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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가 아님에도 어느 것에서도 볼 수 없었던 새로움, 아르카익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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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가 아님에도 어느 것에서도 볼 수 없었던 새로움, 아르카익 미술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2.10.03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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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과 사람 모양의 조각상 /flickr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우리가 미술이라 부르는 모든 것은 흔히 그리스라 불린 지역에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선사시대 이래로 어느 시대이든 모든 미술이 그리스에서 시작되었다니 저절로 경외심이 생기는 대목이다. 약 1천 년에 걸쳐 있는 그리스 미술은 기하학 양식, 아르카익 미술, 클래식 미술, 헬레니즘 양식으로 나뉜다.

아르카익 미술은 ‘고식의’, ‘더 낡은’, ‘태초의’라는 뜻의 그리스어 ‘아르카이오스(archaios)’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특유의 생경하고 미숙한 표현 양식을 가리키며 기술적으로는 그리스의 문화적 황금기 시대에 나왔던 작품들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지만 꾸밈없고 맑은 정신성을 특징으로 한다.

고대 그리스 예술은 사람들이 알파벳을 쓰기 시작하고, 무기와 여러 도구들이 철로 만들어지고, 첫 올림픽이 열리던 때 서서히 문화적 정체성을 갖추며 자라났다. 당시 사회적 불안 속 사람들은 간간이 도자기를 만들던 때였고 건축이나 다른 예술의 발전은 더딜 때였다. 그러다 그리스와 이집트 사이 해상 무역이 이루어지면서 그리스 문화가 전체적으로 급격히 발전해 나갔다.

미술사에 있어서 이 ‘아르카익’이란 표현은 일반적으로 성숙기 이전의 치졸하고 미숙한 시기의 양식을 뜻하기도 한다. 고대 시대는 문화의 발전 자체가 사람들이 시도한 실험의 연속이었지만, 그리스인들의 재능과 예술이 꽃 피는 것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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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그리스 미술은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인 무늬가 지배했던 아주 초기의 양식에서 이집트의 영향을 받은 자연 주의적 양식으로 바뀌어 갔다. 크레타, 키프로스에 살았던 장인들이 그리스인들과 접촉하면서 예술가들은 보석, 상아, 금속 세공 등 다양한 기술을 전수받을 수 있었다. 
 

동물과 식물의 무늬로 장식된 도자 /flickr

그리스 예술인들은 외지인들의 양식, 무늬, 모티브를 그들 자신의 신화와 섞어 묘사했으며 고대와 고전 그리스 미술을 일찌감치 확립할 수 있었다. 기원전 7세기 그리스는 산과 바다로 둘러싸여 여러 자치적인 도시 국가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스 본토에서 예술로 유명해진 아테네, 코린토스, 스파르타 등은 각 지역마다 개성적인 특성을 보인다. 스파르타와 라코니아인들은 상아와 청동으로 조각상을 만들고, 코린토스인들은 작은 동물이나 식물을 모티브로 작품을 제작했다. 반대로 아테네인들은 꽃병에 신화적인 장면을 묘사하곤 했다고. 
 

코레 /Wikimedia Common CC BY-SA 2.5

일종의 국가들이 모인 곳이라 각기 쓰는 언어도 달랐고 이 시기 알파벳을 쓰는 방식도 달랐지만 그리스어 자체는 그리스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묶는 주요한 요소였다. 그리스인들은 올림피아나 델포이에서 열리는 범국민적 축제와 경기에 참가하기 위해 모였는데 당시 그리스 동부와 서부에서 온 작품들도 한데 모였다고 한다. 서로 다른 작품들이 만나 시너지를 이루고 각각의 문화가 만나 영향을 받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스 예술인들은 점점 더 자연 주의적인 모티브를 선호했는데, 이 시기엔 남성의 나체를 상징하는 '쿠로스(Kouros)와 여성 조각상인 코레(kore)의 두 가지 유형이 지배적이었다. 조각상들은 7세기부터 신들로 묘사되었고 이 전통은 미케네 시대 이후 사라졌다. 그리스인들은 주로 단단한 돌로 만든 실물 크기의 인간상을 조각했는데, 남자는 주로 '쿠로스'와 여자는 '코레'로 대표되었다. 쿠로스와 코레는 넓은 어깨, 가느다란 허리에 두 발을 땅에 고정한 다소 딱딱한 스타일로 조각되었다. 
 

사람이 동물이 합쳐진 기묘한 모습 /flickr

덧붙여 그리스 조각은 이집트와 시리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조각가들은 돌, 테라코타, 청동으로 조각상을 만들고 상아와 뼈로 미니어처들을 만들었다. 아르카익 시대 미술은 특히 조각상이 대표적인 예술품 중 하나로 그리핀이나 세이렌 같은 신화적인 동물이 조각상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디오니소스를 묘사한 조각상 /flickr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각상은 조금 덜 엄격해지고, 조금 더 현실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다. 조각가들이 인간의 몸을 경직된 자세가 아닌 자연 주의적인 자세로 묘사하는 기술적 능력이 향상된 덕분이었다. 해부학이 연구되었고, 그 결과 조각상들은 훨씬 더 실제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청동은 꼿꼿이 서 있는 조각상을 만들기에 적합했고 훨씬 더 자연스러워 보이는 조각을 만들기에 가능했다.

성 안, 성 밖 공동묘지 등지에 세워진 이 석상들은 신에게 바치는 제물이나 무덤을 표시하는 것으로 쓰였다. 아테네에 살았던 귀족들은 특히 젊은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난 사람을 기리기 위해 도시와 그 주변에 값비싼 기념비를 주로 세웠는데 대부분 부조로 장식된 것들이었다. 

이 시기 확립된 고대 그리스 미술 운동은 후기 고전 시대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자연 주의적 조각상이 대규모로 만들어지고 보석 세공은 세련되어졌으며 회화는 새로운 재료들을 도입해 제작됐다. 
 

두상 조각 /flickr

그리스인들은 인간의 형태가 예술의 가장 중요한 주제라 생각했다. 고대 시대의 조각상들은 아름다움, 경건함, 명예나 희생 같은 이상을 위한 묘사를 주로 했다. 조각품을 만든 사람들은 의외로, 처음에는 사회적 지위가 낮았지만 점점 더 많은 조각가들이 유명해지고 부유해지면서 이들도 조각상에 서명을 하게 된다. 물론 안타깝게도 나중에는 조각상에 서명이 분리되는 일도 흔했다고. 고대 로마의 그리스인 철학자·저술가인 플루타르코스도 '우리는 예술 작품을 존경하지만 예술 작품을 만든 사람은 경멸했다'고 언급했으며, 당시 고대 세계에선 이런 견해가 일반적이었다는 게 학자들의 추측이다.

건축 면에서는 대표적으로 도리아 양식과 이오니아 양식이 그리스 건축에 자리를 잡게 된다. 지금도 두 가지 양식은 시대를 초월해 조화롭고 보편적인 건축미의 기준이 되었다. 도리아 양식이 4-5세기에 지배적이었다면 이오니아 양식은 후기 헬레니즘 시대에 대중화되었다. 두 가지 양식을 갖춘 건축의 기둥들은 종교적, 의식적인 용도의 건물들 외에도 평범한 사람들의 집까지 장식하게 된다. 이에 그리스인들의 취향과 관심이 높아지면서 부조, 장식이 기둥에 추가되었다. 특히 사모스의 폴리크라테스, 아테네의 페이시스트라토스와 같은 왕들이 시행했던 건축 프로젝트의 결과물로 건축물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아크로폴리스 /flickr

아마 고대 그리스 건축의 최고봉이라 하면 아테에 외곽 지역에 있는 아크로폴리스를 꼽을 것이다. 비록 페르시아에 의해 이 최초의 신전들이 파괴되었지만 다시 그리스 문화가 황금기에 접어들 때 페리클레스가 조각가 파디아스를 불러 새 신전들을 건설하도록 명했다고. 
 

붉은색과 흑색의 조화로운 도자 /flickr
양쪽에 손잡이가 달린 도자 /flickr

그리스에서 가장 발달된 예술 형태라 하면 도자를 들 수 있다. 대개 큰 꽃병이나 그릇, 식기를 포함하며 초기 기하학 양식을 띤 도자기들은 가장 훌륭한 그리스 예술품들 중 하나로 꼽힌다. 기하학 문양의 반복되는 패턴으로 출발했던 그리스 도자는 흑색과 붉은색의 도자가 많았다. 이 시기엔 도자 장식 또한 추상적 양식에서 비유적 양식으로 바뀌게 된다. 

7세기 코린토스의 화병 화가들은 흑색 도자에 윤곽이나 무늬 등을 그려 넣는 디테일을 선보였다. 도자기나 화병 등의 그릇들은 대부분 부장품으로 무덤에 묻히거나 해외로 수출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현존하는 대부분의 토기는 술과 물을 섞어 넣는 용도의 그릇인 크레이터, 물을 긷거나 또는 담아 나르는 데 쓰인 항아리인 히드리아, 기름병과 향수병, 물컵 등이 남아 있다. 다만 음식을 나르거나 담는 그릇은 별로 남아 있지 않으며 작은 크기의 미니어처는 대량 생산되어 사찰에서 제물로 쓰였다고.

초기 그리스 도시들 중 규모가 정말 작은 도시에서도 그들만의 지역 특색이 담긴 도자기를 생산했다고 한다. 예술로서의 가치가 있던 도자기는 에게 해 섬, 크레타 섬,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등지에서 생산되었고 후기에는 코린토스와 아테네 두 도시에서 주로 도자기가 생산되었다. 두 지역에서 생산된 도자기들은 그리스와 전 세계로 수출되었고, 두 지역에서 만든 화분이나 꽃병들은 스페인과 우크라이나 같은 먼 곳에서도 발견되었으며 이탈리아에선 너무나도 흔해 18세기 '에트루리아 꽃병'이란 이름으로 수집가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아르카익 스마일 /flickr

아르카익 미술의 조각상을 보면 가끔 웃는 모습이 눈에 띈다. 그 미소를 '아르카익 스마일'이라 부른다고 한다. 초기 특유의 어설프면서도 서툰 느낌이 없지 않아 있지만 후기 헬레니즘 시대보다 훨씬 더 자연스럽고 생명력까지 느껴진다는 평을 받는다. 성숙기 이전의 치졸하고 미숙한 시기의 양식을 '아르카익'이라 부른다고는 하지만 지금 본다면 오히려 성숙해 보이면서도 노련미까지 느껴지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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