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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이성의 쾌락을 예술로 표현하다, 바카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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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이성의 쾌락을 예술로 표현하다, 바카날리아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2.08.30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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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바카날리아가 생각나는 앙리 마티스의 'dance' /flickr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처음에는 신들을 위한 축제로 시작했다가 방탕의 끝을 달려 위법으로 금지되기도 한 축제가 있다. 바카날리아는 비공식으로 운영된 인기 있는, 떠들썩한 술잔치라는 뜻으로 기원전 200년에 로마로 건너왔다. 고대 세계엔 여러 알 수 없는, 신비한 종교나 축제들이 있었던 것처럼 이 의식에 대해 알려진 것은 그다지 많진 않다.

로마의 역사가 리비우스는 바카날리아에 대해 광란의 의식, 남녀노소나 사회계층의 높낮음 같은 건 상관없이 성적, 폭력적인 여러 모습들을 묘사했다. 적어도 7천 명의 지도자들과 추종자들이 체포되고 대부분은 처형되었다고 한다. 리비우스는 바카날리아가 로마의 끊임없는 도덕적 부패의 요소 중 하나라고 말한다. 

얼마나 떠들썩한 축제였는지 술의 신 바쿠스와 그의 아내 아리아드네를 중심으로 반인반수인 사티로스, 신녀들이 그들을 희롱하는 그림은 그리스 도기를 비롯해 로마 시대의 벽화나 그림에도 등장한다. 근세에는 루벤스 같은 유명 미술가들이 바카날리아에 영감을 받아 작품을 그렸다.
 

바카날리아는 날것의 축제 그 자체다 /flickr

로마에서 바쿠스를 기리는 축제는 '바카날리아'라 불렀으며 예술가들은 바쿠스와 이 축제를 주제로 작품을 많이 만들었다. 바쿠스를 기리는 축제에서 와인과 과일은 필수였고 신 또한 항상 축제에 참석했다. 사실 바쿠스라고 하면 잘 모를 수 있는데 디오니소스로 잘 알려진, 우리에게도 익숙한 술의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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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쿠스, 디오니소스 /flickr

바쿠스는 대중들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신이기도 했다. 인류에게 곡식을 심는 방법, 꿀을 채취하는 방법, 포도주를 만드는 방법을 가르치고 천문학에 대한 지식이나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방법 또한 알려줬다고. 사람들의 묘사 속 바쿠스는 표범 가죽으로 된 옷을 입고 대개 전차를 탄 모습이다. 그의 곁에는 수하들이 플루트을 연주하고 심벌즈를 두드리며 연호를 하고, 주변에는 거대한 호랑이와 표범들이 존재한다.
 

디오니소스를 따라 행진하는 님프들, 수행자들 /flickr

그의 수하들 중에서는 님프나 나이아데스 등 숲의 요정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동물 가죽을 걸치고 옻칠을 한 지팡이를 들고 다녔다. 바쿠스가 탄 전차는 말이 아닌 호랑이, 사자, 표범 등이 끌었는데 어떤 기록에서는 고양이가 두 마리였다는 둥, 네 마리였다는 둥의 여러 설이 있다. 190년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지배할 동안 만들어진 로마의 은화 데나리우스에는 바쿠스가 티르소스 지팡이를 들고 고양이와 함께 있는 모습을 그렸다고 한다. 

바카날리아에서 의식이 치러지는 동안 신은 그의 추종자들을 매료시키고, 그들을 억제했던 규칙과 규범의 족쇄에서 해방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 과정에는 춤, 음악, 자유로운 성행위 또한 포함한다. 바카날리아에서 사람들은 축제 자체를 즐겁고, 술에 취할 수 있는 행사였으며 일상생활에서 느꼈던 속박을 벗어던질 수 있는 기회로 생각했다. 의식 중 술에 취한 상태와 혼란이 뒤섞인 상황 자체는 신이 자신의 제자들을 지배하고 허용하는 순간이라는 말이 있다. 
 

 니콜라 푸생 'Bacchanalia' /flickr

바카날리아는 노예든, 정복자든, 비시민권자든 누구나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축제였다. 바쿠스를 숭배하는 건 아주 옛날부터 시작했다고 하며, 그리스 문명보다도 앞섰다고. 바카날리아는 일반적으로 시골이나 산 등지에서 열렸지만 때로는 그리스의 원형 극장에서도 열렸다고 한다.

다만 로마 당국은 바카날리아를 도덕 및 법을 어기는 것으로 봤고 이탈리아 전역에서 의식을 치르는 것을 탄압했다. 이 결과로 사람들은 숨어서 비밀리에 의식을 수행해야 했고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언급하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바쿠스는 이성과 개인주의, 지성을 뜻하는 아폴론과는 반대 측에 서 있었다. 바카날리아는 인간의 날것의 감정, 이성 따위 없는 혼돈 그 자체였다.

로마의 학자 리비우스는 이 축제가 마치 전염병처럼 로마에 퍼졌다고 전했다. 어떤 기록에서는 한 여자 하인이 바쿠스의 신봉자인 주인과 함께 이 비밀스러운 의식에 동행했는데, 눈앞에 펼쳐진 충격적인 광경에 놀라 '모든 형태의 부패가 솟아나는 샘'이라 불렀다고 한다. 

여자 하인의 남자친구가 이 축제에 관심을 보였을 때 하인은 자신이 그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걸 봤기 때문에 가지 말라고 했고, 그 남자 또한 바쿠스를 추종하는 자신의 부모님에게 가 그 의식에 참여하지 말라고 말한다. 화가 난 부모님은 남자를 집에서 내쫓았고, 그는 달려가 이 일을 숙모에게 알린다. 그는 곧바로 우리나라의 지방관 격인 집정관에게 의식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블라디미르 마코프스키 'spring bacchanalia' /flickr

의식은 처음에는 여성들에게만 국한되었고, 남자들은 입장할 수 없었다. 허가를 받은 남자들이 여자들과 동침을 할 땐 범죄라는 의식도 없었다고 한다. 즉 어떤 행동을 해도 불경하거나 범죄라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남자들은 광기에 사로잡혔고 바쿠스로 분장한 여자들은 횃불을 들고 강으로 달려가 불을 물에 빠뜨렸다가 꺼내길 반복했다. 횃불엔 유황과 석회를 섞어 물에 들어가도 꺼지지 않게 했다고. 

이 모든 얘기를 전해 들은 집정관은 상원에 이 정보들을 제출했고 로마와 이탈리아 전역에는 칙령이 공포되었다. 어떤 비밀을 축하하기 위해 같이 모이거나 유사한 성격의 의식을 수행하는 것도 금지했고 경찰들은 시 전역을 감시하며 야간 모임이 발생하지 않도록 했다. 

이후 집정관들은 사람들을 불러 모아 놓고 공개적으로 선포한다. 바쿠스 숭배 자체가 너무나 위험한 행동이며 이러한 관행을 계속하거나 주도자들을 탈출시킬 경우 어떤 벌을 받을지에 대해서도 알렸다. 7천 명이 넘게 잡혀들어갔다고 하며 정부는 의식이 행해진 장소를 찾았다. 바쿠스 신에게 바치는 공식 사원이나 사당만 남고, 나머지 비밀 기지들은 모두 파괴되었다. 186년 로마 원로에 의해 불법으로 규정되었지만 바카날리아 축제는 인기가 너무 많았던 탓에 암암리에 계속 이루어지다가 기독교가 국교로 지정되었을 즈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헨리크 지미라즈키  'Bacchanalia' /flickr

바카날리아는 여러 작가들이 주제로 썼지만 그중에서도 루벤스의 작품이 걸작으로 특히 꼽힌다. 고전주의를 좋아했던 루벤스가 바카날리아를 묘사한 그림을 보면 바쿠스와 그의 수행원, 나이 든 양부인 실레노스 등이 보인다. 바쿠스는 풍요의 신이자 황홀경의 신이기도 해, 루벤스는 겨울이 오고 잠들기 전 수확을 축하하는 바쿠스의 잔치를 표현했다. 

그림에서 통통한 모습의 캐릭터는 자연의 강인함, 또는 잘 익은 과일을 연상케 한다. 작품의 색상은 전체적으로 따뜻하며 아늑해 등장한 사람들의 부드러움과 따뜻함을 느끼게 한다. 루벤스는 그가 묘사하는 살아 있는 육체에 대한 모든 감각을 보는 사람들에게 제공한다. 등장 인물들은 타원형으로 배치되어 영원한 생명의 순환을 연상시켜, 루벤스는 작품에 자신이 생각하는 삶에 대한 관점을 집어넣었다. 
 

바카날리아 /flickr

바카날리아는 로마 남쪽, 바쿠스 신전의 한 여사제에 의해 비밀리에 도입되어 1년에 3일만, 그것도 낮에 비밀리에 의식이 거행됐다. 이후엔 남녀노소 물론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풍기 문란의 끝을 달렸다고 한다.

당연히 흥미로울 수밖에 없는 내용이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엔 야외 풍경을 배경으로 사람들이 축제를 즐기며 노는 모습을 부조든 그림이든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예술가들이 이 재미있는 영감을 놓칠 리 없었을 것이다. 풍기 문란 등 지금 규범에 어긋나는 모든 것들을 떠나 그저 사람들이 규범이나 규칙에 얽매이지 않게 원시적인 모습으로 노는 모습이 예술가들에게는 얻을 수 있는 영감 중 하나였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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