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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탐구] 해학을 가지려 애썼던 작가는 별이 되었다, 장 자크 상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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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탐구] 해학을 가지려 애썼던 작가는 별이 되었다, 장 자크 상뻬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2.08.17 09: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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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뻬의 스케치 /flickr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그를 떠올리면 프랑스의 오래된 동화책이 생각난다. 어린 마틸다와 심술궂은 교장 선생님, 꾸덕꾸덕한 초콜릿 케이크를 기억나게 하는 퀜틴 블레이크의 삽화와 더불어 어린 시절 어린이들을 즐겁게 해 준 또 하나의 삽화가가 있었다. 바로 꼬마 니꼴라’와 소설 ‘좀머 씨 이야기’ 삽화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프랑스의 만화가 장 자크 상뻬다.

AFP 통신에 따르면 그는 지난 11일 오후 자신의 별장에서 아내와 가까운 친구들 곁에서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상뻬의 아내인 마르틴 고시오 상뻬는 AFP 통신을 통해 그의 별세 소식을 알렸다. 상뻬의 친구이자 고인의 전기를 쓴 작가 마르크 르라트팡티도 “상뻬가 목요일 저녁 별장에서 아내와 가까운 친구들 곁에서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고 전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리마 압둘 말락 프랑스 문화부 장관은 SNS를 통해 "상뻬는 이제 이곳에 없지만 그의 작품은 영원하다"며, "다정함과 우아함, 장난스러움으로 그는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줬다"고 전했다.
 

장 자크 상뻬 /Wikimedia Common

1932년 8월 17일 보르도에서 태어난 상뻬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처음엔 양부모에게서 길러졌지만 친어머니에게 돌아간 그는 알코올 중독자인 의붓아버지 밑에서 숱한 폭력을 감내해야 했다. 그의 부모는 하루 종일 싸웠고, 상뻬는 절망적인 유년기를 보내야 했다. 그는 탐정 소설과 재즈 음악에서 도피처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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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는 잘했지만 학교에서 퇴학당한 이후 우체국, 은행, 철도 등 어떤 곳에도 취직을 하지 못했다. 방문 판매원으로 치약을 팔거나 자전거로 와인을 배달하는 등의 궂은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 나갔다. 그의 그림은 소년 시절, 악단에서 연주하는 것을 꿈꾸며 음악가들을 그리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사실 그의 꿈은 만화가가 아닌 재즈 피아니스트였다고.

후에 나이를 속이고 군대에 입대하게 되는데 이유는 하나였다. 군대가 자신에게 일자리, 따뜻한 침대를 줄 수 있는 유일한 장소라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그러나 군대도 그에게 안식처는 아니었다. 그는 망을 보는 경계 임무를 맡은 도중에도 그림을 그리다가 걸려 징계를 받았을 때 진짜 나이가 드러났고 쫓겨나듯 제대했다.
 

꼬마 니꼴라 /flickr

파리로 간 그는 자신의 운을 시험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루마니아 출신의 프랑스 현대화가 프랑수아 앙드레 뱅상, 프랑스의 영화감독 자크 타티에게 영향을 받았고, 벨기에 잡지 '르무스티크'에 일러스트와 수채화풍의 표지 그림을 그려 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1953년까지 상뻬는 파리의 유머 주간지 '르 리레'를 비롯해 여러 잡지에 자신의 삽화를 게재했다. 르무스티크에 실린 표지는 약 60여 개의 삽화가 들어갔다.

당시 그의 작품 중 일부는 유명한 와인 브랜드 광고에 등장했던 '니꼴라스'라는 어린 소년을 묘사하고 있었다. 이 캐릭터에 매료된 그의 에이전시는 상뻬에게 연재물로 만들어 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상뻬는 만화를 만든 경험도 없었고, 만화라는 소재에도 애착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그는 다른 예술가에게 이 프로젝트를 부탁한다. 그 사람이 1950년대 초 프랑스로 돌아왔던 작가 르네 고시니다. 
 

르네의 노트 /flickr

그리고 상뻬는 르네와 함께 전설적인 꼬마들이 나오는 시리즈 '꼬마 니꼴라'를 탄생시킨다. 상뻬는 곧 르네와 친구가 되었고, 상뻬는 나중에 르네를 자신의 첫 번째로 진정한 친구라고 불렀다. 상뻬는 르네를 두고 "내가 없었다면 르네가 '꼬마 니꼴라'를 쓰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도 르네 없이는 '꼬마 니꼴라'를 그릴 일도 절대로 없었을 거다"라는 말도 남겼다고.

상뻬는 르네에게 보르도에서 지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들려주었고 이 이야기들은 '꼬마 니꼴라'의 기초가 되었다. 당시 상뻬는 어린 시절 폭력적인 아버지에게서 겪은 경험, 학교에서 친구들과 축구를 했던 기억을 바탕으로 만화를 그렸다. 르네는 1인칭으로 글을 썼고, 이 스토리는 파리의 한 소년이 가진 평범한 일상을 기록하는 식이었다. 이 꼬마는 아주 작았지만 어른들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순수함이 있었다.

거기에 상뻬의 삽화까지 더해진 '꼬마 니꼴라'는 1950년대 프랑스인들의 어린 시절을 이상적으로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얼굴이 빨개지는 아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재채기를 하는 아이, 자전거를 잘 고치지만 못 타는 아이,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삶의 진정한 가치와 행복을 찾아가는 상뻬의 캐릭터들은 타인과의 강박적인 비교와 경쟁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에게 따뜻함을 전했다. 
 

작은 아이, 니꼴라 /고양문화재단

'꼬마 니꼴라'는 아동 문학처럼 보이지만 읽는 대상은 어른과 청소년이었다. 르네는 니꼴라의 친구들 캐릭터를 순차적으로 만들어 '꼬마 니꼴라'의 세계를 넓혔다. 1964년 르네는 '꼬마 니꼴라'로 프랑스 문학상을 받았고 전국적인 성공 이후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 사람들이 읽을 수 있게 됐다. 

상뻬는 2018년 "'꼬마 니꼴라'는 내가 자라면서 견뎌 왔던 비참함을 다시 한번 되짚어 보는 방법이었다"라는 말을 했다. 그만큼 상뻬에게 '꼬마 니꼴라'는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잡지 '뉴요커' 표지를 그렸던 상뻬 /이베이

상뻬는 파리에 있는 동안 룩셈부르크의 자르댕 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사람들을 관찰했다. 그는 '뉴요커'지의 표지를 그리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그는 '뉴요커' 표지를 그리면서 그제야 제 인생에 자신 스스로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그는 1978년부터 30년간 수십 차례 '뉴요커'의 표지 그림을 그렸고 특유의 낙천성과 유머 넘치는 그림을 대중들은 좋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뉴요커'의 표지 작가가 되는 건 당대 가장 주목받는 작가임을 증명하는 일이었고 특히 상뻬는 프랑스 작가 최초로 '뉴요커' 표지 작업을 의뢰받았다고 한다. 상뻬는 1978년 8월 14일 '뉴요커'의 첫 표지를 장식하며 2015년까지 100여 편이 넘는 표지 그림을 그렸고, '뉴요커'의 표지 작업은 상뻬가 삽화가에서 아티스트로서 도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진정한 우정' /열린책들

그는 외부인이 들여다보는 도시의 생활을 생각했다. 〈르몽드〉 소속 작가 플랑튀(Plantu)는 "상뻬의 그림에는 '침묵'이라는 감정이 있다"고 전했다. 그의 캐릭터들은 많은 군중 속으로 사라지거나, 또는 혼자 외롭게 길을 걸어가는 식이었다. 그의 그림 대부분은 글이나 말풍선이 거의 없었지만, 종종 달리는 짧은 글들은 등장인물이 품고 있는 걱정이나 희망을 암시했다. 

상뻬가 좋아하는 주제는 어린이, 나무, 고양이, 음악가와 파리에서 사는 삶이었다. 특히 자전거를 타는 사람은 상뻬가 가장 좋아하는 주제 중 하나였다. 그는 2019년 잡지 '뉴요커'와의 인터뷰에서 "항상 꾸고 있던 꿈 중 하나였다. 일요일 아침마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친구들을 만드는 것이.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전했다. 
 

'좀머 씨 이야기' /KT&G 상상마당 갤러리

그는 1992년 삽화 작업을 한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 씨 이야기'로 끊임없이 고독을 생산하는 인간과 사회의 모순을 유머러스하게 포착하면서 삽화의 거장으로 다시 한번 인정받았다. 그의 작품은 해학적이고 때로는 비판적이며, 현대사회를 신랄하게 비꼬고 있다. 그러나 그 비판 안에는 점잖고 따스한 유머가 담겨 있다. 오랫동안 변치 않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바탕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욕망과 갈등, 문명 비판적인 요소에 인생과 사랑을 녹여 부드럽고 친절하게 풍자한다. 

상뻬는 삶의 어두운 단면들을 유머와 풍자로 승화시켜 결코 가볍지 않은 이야기들을 한없이 가벼운 그림들로 표현한다. 간결한 문체와 그림으로 이루어진 그의 작품은 누구나 쉽게 공감하면서도 왠지 모를 씁쓸한 웃음을 짓게 만들며 현실과 유머의 경계를 넘나든다는 평을 받는다. 
 

'뉴욕의 상뻬' /신세계갤러리 센텀시티

"언젠가 종이 한 뭉치를 사서 좋은 그림이 그려질 때까지 작업을 계속했던 적이 있다. 종이 한 뭉치를 다 썼건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아마 100장은 족히 그렸던 것 같다. 어떤 때는 삽화 한 장을 그리느라 두 달을 매달린 적도 있다. 그리고, 또 그리고, 또 그리고…." 

책을 내지 않았어도 그는 항상 사람들을 관찰하며 스케치를 했다. 백발이 성성했어도 그림에 대한 아이디어를 모으기 위해 뉴욕으로 자주 여행을 떠났던 그다. 어린 시절은 불우했지만 그가 종이 위 그리는 세상은 우울을 굳이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그는 고독하면서도 해학을 표현하려 애썼다. 특유의 낙천성, 유머를 잃지 않으려 했던 그는 90세 생일을 앞두고 별이 되었다. 

2017년 내내 뜨거운 감자였던 전안법은 현실과 다른 불합리함으로 수공예 작가들의 목을 죄어오는 올가미 같았습니다. 극적으로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많은 작가들이 한숨 돌릴 수 있게 됐지만 아직 바뀌어야 할 부분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핸드메이커는 이러한 불합리에 ‘NO’를 외치기 위해 시작됐습니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은 정말 매력적인 일입니다. 그들은 실을 꿰 엮기도, 펜과 물감 으로 그리기도, 흙을 빚어내기도, 금속을 녹여 두드리기도, 정성스런 요리를 만들어 내기도 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만들고 있는 세상을 함께 들여다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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