
손끝에서 피어나는 검은색의 아름다움, 니엘로 세공
상태바
손끝에서 피어나는 검은색의 아름다움, 니엘로 세공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2.11.29 09: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니엘로 세공이 적용된 술잔 /flickr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금속공예라 하면 장식적이며 화려한 기술이 많다. 그중에서도 금은속 판에 검은색의 양각과 음각 장식이 들어가 도드라지게 보이는 것을 '니엘로'세공이라 부른다. 은판이나 금판에 새나 꽃, 풍경 등이 새겨진 그림을 나타내기 위해 니엘로(은, 구리, 황, 납 등으로 이루어진 혼합물)를 묻히고, 니엘로가 녹거나 부드러워질 때까지 연마한다. 판이 식으면 광택이 나면서 검은색으로 채워진 선이 나타나며 바탕의 금속과 대조된다. 

니엘로 세공은 금공예 장식 기법으로 유럽 각지에 보급되었고 비잔틴이나 르네상스, 이슬람 세계에서도 다양하면서 정교한 작품들이 존재한다. 811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니케포로스가 교황 레오 3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해당 기법을 두고 '은 염색', '은 장식', '검은색으로 칠하기'라고 쓰기도 했다. 이후 이탈리아의 니엘로 세공장들이 은판 대신 철판이나 동판을 쓰는 방법도 개발했다.
 

그리스의 미케네성 안에서 발견된 그레이브서클에이에서 발굴된 청동 사자 사냥 단검의 세부 모습 /Wikimedia Common CC BY-SA 3.0

니엘로는 황, 은, 구리, 납 등으로 이루어진 검은색의 혼합물이다. 중세 라틴어로 '흑인'을 뜻하는 단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칼자루, 성배, 접시, 뿔 모양이 새겨진 팔찌나 반지, 펜던트, 벨트 등 여러 장신구와 생활용품을 만드는 데 쓰였다. 니엘로 세공은 1800여 년 경 청동기 시대 상형문자에서 처음 발견되었다고 하며 고대 이집트에서는 바위가 켜켜이 쌓인 곳 안에서 송아지를 쫓는 사자의 모습이 묘사된 단검에서도 니엘로 기법이 쓰였다고.

기원전 1550년에는 미케네 왕릉에서 발견된 여러 청동 단검에서도 나타났다. 특히 검의 중앙을 따라 이어지는 기다란 장면에서 보이는 장면이 일품이다. 사자를 사냥하고, 사람을 공격하고 공격당하는 모습은 미케네 그리스 예술의 전형적인 폭력성과 동시에 독창적인 기술, 비유적인 이미지 등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현재 아테네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핸드메이커는 문화·예술·산업 현장을 발로 뛰며 독립적인 기사를 전달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모든 문화·예술 작품이 ‘기회의 순간’이 될 수 있도록 핸드메이커와 동행해 주세요.

후원하기
화려한 모양의 벨트 /Wikimedia Common CC BY-SA 3.0

니엘로 기법은 로마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고대 로마의 문인, 정치가인 플리니우스는 은을 장식하는 이 방식을 기이하다고 여겼으며, 이 기술이 이집트에서 들어왔다고 생각했다고. 로마에서 니엘로 세공은 작은 조각상이나 브로치를 만드는 데 쓰였고 아주 작은 모양이나 줄무늬 등 기하학적인 문양의 장식에도 쓰였다. 주인의 이름이 새겨진 숟가락, 십자가로도 만들어졌고 이러한 형태는 비잔틴 시대로 넘어가 러시아까지 퍼지게 된다. 

중세 유럽 전역에 발달하였던 로마네스크 미술 양식이 성행할 때 십자가의 뒷면에는 니엘로 기법으로 새긴 인물들의 세밀한 모습이 특징적이며, 대개 금색 바탕에 검은색으로 인물들을 묘사했다. 스타일은 점점 더 촘촘해졌고 르네상스 미술 이전까지 전개되었던 유럽의 중세 미술 양식인 고딕 미술이 유행했을 땐 르네상스 시기와 더불어 니엘로 기법이 절정을 이루었다.

또한 작은 조각의 장식용으로 쓰이던 니엘로는 반지에 새겨진 글씨를 검은색의 음각과 양각으로 돋보이게 하는 데에도 쓰였으며, 당시 금속판을 판금 방식으로 가공하여 만들어진 판금 갑옷, 무기를 만드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조각상 /flickr

속이 빈 주형인 이 조각상은 왼발을 들어 올리고, 오른쪽 다리에 무게를 두고 서 있다. 오른손엔 지금은 볼 수 없는 창을 들고 있고, 왼팔은 없어진 상태다. 짧은 튜닉과 니엘로 기법의 화려한 무늬가 돋보이는 동체 갑옷을 입고 있다.

르네상스 시기 니엘로 기법은 금세공인들에 의해 활발히 제작된다. 이탈리아의 금세공가 마소 피니게라, 조각이나 판화 작품을 활발히 제작했던 안토니오 델 폴라이우올로 같은 르네상스 시대의 금세공인들은 보통 은으로 작품을 장식했는데 니엘로 기법 도입 이후 은, 납, 황 등으로 만들어진 니엘로를 칠해 장식을 했다.

니엘로 세공을 도입한 작품들은 금색과 검은색의 대조가 뚜렷해 멀리서도 잘 보였고 나이프 손잡이, 반지, 벨트 버클 등을 니엘로 기법을 사용해 장식했다. 다만 니엘로 세공은 일부 금세공인들의 전문적인 활동이었고, 대부분의 세공은 피렌체나 볼로냐에서 이루어졌다.
 

불완전한 고리 모양의 브로치 /flickr

양 손잡이 끝에 동물 머리가 새겨져 있는 브로치다. 얇은 은판으로 덮여 있으며 니엘로 세공으로 장식되었다. 새겨진 동물 머리는 웃고 있지만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러시아의 성례 상자 /Wikimedia Common CC0

니엘로 기법을 쓰는 금세공인들은 판화 작업 또한 쉽게 할 수 있는 기법도 발명했고, 초기 조각가나 판화가들이 처음 작업을 금세공으로 시작하던 것을 감안하면 미술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1201년부터 1300년까지 크이우 루시의 장인들은 보석 제작에 있어 높은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1237년 몽골의 침입 기간 동안 크이우 루시의 거의 모든 지역이 점령당해 세공사들이 사는 마을과 작업장이 불에 타고 파괴되어 대부분의 장인들도 그 과정에서 세상을 떠났다. 우크라이나 키예프에 있는 역사박물관에는 우크라이나 전역의 무덤에서 발굴된 니엘로 기법이 적용된 유물들을 볼 수 있다고.  

러시아, 이라크, 프랑스, 영국 등에 퍼진 니엘로 기법은 20세기 태국까지 퍼졌다. 태국의 은 장인들은 고급 식기류와 서빙용 식기류에 니엘로 기법을 적용했고 20세기 초에서 중반 사이 기념품 시장까지 활성화시켰다. 오늘날 가장 잘 알려진 니엘로 보석은 태국에서 1930년대에 만들어진 '시암 실버 Siam silver'로 태국 무용수들이 입는 전통 의상의 장식에 등장한다.
 

삼엽형 장식의 큰 물병 /flickr
비골 모양의 보석 /flickr

니엘로는 처음 은과 황, 구리가 쓰였다고 한다. 플리니우스가 쓴 니엘로에 관한 최초의 문헌은 납이 언급되지 않고 구리, 은, 황으로 구성된 니엘로만 언급하고 있었다고. 10세기 즈음 낮은 융점에 쉽게 도달할 수 있게 납이 새로 추가되었다. 장인들은 니엘로를 녹이기 위해 용광로를 쓰기도 하며,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정도로 끝나기도 한다. 혼합물에 따라 각기 다른 온도로 녹이며 전반적으로는 은과 구리, 납이 혼합된 혼합물이 사용하기 쉽다.
 

Mondsee Gospel Lectionary /flickr

몬트제 복음서 'Mondsee Gospel Lectionary'는 프랑크 제국의 샤를마뉴와 그의 직계 상속자들이 통치하던 시기인 카롤링거 왕국 시대에 만들어졌다. 앞면 표지는 은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모서리에 니엘로 기법으로 새긴 문양이 보인다. 중세 시대 만들어진 제본 중 보기 드문 화려함을 자랑한다.
 

금은팔찌 /flickr

니엘로 세공은 내구성이 매우 뛰어나 장식용으로 만들어진 물건들은 변색이나 파손이 적었다고 한다. 또 단일 화합물이 아닌 구리, 황, 납 등의 복합물이라 금속을 손상시키지 않고 새겨진 디자인을 그대로 살릴 수 있어 기술적인 진보를 의미하기도 한다고. 전 세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 작품들은 니엘로 세공과 만나 장인의 섬세한 손길로 더해져 세밀하면서도 세련된 묘사를 가능케 했다.
 

2017년 내내 뜨거운 감자였던 전안법은 현실과 다른 불합리함으로 수공예 작가들의 목을 죄어오는 올가미 같았습니다. 극적으로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많은 작가들이 한숨 돌릴 수 있게 됐지만 아직 바뀌어야 할 부분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핸드메이커는 이러한 불합리에 ‘NO’를 외치기 위해 시작됐습니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은 정말 매력적인 일입니다. 그들은 실을 꿰 엮기도, 펜과 물감 으로 그리기도, 흙을 빚어내기도, 금속을 녹여 두드리기도, 정성스런 요리를 만들어 내기도 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만들고 있는 세상을 함께 들여다보려 합니다.

핸드메이커는 국내외 다양한 문화·예술·산업 현장을 발로 뛰며 취재하는 독립 매체로서 주체 적인 취재와 기사를 통해 여러 미디어·포털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기사의 가독성을 저해하는 광고 배너를 통해 수익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이는 독자를 위한 선택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핸드메이커가 다양한 현장을 발로 뛰며 독립된 기사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후원이 필요합니다. 후원을 통해 핸드메이커는 보다 독자 중심으로 성장함과 동시에 미래를 관통하 는 시선으로, 독립적인 보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어떤 곳이든 ‘무언가’를 만들 수 있는 공간에는 항상 핸드메이커가 함께 하겠습니다. 작가들 의 작품이 누군가에게는 따뜻함으로,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기회의 순간이 되기를 희망합니 다. 앞으로 핸드메이커가 만들어갈 메이커스페이스에 동행해 주셨으면 합니다.

단 한차례라도 여러분의 후원은 큰 도움이 됩니다. 후원하기 링크를 통해 지금 바로 문화·예술·산업 현장을 응원해 주세요.

후원하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 경기도 시흥시 은계로338번길 36 3층 301호(대야동)
  • 대표전화 : 070-7720-2181
  • 팩스 : 031-312-1014
  • 청소년보호책임자 : 최미리
  • 법인명 : (주)핸드메이커
  • 제호 : 핸드메이커(handmaker)
  • 등록번호 : 경기 아 51615
  • 등록일 : 2017-08-23
  • 발행일 : 2017-08-15
  • 발행·편집인 : 권희정
  • Copyright © 2024 핸드메이커(handmaker).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r@handmk.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