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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바다의 풍어를 기원하는 날엔 항상 그가 있었다, 제주칠머리당영등굿 故 김윤수 보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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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바다의 풍어를 기원하는 날엔 항상 그가 있었다, 제주칠머리당영등굿 故 김윤수 보유자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2.09.05 18: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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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윤수 심방 /문화재청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국가무형문화재 ‘제주칠머리당영등굿’ 김윤수(1946년생) 보유자가 병환으로 9월 2일(금) 오후에 별세했다. 1946년에 태어난 김윤수 보유자는 제주도에서 ‘큰 심방(무당)’으로 널리 이름을 떨친 김정호의 증손자로, 조상 대대로 무당의 신분을 이어받아온 세습무 집안의 자손이다. 소년 시절 신병을 앓다가 16세 때부터 심방인 큰어머니와 함께 굿판을 다니면서 굿을 익혔고, 29세부터는 굿을 본격적으로 주재하면서 차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초감제 /문화재청

제주도 사람들에게 영등굿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영등의 때가 되면 잔잔한 바다와 풍어를 기원하는 여러 굿이 섬 전역에 걸쳐 벌어진다. 이들 굿 가운데 칠머리당에서 열리는 ‘제주 칠머리당 영등굿’이 가장 중요하다. ‘제주 칠머리당 영등굿’이라는 이름은 바람의 여신에 대한 굿임을 의미하지만, 마을의 여러 수호신과 바다의 용왕에게 바치는 굿이기도 하다.

‘제주 칠머리당 영등굿’은 바다의 평온과 풍작 및 풍어를 기원하기 위해 음력 2월에 제주에서 시행하는 세시 풍속이다. 처음엔 1980년 안사인(1928~1990) 심방이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으면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1980년 11월 17일 ‘중요무형문화재 제71호’로 지정된 영등굿은 세시 절기에 의한 풍어기원적 성격에 가까운 의례라는 점에서 제주도의 중요한 당굿 가운데 하나다.

제주도에서는 2월을 영등달이라고 하는데, 2월 영등달에는 영등 할아버지가 들어와서 여러 곳을 거쳐 다시 2월 보름날에 나가다고 여긴다. 칠머리당은 영등이 나가는 과정에서 송별제를 하는 당이고, 이 당의 영등굿은 규모나 단골들의 참여 규모가 매우 큰 영등굿 가운데 하나다. 영등을 보내는 굿이므로 이를 ‘송별제’라고 지칭하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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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굿이란 것이 위험한 미신이라는 부정적인 견해가 많았다. 하지만 제주도 어부들은 심방과 함께 깊은 계곡이나 바다의 동굴을 찾아 은밀하게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제례가 중요무형문화재 제71호로 지정되면서 이 의례는 다시 살아나게 됐다.
 

띄워보낸 짚배 /문화재청
군문춤 /문화재청

섬이라는 혹독한 환경 조건 때문에 제주도에는 사람이 살기에 힘들었고, 자연히 섬사람들은 바다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조선시대의 문헌 『동국여지승람』에서는 ‘부도덕한 공양을 가치 있게 여기는 풍습이 있으며, 숲, 호수, 산, 나무, 돌 등의 신령을 받드는 제사가 이루어진다.’고 기록했다. 이러한 기록으로 봤을 때 제주도에는 여러 가지 제의적 활동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제주 칠머리 영등굿'은 제주 건입동의 본향당인 칠머리당에서 하는 굿이다. 건입동은 제주도의 작은 어촌으로 주민들은 물고기와 조개를 잡거나 해녀 작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마을 수호신인 '도원수감찰지방관'과 '요왕해신부인' 두 부부에게 마을의 평안과 풍요를 비는 굿을 했다. 부부수호신과 함께 영등신을 맞이하여 소중히 위하는 굿을 했는데, 영등신은 외눈박이섬 또는 강남천자국에서 2월 1일에 제주도에 들어와서 어부와 해녀들에게 풍요를 주고 2월 15일에 본국으로 돌아간다는 내방신(來訪神)을 뜻한다.

영등신은 숭배를 받기도 하지만 바다를 휘저어 사람들의 목숨을 위협한다고 알려져 있어 사람들에게 두려운 존재이기도 했다. 영등신이 섬에 와 있는 2월 초부터 중순까지 제주의 바다는 특히 험난하고 거칠다. 섬사람들은 영등이 지나가는 자리의 바닷가 조개류는 껍질만 남게 된다고 믿었는데 이것은 영등신이 조개류의 속을 다 까먹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고.

그러나 영등이 떠나는 날이 되면 영등은 해안을 따라 씨를 뿌려주어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며, 영등이 떠나면서 바다를 다시 맑게 해서 해조가 잘 성장하도록 도와준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영등이 머물고 있는 때는 가장 중요한 때고, 사람들은 영등에게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면서 칠머리당에서 굿을 벌여 영등이 머무는 기간을 기념하는 행사를 열었던 것이다.
 

무구들 /문화재청
용왕맞이 /문화재청

당굿은 매년 음력 2월 1일과 2월 14일에 하며 영등신이 들어오는 음력 2월 1일에는 영등환영제를, 영등신을 떠나보내기 전날인 2월 14일에는 영등 송별제를 지낸다. 주민들은 영등신이 환영제보다 성대한 송별제를 받고 이튿날인 15일에 구좌읍 우도에서 다시 송별제를 받은 뒤 떠난다고 믿는다. 따라서 환영제 때는 배의 주인이나 신앙심이 깊은 이들만 모여서 간소하게 굿을 하고 송별제는 어업 관계자와 해녀, 그 밖의 신앙민들이 많이 모인 가운데 하루 종일 큰굿을 한다.

굿날이 되면 건입동 주민뿐 아니라 제주 시내의 어부와 해녀들도 참가한다. 각 가정에서 제사에 쓰일 음식을 차려서 당으로 가져온다. 매인심방이 징과 북, 설쇠 등의 악기 장단에 맞추어 노래와 춤으로 굿을 진행한다.

굿의 순서는 모든 신을 불러 굿에 참가한 집안의 행운을 비는 초감제, 본향당신인 도원수감찰지방관과 요왕해신부인을 불러 마을의 평안을 비는 본향듦, 용왕신과 영등신이 오시는 길을 닦아 맞이하고 어부와 해녀의 안전을 비는 요왕맞이, 마을 전체의 액을 막는 도액막음, 해녀가 바다에서 잡은 것들의 씨를 다시 바다에 뿌리는 씨드림, 영등신을 배에 태워 본국으로 보내는 배방송, 처음 불러들인 모든 신들을 돌려보내는 도진으로 끝이 난다.
 

故 김윤수 심방 /문화재청

故 김윤수 심방은 자신까지 4대째 무업을 이은 심방 집안 출신이다. 그의 집안에는 심방 자손이 나오게 된 내력이 있다. 김 심방의 6대조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고조부가 산터(묘지터)를 보기 위해 아는 지관을 데려갔는데, 지관이 한 장소를 가리키며 그곳에 산을 쓰면 자손은 많이 생기지만 심방 자손이 나올 거라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고조부는 심방 자손이 나와도 좋으니 그곳에 산을 쓰게끔 달라고 해서 묘를 만들기로 한다.

그런데 지관이 하관할 시간이 되면 서쪽으로 삼석 소리, 즉 굿하는 소리가 날 것이고 굿 소리가 나면 그때 하관하라고 말하고 갔다고 한다. 하관 시간이 되니 정말 ‘궷드르’(궤평동. 제주시 조천읍 와흘리의 지명) 마을에서 굿 소리가 났다고. 굿 소리가 난 후에 하관을 했는데 정말 그 후에 증조부 때부터 심방 일을 하기 시작했고 4대째 무업을 계속 이어온 것이다.

김 심방을 처음 무업(巫業)의 길로 이끈 이는 큰어머니 문옥선 심방이다. 문옥선은 큰아버지 김천년의 둘째 부인으로 김 심방에겐 큰어머니였다. 김천년은 당시 제주도에서 이름난 심방 중 한 사람이었으며 문옥선은 남편의 자식들이 무업에 관심이 없자 김 심방에게 큰아버지 대를 이으라고 권한다.

김 심방은 13세 무렵부터 큰어머니를 따라 굿판에 다니기는 했지만 무업을 하지 않으려 했는데 1, 2년이 지나면서 몸이 아프기 시작하자 큰어머니가 계속 무업의 길을 따르라고 권한다. 큰어머니는 "심방 일을 배워 큰아버지의 대를 이어야 병이 낫는다"는 말을 했고, 머리가 아프고 피곤해 병원에도 다녀 봤지만 소용이 없었던 김 심방은 그 말에 심방이 되기로 결심한다. 김 심방은 그 뒤로 큰어머니를 따라다니면서 굿을 배우기 시작, 16세 때부터 본격적으로 무업을 하기 시작했다.
 

故 김윤수 심방 /문화재청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당시 김 심방은 19살의 나이에 큰어머니를 따라다니던 때 한 가정집에서 굿을 하다 머리에 돌을 맞고, 돌을 던진 동네 청년들과 큰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당시엔 심방에 대한 차별도 심했고, 굿이라는 이유로 단속도 심해 김 심방은 아예 모든 일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와 무작정 시간을 보냈다.

그러자 다시 머리가 아파 오기 시작했고, 결국 그는 1년도 안 돼 제주도로 다시 내려와 굿을 하러 다녔다. 하필이면 당시 새마을운동으로 인한 '미신타파'운동으로 인해 김 심방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굴속에서 굿을 하거나 숲속에 천막을 치고 굿을 해야 했다. 그의 첫 신굿은 1986년, 신촌리 자신의 집에서 14일 동안 진행한 굿이다.

제주 칠머리당 영등굿은 1980년 11월 17일에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첫 기능보유자는 안사인 심방이었다. 김 심방은 안 심방과도 일찍부터 굿을 함께 다니던 사이였으며, 1986년에 제주 칠머리당 영등굿 보존회가 만들어지면서 안 심방과 함께 많은 활동을 했다. 제주 칠머리당 영등굿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사람들의 시선도 점점 바뀌기 시작했다. 안 심방이 타계한 뒤 1995년에는 김 심방이 칠머리당영등굿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배방선(영등신) /문화재청

김 심방은 2009년 제주 칠머리당영등굿이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에 등재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 제주 칠머리당 영등굿은 우리나라의 유일한 해녀의 굿이자 영등신에 대한 제주도 특유의 해녀 신앙과 민속신앙이 담겨 있는 굿으로, 2009년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으로 등재되었다. 

김 심방은 영등굿에 대해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관광객의 이목을 끌려고 축제의 성격을 띠기도 하는데 제주 전통과 원형, 그 본질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 많은 사람과 함께 하되 원형을 유지하면서 전승, 발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굿은 미신이라는 사람들의 편견을 떨쳐내며 김 심방은 제주칠머리당영등굿보존회의 회장으로서 정기공연, 전수교육 등 영등굿의 보전과 지속적 전승을 위하여 끊임없이 헌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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