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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에서 만나는 한국 근대미술 ‘사이의 공간: 한국미술의 근대’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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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에서 만나는 한국 근대미술 ‘사이의 공간: 한국미술의 근대’展
  • 곽혜인 기자
  • 승인 2022.09.16 10: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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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메이커 곽혜인 기자] 1897년부터 1965년까지 한국 근대미술의 비극과 혼란, 그 속에서 피어난 귀중한 문화유산을 만나볼 수 있는 전시 <사이의 공간: 한국미술의 근대>가 지난 11일 LA카운티뮤지엄에서 개최됐다.

이번 전시는 한국의 근대 시기를 주제로 서구권 국가에서 개최되는 최초의 기획전이다.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된 이래 1910년 한일병합, 1945년 해방, 1950년 한국전쟁을 거치는 동안 한반도는 유례없는 격동기를 보냈다. 통상적으로 일제강점기는 ‘암흑’의 시대로 치부되기도 하지만, 이 시기는 온갖 새로운 문물과 사상이 밀려들어오면서 한국의 전통적 가치와 충돌하고 융합했던 격렬한 역동기이기도 했다.

이 시대를 살아냈던 화가, 조각가, 사진가 88명의 작품 130여 점이 출품되는 이번 전시는 한국 근대 미술을 서구에 소개하기 위해 마련됐다. 전시 구성은 전체적으로 시대의 흐름에 맞춰 전개되며 그 안에서 다양한 장르와 양식이 혼재하는 방식을 선보인다. 박수근 <유동>(1963), 이중섭 <흰 소>(1953-54년경) 등 이건희컬렉션 21점을 포함한 총 62점의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이 LA의 관람객을 맞이한다.
 

채용신, <고종황제어진>,1920, 비단에 채색, 46.2×33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국립현대미술관

이 작품은 고종황제 초상화이다. 19세기 말 제국 열강의 위협 속에서 고종은 새로운 문물을 적극 받아들이면서 조선이 어떤 외세로부터도 독립적인 국가가 되기를 열망했다. 결국 1897년 '황제'의 나라임을 스스로 선포하고 나라 이름을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고쳤다. 그러나 1907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황제의 자리를 박탈당했으며 1910년에는 한일병합이 이뤄지면서 나라 이름도 다시 '조선'으로 바뀌게 된다.

<고종황제어진>을 그린 화가 채용신은 무관 출신이었지만 그림에 재주가 탁월해 1901년 고종이 49세일 때 공식 어진을 그리는 어용화가로 발탁됐다. 전통화법을 계승하면서도 사실에 충실한 묘사력을 발휘했던 그의 어진은 고종의 극찬을 받았다. 그러나 1905년 국가의 외교권이 일본에 의해 박탈당하는 '을사늑약'을 당하자 채용신은 낙향해 그림 그리는 일에만 전념했다.

이 작품은 1920년 고종이 일제의 오랜 감시를 받으며 죽은 지 1년이 지난 후 제작된 것으로, 고종의 죽음을 추모하는 누군가의 의뢰에 의해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화면 오른쪽에 '태상황제'였던 고종이 49세일 때 그린 어진을 다시 따라 그렸다고 적혀 있는 것으로 미뤄보았을 때, 공식 어진과 유사하되 크기를 작게 함으로써 개인 보관을 원하는 수요자의 요구에 맞춰 제작된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 국립현대미술관

 

나혜석, <자화상>, 1928년경, 캔버스에 유채, 88×75cm, 수원아이파크미술관 소장 /국립현대미술관

나혜석은 1896년에 태어나 한국에서 처음으로 서양화를 공부한 여성 화가였다. 1913년 도쿄여자미술학교 서양화부에 입학했고, 귀국 후 1921년 서울에서 첫 양화 개인전을 개최했다. 이는 당시 서양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던 시대 상황을 고려할 때, 매우 선구적이고 이례적인 기록이다.

일찍이 여성해방운동에 관심을 가지며 '신여자'라는 잡지를 만들고 수많은 여성해방 관련 글을 기고하며 삽화를 그리고, 소설을 쓰는 등 다방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변호사 출신으로 외교관이 된 남편을 따라 1927년 유럽과 미국을 1년 9개월간 여행한 경험을 갖기도 했다. 파리 체류 시기, 로제 비시에르(Roger Bissiere)가 운영하던 스튜디오에서 공부한 이력도 있다. 이때 이후 초기의 인상파적인 작품에서부터 변모해 화가의 내면 상태를 주관적으로 표출하는 대담한 작품들을 남겼다. '자화상'으로 알려진 이 작품 또한 대상의 묘사에 충실하기 보다, 어둡고 우울한 정조를 강조한 작품이다.

그러나 나혜석의 결혼생활은 순탄하지 못했다. 유럽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후, 이들은 이혼했다. 당시 이혼녀는 사회적 낙인의 대상이었지만, 오히려 나혜석은 이혼의 이유를 낱낱이 밝히고 독립적인 주체로서 여성의 자율권을 끊임없이 주장했다. 또한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니요, 오직 취미일 뿐'이라는 당시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여지기 어려웠을 주장을 서슴지 않았다. 결국 점차 가족과 사회 전체로부터 완전히 외면당했고, 불우한 말년을 보내다가 1948년 행려병자로 생을 마감했다.

- 국립현대미술관

 

이쾌대, <푸른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 1948-49년경, 캔버스에 유채, 72×60cm, 개인 소장 /국립현대미술관

이쾌대는 도쿄제국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한 후 1939년 귀국해 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며 화단의 주도적 인물로 부상했다. 1945년 해방 후 극심한 사회 혼란 속에서도 그는 작업에 매진했고, 이 시기 많은 걸작을 남겼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미군의 포로 신세가 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생활하게 된다. 1953년 남북 휴전협정 체결 시 포로교환이 있었을 때, 이쾌대는 북을 택했다.

전쟁 후 남측 정부는 오랫동안 월북 작가에 대한 언급을 금지했다. 남측에서 이들 작품을 연구하고 전시할 수 있게 된 것은 1988년에 이르러서야 가능해졌으며, 이쾌대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남쪽에 남아 이쾌대의 작품을 수십 년간 소중히 보관해온 바로 그의 가족들 덕분에 그의 작품이 알려지게 됐고, 결국 그의 예술적 성취는 제대로 조명 받게 됐다.

<푸른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은 전문적인 화가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한 작품이다. 꽉 다문 입술과 부릅뜬 눈으로 관객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화가는 뚜렷한 확신에 차 있다. 이쾌대는 근대기 한국 엘리트 남성들이 자주 착용하던 서양식 페도라를 쓰고 있으며 왼손에는 서양화 제작을 위한 팔레트를 들고 있다.

이처럼 그의 작품에는 서양적인 것과 한국적인 것이 공존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런 서양화 도구들과 함께 한국의 수묵화나 서예를 제작할 때 사용되는 모필이 병치되고 있는 점이 바로 그런 예다. 화가는 한국의 전통 복장인 푸른 색 두루마기를 입고 있으며, 시골 풍경을 배경으로 등장하는 여성 인물들 또한 한국의 전통의상을 입은 채 한국적인 요소를 더하고 있다.

- 국립현대미술관

 

박수근, <유동>, 1963, 캔버스에 유채, 96.6×130.5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박수근연구소 /국립현대미술관

박수근은 한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근대화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가정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에 초등학교를 다닌 것이 학력의 전부였다. 그러나 12살 때 우연히 장 프랑수아 밀레의 '만종'을 화집에서 보고 감동을 받아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됐다. 그는 밀레의 작품이 평범한 농부의 일상을 소재로 하면서도, 마치 종교화를 보는 것 같은 성스러움을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후 박수근의 작품 또한 평범한 한국인들의 소박한 일상과 노동, 그리고 놀이를 소재로 했다.

박수근의 작품은 화면 전체에 화강암과 같은 두꺼운 물감층으로 뒤덮여 있는데, 이는 당시 한국의 다른 작가에게서는 볼 수 없는 혁신적이고 독보적인 방식이다. 화강암은 한반도 전역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돌로, 오랜 세월을 견뎌낸 거칠고 단단한 특성으로 인해 한국이라는 나라와 한국인의 미의식을 반영하는 매개체라 할 수 있다.

박수근은 북한의 고구려 고분벽화 발굴에 영감을 얻었다고도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은 무덤 안 석조 벽면에 그려진 벽화의 질감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또한 박수근 작품을 통틀어 ‘놀고 있는 아이들’이라는 주제는 자주 등장하는데, 이 작품은 그 중에서도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는 아이들의 따뜻한 연대감이 느껴지는 대표작이다.

- 국립현대미술관

위 작품 이외에도 유럽인의 눈에 낯설게 느껴졌을 한국인의 모습을 담은 배운성의 <가족도>, 판문점 회담장을 그린 변월룡의 <1953년 9월 판문점 휴전회담장>, 조국의 자연을 담은 김환기의 <산월>, 한국전쟁 후 해방과 전쟁의 감정을 자연 풍경으로 표현한 유영국의 <작품> 등 한국 근대 시기를 고스란히 담은 당시 그림들을 만나볼 수 있다.

마이클 고반 LACMA CEO이자 왈리스 아넨버그 디렉터는 “한국 미술사에 있어서 엄청난 변화의 시기를 조명하고 다른 문화와의 접촉과 교류를 통해 예술가들이 어떻게 새로운 창작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라며 전시를 소개했다.

특히 이번 전시는 방탄소년단 RM이 오디오가이드 음성녹음 재능기부에 참여해 화제를 모았다. RM은 작품 선정 과정에 직접 참여해 총 10점을 선별하고, 그에 대한 설명을 영어와 한국어로 각각 녹음했다. 이는 전시장 및 국립현대미술관 누리집을 통해 감상할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LA카운티뮤지엄 공동주최 기획전 <사이의 공간: 한국미술의 근대>는 2023년 2월 19일까지 미국 LA카운티뮤지엄 레닉스 파빌리온에서 진행된다.

2017년 내내 뜨거운 감자였던 전안법은 현실과 다른 불합리함으로 수공예 작가들의 목을 죄어오는 올가미 같았습니다. 극적으로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많은 작가들이 한숨 돌릴 수 있게 됐지만 아직 바뀌어야 할 부분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핸드메이커는 이러한 불합리에 ‘NO’를 외치기 위해 시작됐습니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은 정말 매력적인 일입니다. 그들은 실을 꿰 엮기도, 펜과 물감 으로 그리기도, 흙을 빚어내기도, 금속을 녹여 두드리기도, 정성스런 요리를 만들어 내기도 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만들고 있는 세상을 함께 들여다보려 합니다.

핸드메이커는 국내외 다양한 문화·예술·산업 현장을 발로 뛰며 취재하는 독립 매체로서 주체 적인 취재와 기사를 통해 여러 미디어·포털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기사의 가독성을 저해하는 광고 배너를 통해 수익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이는 독자를 위한 선택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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