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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탐구] 많은 예술가들의 영감이 되어준 삽화가, 귀스타브 도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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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탐구] 많은 예술가들의 영감이 되어준 삽화가, 귀스타브 도레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2.07.26 14: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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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스타브 도레의 삽화 /flickr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살면서 약 10,000여 개의 판화를 만든 예술가가 있다고 한다면 그는 얼마나 부지런했으며 어느 정도의 능력이 있었는지 궁금해질 것이다. 프랑스의 화가이자 삽화가, 판화가, 조각가였던 귀스타브 도레는 51년간 약 만 여개의 판화, 200여 권이 넘는 책에 삽화를 그렸다. 

그는 그림을 끊임없이 그렸다. 16살에 프랑스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삽화가가 됐다. 1860년과 1900년 사이 그의 삽화가 들어간 책들이 8일마다 한 권씩 출판되었다고 한다. 시인이자 문학 비평가였던 테오필 고티에는 도레를 가리켜 '천재 소년'이라고 불렀다. 또 반 고흐는 "나는 도레가 그린 교도소를 모방하려 하지만, 그것은 너무 어렵다"라 말했다고.
 

귀스타브 도레 /Wikimedia Commons

도레는 딱히 그림을 집중적으로 배운 적은 없었다. 그래서 현대에 들어 가끔 '거창하기만 할 뿐 가치가 없다'란 평가를 받기도 했다. 기술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부모님이 해 주는 이야기를 읽고 듣는 것을 좋아했다. 그림을 배운 적은 없어도 그는 5살부터 그림에 있어 신동 소리를 들었다. 8살 때 그는 J.J 그랑빌의 삽화에 영향을 받아 28페이지 길이의 삽화를 그렸다. J.J 그랑빌은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9살에 그는 이탈리아의 시인인 단테 알리기에리의 고전 중세 시 '신곡 La Divina Commedia'(단테의 신곡)의 삽화를 그리는 첫 시도를 하게 된다. 이 뛰어난 재능에 힘입어 그는 부르캉브레스의 리세(프랑스의 고등학교를 가리킴)에 입학해 미술을 공부했다. 12살에 돌로 조각을 하기 시작한 그는 15세가 되던 해 파리를 방문했고, 아버지를 통해 프랑스의 풍자 잡지(Le Journal Pour Rire)의 발행인과 연락이 닿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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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레의 삽화가 표지로 쓰인 잡지 /flickr

이 잡지에 첫 캐리커처를 출판한 그는 일주일에 적어도 삽화 한 개를 출판해야 한다는 계약이 있었다고. 당시 도레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도레가 집안의 가장이 되었고 이 조항이 당시 그에겐 행운이었다. 이후 도레는 프랑스에서 가장 높은 보수를 받는 삽화가가 된다. 조각도 병행했던 그는 빅토르 위고, 셰익스피어, 찰스 디킨스 등의 작품을 조각해 캐리커처로 제작했다.
 

이미지와 텍스트가 눈에 띈다 /flickr

1850년대 초반 잡지에 말풍선을 사용하지 않고 이미지 아래 캡션으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텍스트 코믹스를 그리던 그의 만화는 오늘날의 현대 만화책을 떠올리게 한다. 한 출판사는 그의 작품을 풍경화 형식의 작은 책으로 사람들이 읽을 수 있게끔 했는데 당시 도레가 이 작품을 만든 게 15살이었으니 얼마나 천재적인 재능을 지녔는지 알 만하다. 더 어린 나이에 만화를 만든 사람들은 많았지만 도레의 전문적인 재능에 맞서는 사람은 없었다.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삽화 /Wikimedia Commons

그림을 많이 그리면서 그는 자신만의 규칙을 만든다. 이때부터 사실적인 스타일과 캐리커처 사이에서 고민하기 시작했고 그 두 가지 요소를 결합하기도 했다. 1854년은 도레의 경력에 있어 일종의 전환점이 있던 시기였다. 프랑스의 작가, 인문주의자인 라블레의 유명 소설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Gargantua et Pantagruel'의 삽화를 그리면서 그는 본격적으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정확한 묘사 속 환상적인 그의 작품들에 열광했다. 그때부터 그는 만화책 콘셉트를 완전히 버렸고, 1856년 잡지사를 그만뒀다. 도레는 정치 풍자를 그리는 것도 자제했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그리는 것도 하지 않았다. 겉으로만 보면 그는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둔 상상력을 구현하는 데 만족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고 도레가 그만의 창의력을 잃었다는 말은 아니다. 이미 만들어진 내용을 시각화하면서 도레는 여전히 자신만의 이야기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삽화를 그리면서 쌓이는 그의 상상력은 환상적인 작품을 만드는 것과 더불어 수많은 고전 소설과 시의 그림을 그리는 데에도 도움이 됐다. 1856년 그는 방랑하는 유대인의 전설 La Légende du Juif Errant'의 떠돌이 유대인을 묘사한 판화를 만들었는데 이 작품은 나중에 10년 후 그가 만들 성서 삽화의 시초였다. 
 

'런던 : 순례여행 London, a Pilgrimage' 삽화 /Wikimedia Commons

그는 낭만주의, 환상주의 삽화가로도 유명했지만 사실주의적 그림도 즐겨 그렸다. 스위스, 스페인, 영국 등지를 여행하며 파리와 런던을 묘사한 사실적인 판화를 작업했다. 도시의 여러 풍경을 그린 사실적인 판화들은  잘 팔리기도 했지만 엇갈리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환상적인 작품에 익숙해 현실의 이미지를 그대로 그리는 것을 싫어하기도 했다고. 특히 18여 점의 목판화로 완성된 책 '런던 : 순례 여행 London, a Pilgrimage'은 그의 작품들 중 하이라이트로 꼽힌다. 

런던의 삶에 대한 일종의 해설집과 같은 이 작품은 이전까지 다른 예술가들에 의해 오랫동안 무시되어 온 사회의 가난한 사람들, 어두운 부분에 대한 초점을 맞췄다. 일부 비평가들은 당시 런던의 가난을 프랑스인이 폭로했다는 것에 불쾌해했다고. 이 시리즈는 후대에 높은 평가를 받게 되면서 이 삽화는 오늘날까지도 인쇄된 형태로 볼 수 있다. 도레의 전설적인 디테일한 묘사는 그 당시 도시에 살던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이 어땠는지를 이해하게 한다. 

도레의 사실적인 그림은 산업 혁명이 한참 진행되던 19세기 중반 파리와 런던의 도시 생활을 알 수 있는 일종의 매개체가 되었다. 도시의 모습, 노동자 계급이 살아가는 모습을 그저 덤덤히 묘사함으로써 도레는 그 당시 꽤 신뢰성 있는 현실의 모습을 재현했다. 19세기 당시로서는 찾아보기 힘든 정직하고 사실적인 묘사로 다른 나라의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서 매우 가치가 있다.
 

디테일한 묘사가 개성적이다 /flickr

도레는 상당히 머리가 좋은 예술가였다. 약 5만 점의 그림을 남겼으면서 그는 절대 그림을 혼자 제작하진 않았다. 그가 목각화를 만들 땐 전문 조각가들의 도움을 받았고 여러 예술가들의 도레의 작품에 공동 서명하기도 했다. 19세기 교육이 대중들 사이에 퍼지기 시작하면서 사회 구성원들 중 많은 비율이 글을 읽고 쓸 줄 알게 된다. 이때는 도레에게도 절호의 시기였다. 그는 출판사들과의 협업이 더 많은 성과를 낼 수 있게 됐다는 것도 알게 된다. 

도레의 삽화는 매우 정교해 만여 개의 삽화를 혼자 그리는 것이 불가능했기에 이러한 프로젝트를 관리하기 위해 한 번에 40명 이상의 목판 조각가들을 고용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후원자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예술가 조수들로 이루어진 대규모 스튜디오를 만들었다. 그림을 완성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 도레의 동의 없이는 누구도 그의 작업실을 떠날 수 없었고, 특히 제자들의 작업에 만족하지 못했다면 서명을 하지 않았다고도 한다. 
 

샌프란스코 골든 게이트 파크의 귀스타브 도레 꽃병 조각 /Wikimedia Commons

그의 수많은 작업 중 남겨진 여러 조각들은 일부 컬렉션으로 남겨져 최종 출판물들과 함께 전시되었다. 자연스레 구경하는 관람객들은 도레가 어떤 식으로 작품을 만들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사실 그는 생전에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이 만든 조각이 판화나 삽화에 비해 같은 인기를 얻지 못한다는 것에 실망을 많이 했다고 한다. 확실히 도레의 삽화가 수익성이 가장 컸고, 그림이나 조각은 그의 업적에 비해 많이 남아 있진 않다. 다만 그의 조각은 그의 아이디어를 3차원으로 구현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도레의 풍경화 /flickr

그림 또한 마찬가지다. 도레의 그림은 판화나 삽화에 비해 적었지만 그는 유화, 수채화 등 여러 가지를 작업했다. 문학이나 종교적 내용뿐만 아니라 풍속화나 풍경화도 그렸다. 낭만주의 시대 그는 광활한 풍경을 대담한 빛을 이용해 그렸으며 판화나 삽화 말고도 조각, 그림 등 여러 분야에서 재능이 뛰어나 그가 전문적인 예술가로 성공을 거두게끔 했다. 

도레가 유명해지기 시작한 건 성경에 들어가는 삽화를 그리기 시작하면서부터다. 1866년 그는 불가타 성경의 프랑스어 번역판을 위한 241개의 목판화를 제작했다. 도레가 기독교에서 영감을 받은 모든 주제를 그렸으며 성경의 내용은 그의 낭만주의 스타일에 적합했다고 한다. 
 

'성경' /Public Domain

바벨탑에 대한 그의 환상, 삼손의 죽음 등 끔찍하면서도 운명적인 장면들이 도레의 작품에서 복잡한 전투 장면과 어두운 하늘 등으로 묘사된다. 성경의 극적인 내용을 도레만의 스타일로, 독창적으로 묘사한 목판화의 흑백은 마치 시간을 초월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도레의 작품은 구약과 신약서의 모든 요소를 다루었고 전 세계적으로도 여러 번 복제되기도 했다. 프랑스와 영국에서 동시에 출간된 그의 '성경 La Grande Bible de Tours' 작품은 사람들의 많은 찬사를 받았다.
 

단테의 '신곡' 지옥편 /한길사
'단테의 신곡' 삽화 일부분 /flickr

성경과 더불어 단테 '신곡'의 삽화는 도레의 명작으로 꼽힌다. '단테의 신곡'이라고도 불리는 이 이탈리아 시는 많은 사람들이 유럽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학 작품 중 하나다. 도레는 1868년까지 약 7년간 이 고전 문학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기 위해 일련의 판화를 제작했다. '신곡'은 지옥, 연옥, 낙원의 세 가지 섹션으로 구성되었으며 한 번에 하나의 섹션을 완성하는 것으로 했다. 제작 당시 도레는 30대였다. 이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프로젝트 중 하나였으며 그의 커리어에서도 중요한 부분으로 남아 있다. 
 

빨간 두건 삽화 /flickr
잠자는 숲속의 공주 삽화 /flickr

1867년 런던에서 첫 작품을 전시한다. 이 전시회는 런던 뉴 본드가(街)의 도레 갤러리 설립으로 이루어졌다. 도레는 배경과 그림 속 주제들을 환상적이면서도 사실적으로 그릴 수 있는 재능을 지녔다. 당시 유행하기 시작한 인상주의나 사실주의가 아닌, 정확한 소묘와 극적인 구도로 환상과 풍자의 독특한 세계를 구현해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돈키호테, 장화를 신은 고양이 등 문학 속 나오는 등장인물들을 매우 생생한 방식으로 시각화하는 데 탁월했다.

도레는 그 업적을 인정받아 1879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도레의 작품은 수많은 그래픽 예술가들에게 영감이 되고, 여러 성경 삽화를 포함해 아동 판타지 소설, 만화나 영화 등의 시각적 스타일에도 영감을 주었다. 생전 그는 가능한 한 모든 세계 문학을 설명하는 삽화를 그리는 것이 평생의 꿈이었다고 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또한 작품으로 계획했지만 안타깝게도 그 프로젝트를 시작할 수는 없었다. 1882년, 도레는 에드거 앨런 포의 '까마귀' 삽화를 마지막 작품으로 놓은 채 51세의 나이로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까마귀' 삽화 /Wikimedia Commons

1896년, 그의 그림을 필두로 한 전시회가 서구를 순회했다. 전시의 종착지는 미국 시카고였다. 도레의 전시회는 시카고 미술관의 모든 전시 기록을 깼다. 총 150만 명의 사람들의 8개월간 그의 작품을 보러 왔고, 전시 종료 전 1시간 동안 약 4,000여 명이 그의 작품을 보러 몰려들었다고 한다. 

도레는 어쩌면 생전보다 사후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는지도 모른다. 안톤 픽, 펠리시앙 롭스, 반 고흐를 비롯해 월트 디즈니 등 수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특히 디즈니의 '백설공주', '신데렐라', '잠자는 숲속의 미녀'와 같은 영화에서 도레의 동화 각색에 이용된 시각적 스타일을 많이 차용되었다.
 

1933년 영화 '킹콩'의 스컬 섬 /Stefan Eis 유튜브

실사 영화에서도 그의 영향을 알 수 있다.  1933년 영화 '킹콩'의 스컬 섬, 1956년 영화 '신밧드의 7번째 항해', 1999년 팀 버튼의 '슬리피 할로우' 등 동화적 영화들도 도레의 삽화에서 여러 분위기를 차용했다. 도레가 그린 루도비코 아리오스토의 '광란의 올란도' 삽화 속 수염 난 식인종은 조지 루카스의 1997년 영화 '스타워즈'의 츄바카를 연상케 한다. 만여 개의 삽화를 남기고 이제 세상에 없는 도레지만 지금도 우리 곁에서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볼 수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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