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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생각] 링거 속 죽어간 금붕어, 예술가들이 상기해야 할 예술과 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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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생각] 링거 속 죽어간 금붕어, 예술가들이 상기해야 할 예술과 윤리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2.07.22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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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거팩에 넣은 금붕어가 죽어가는 모습을 전시한 'FISH' /전남도립미술관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전남도립미술관 내 설치 미술 작품이 동물 학대 논란에 올랐다. 해당 작품은 다름 아닌 살아 있는 '금붕어'를 작품의 대상으로 삼았다. 

전남도립미술관에 따르면 지난달 30일부터 "애도: 상실의 끝에서'라는 주제로 기획 전시를 개막했고 전시의 주제는 코로나19(COVID-19)로 가족과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 전쟁과 기후 위기 속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승화의 과정을 추적해 보고자 하는 뜻에서 개최되었다.

이 전시는 국내외 10여 명의 작가가 참여, 약 54점의 작품을 전시했다. 문제의 살아 있는 금붕어를 대상으로 한 작가는 '곤충 작가'로 유명한 유벅 작가로, 'Fish'란 설치 작품은 링거 주머니 속 물을 채워 살아 있는 금붕어를 넣어 둔 것이다. 

살아 있는 금붕어는 밀봉된 링거 속 산소가 부족해 예술 작품이라는 이름 아래 서서히 죽어갔다. 전시 개막 10일 만에 금붕어 15마리 중 5마리가 죽었다. 사람들의 항의가 빗발쳤는데, 비단 항의 때문만이 아닌 죽은 금붕어들이 냄새도 나고 관리가 힘들어져 살아 있는 금붕어들까지 일단 다 철수시켰다. 총체적 난국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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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의 한 갤러리 대표는 이번 일을 두고 "링거든 금붕어든 설치미술이라면 각각의 의미가 있어야 한다"며,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살아 있는 무언가를 마음대로 죽일 권리는 없다. 예술이라고 금붕어를 죽이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라고 반문했다. 
 

데미안 허스트 /flickr

현대 미술 중 살아 있는 동물을 활용해 작품으로 만드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다. 어쩌면 이 예술의 시초라 할 수 있는 데미안 허스트는 1991년 첫 개인전에서 죽은 상어를 포름알데히드가 가득 찬 유리 진열장 속에 매달고 모터를 연결해 움직이게 한 작품 《살아 있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의 육체적 불가능성 The Physical Impossibility of Death in the Mind of Someone Living》을 선보였다. 
 

'The Physical Impossibility of Death in the Mind of Someone Living' /flickr

유명 컬렉터 찰스 사치는 데미안 허스트에게 어떤 작품이든 만들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하겠다고 밝혔고, 데미안은 상어를 구하기 위해 공고를 냈다. 조건은 '사람을 잡아먹기에 충분한 크기'였다. 퀸스랜드 허비베이에서 잡힌 상어는 작품으로 만들어져 사치 갤러리에 전시되었고 컬렉터들과 미술 관계자들은 열광했다.

다만 엄청난 크기의 욕조에 죽은 상어가 매달려 둥둥 떠다니는 모습은 예술가들이 아닌 일반 사람들에게는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반응도 다양했다. 삶의 의미에 대한 전통적 의식을 재검토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과, 인기를 위해 대중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반응 등등. 특히나 의뢰인의 의뢰로 상어를 돈을 주고 구입해, 작품을 만들었다는 일종의 잘 짜인 자본 시장의 기획물이라는 말까지 돌았다.

이 상어 작품의 주제는 '죽음'이었다. 죽어버린 상어가 작품의 주제가 되기엔 충분했다. 반응은 엇갈렸어도 작품의 성공은 획기적이었다. 1억 원대로 거래되던 이 작품은 딱 15년 후 120억까지 올랐다. 그 15년간 상어는 용액 속에서 하염없이 썩어갔다. 죽은 동물의 사체를 활용하는 건 당시엔 위법이 아니었다.
 

데미안 허스트의 '나비', 그의 작품엔 살아 있는 나비가 많이 쓰였다 /flickr

2012년, 데미안은 '사랑의 안과 밖'이란 전시를 23주 동안 개최했다. 하얀 전시장 속 수천 마리의 나비들이 날아다녔다. 나비들이 날다가 힘이 빠져서, 또는 관람객들에게 밟혀서 죽으면 매주 400마리가 다시 채워졌다. 23주 동안 총 9000마리의 나비가 쓰였다. 이유를 붙이자면, 수명이 다해 가는 나비를 데려다 관람객들에게 나비의 생과 사의 순간을 보여주는 구성이었다. 

1층은 살아 있는 나비와 흰색 그림으로 채워졌고, 2층에는 나비들이 흰색으로 칠해진 캔버스에 붙은 번데기로부터 나와 밖으로 날아다닌다. 각기 짝을 지어 알을 낳을 때까지 나비들은 날아다녔고, 나비들이 죽을 때 번데기에선 다시 새 나비가 태어나 날아다니는 식이다. 영국의 동물복지단체 RSPCA는 "전시 소재가 개와 같은 동물이었으면 전 세계적인 항의를 들었을 것이다"라며 비판했다. 

이에 대해 테이트 모던 대변인은 "전시실에 있는 나비는 평균 수명이 아홉 달로, 여긴 환경의 질이 높아 자연에서보다 오래 산다"라 답변했다고. 과연 이것이 적절한 답변일지는 대중들의 판단이다. 그에게도 동물 학대라는 비난이 없던 건 아니었지만 데미안의 답변은 일관적이었다. 표현의 자유라는 것.
 

아이스 큐브 프로젝트 /ES 유투브

덴마크에서 활동하는 칠레 출신의 예술가 마르코 에바리스티는 좋게 말하면 '괴짜', 나쁘게 말하면 '엽기적인' 예술가다. 그는 그는 자연에 있는 모든 것들이 자신의 예술 대상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의 기행은 참 독특해 가는 곳마다 논란을 일으켰다. 팀원들과 그린란드의 피오르드 빙산으로 가 빨간 페인트 3000ℓ를 뿌려댔고 900㎡ 크기의 빙산을 온통 빨간색으로 칠해버린 '아이스 큐브 프로젝트'가 대표적인 예시다. 

그는 자연이 누구의 소유도 아니기 때문에 허가를 받을 필요도 없고, 자연은 모두의 것이니 빙산 또한 자신의 것이라 말했다고. 이번 금붕어 사건과 비슷한 일은 2000년에도 있었다. 2000년, 마르코는 트라폴토 미술관에서 '헬레네'라는 작품을 전시했다. 물이 든 10개의 믹서기 안에 살아 있는 금붕어를 넣어 놓고, 관람객이 믹서기의 'on'버튼을 자유롭게 누르는 식이었다. 
 

회고전에서 재연한 '헬레네' /flickr

믹서기 안 금붕어를 살펴보는 관객들은 이 'on'버튼을 눌러도 설마 진짜 작동하진 않겠지, 또는 정말 작동할까? 란 생각에 버튼을 누르고 순간 금붕어는 믹서기 안에 갈려 사라진다. 관람객들이야 이 믹서기가 진짜 작동하는지 아닌지 모르는 상황은 당연하고, 이것이 진짜 작동할 거라 알려준 사람도 없다. 대중은 호기심에 누구나 버튼을 누를 수는 있다. 그 기계가 진짜든 가짜든 알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막상 눈앞에서 생으로 갈려나가는 금붕어를 보고 충격을 받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결국 경찰이 출동, 믹서기 전원을 내릴 것을 요구했지만 당시 미술관은 응하지 않았고 피터 마이어 디렉터가 기소되었다. 결과는 유죄가 아닌 무죄, 금붕어가 갈리는 순간 즉사했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지 않았을 거란 결론을 내렸다. 즉 물고기는 인도적인 죽음이었으니 범죄로 볼 수 없다는 판결이 내려졌다고. 마르코는 자신이 금붕어를 죽이라고 한 것도 아니고, 결정은 관람객이 한 것이라 덧붙였다.

작가 입장에서야 예술로 생각했겠지만 결국은 갈려나간 금붕어와, 정말 금붕어가 갈려나갈지 모르고 전원 버튼을 눌렀을 관람객은 무슨 죄인가 싶다. CNN에서 해당 작품을 두고 여론 조사를 벌였을 때 응답한 사람들의 70%가 예술이 아니라 생각했다고. 이후 13년이 지나고 나서 작가는 회고전에서 '헬레네'를 다시 선보였다. 다만 이번엔 산 금붕어가 아닌 죽은 물고기로 대체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해당 작품이 감정을 고통스럽게 할 수 있음을 인지하나, 작품에서의 잔인한 것들은 내가 인본주의자라는 것에서 기인한다”라고 전했다. 
 

나탈리아 에덴몬트의 나비 작품 /flickr

우크라이나 출신의 사진작가 나탈리아 에덴몬트는 ‘Bride’ 연작에서 토끼나 쥐, 닭 등을 직접 죽인 후 사체의 일부를 다른 사물과 조합해 이미지를 만들었다. 그의 작품 속 동물들은 다 한때는 살아 세상을 누볐던 존재들이다. 그는 자유와 생명이란 주제를 갖고 작품을 만든다. 그의 작품에서 죽은 동물은 영원히 박제되어 작품으로 남는다. 

살아 있는 동물을 죽이고 작품으로 박제했으니 동물 학대 논란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 논란에 그는 "우리 모두는 죽은 동물을 식용으로 먹는다. 그런데 죽은 동물을 먹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이 없다가 죽은 동물이 작품 소재가 된 것을 가지고 내 작품을 비판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예술은 그저 예술 작품일 뿐이다"라고 반박했다. 데미안처럼 그도 예술에 있어 표현의 자유를 중시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일은 많다. 죽어가는 사람을 사진으로 남겨 놓고 예술이라 주장했다가 사형당한 경우도 있고, 작은 새들을 사진으로 찍겠다고 움직이는 새들의 발에 본드를 발라 나무에 고정시켜 놓고 사진을 찍는 등 별별 희한한 일들도 많다. 
 

'소멸'전의 닭 /갤러리 현대

동물보호단체들이 직접 항의한 경우도 있다. 2018년 9월 4일부터 열렸던 이강소 작가의 '소멸'전은 1970년대에 발표했던 주요 작업을 재연해 선보였다. 전시장에 타일을 깔고 주변에 석회 가루를 뿌려, 닭의 다리에 줄을 연결해 3일을 그 자리에 묶어 놓았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닭이 움직이면 석회 가루 위 남은 흔적으로 닭의 사진과 함께 전시한 것이다.

당시 동물보호단체 'Move'는 “그간 이 작가의 닭 퍼포먼스에 이용된 닭들은 단단한 타일 바닥, 밥그릇, 발을 묶은 기둥이 전부인, 닭의 습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학대적인 환경에 3일간 강제적으로 묶여 있어야 했다”고 밝혔다. 물론 갤러리 현대 측도 "전시에 나온 '소소'(닭 이름)는 유기농 야채도 주고, 밤에는 잘 수 있게 건물 조명을 꺼 주었다"라고 반박했다. 야채도 먹고, 밤엔 잠도 잘 수 있는 닭이었지만 과연 그 대접을 고맙게 여겼을지는 의문이다.

본론으로 돌아와, 이번 전남도립미술관 내 설치 미술을 만든 유벅 작가는 '곤충 작가'로도 유명하다. 냄새와 빛으로 곤충을 유인해 사멸시키고, 사체를 모아 그림을 그렸다. 그는 작은 곤충들을 죽이는 것에 대해 '이 형상을 만드는 것은 인간 내면의 폭력성과 권력욕을 보여준다'고 전했다. 이번 링거 금붕어 폐사에 대해서도 그는 "시간이 흐르면서 금붕어가 죽어가는 것도 작품의 과정이라고 설명했는데, 금붕어가 빠져 작품으로서는 의미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작가에게 있어 곤충이든 금붕어든 죽어가는 모습 그 자체가 작품인 것이다. 그는 사진작가 나탈리아 에덴몬트와도 비슷한 결의 말을 했다. "고기를 얻고자 동물을 도축하는 등 인간은 다른 생명체를 죽이면서 자기 생명을 지켜 왔다”며 “이 모순을 표현하기 위해 예술가로서 해야 하는 일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사실 여러 예술가들이 살아 있는 동물을 일부러 건드리거나 죽이면서 작품을 만들 땐 대개 비슷한 생각과 비슷한 경향으로 흘러간다. 
 

데미안 허스트 'Thousand Years' /flickr

즉 동물을 작품의 주제로 삼는 것 자체가 '예술적 시도'의 하나라는 얘기다. 거기에 빠지지 않는 말도 있다. 인간이 육식은 아무렇지도 않게 소비하면서 동물을 예술의 수단으로 삼는 것이 뭐가 문제냐는 것이다. 식용으로 동물을 죽이니 예술로 동물을 죽여도 된다는 논리가 과연 합당할까. 아주 단순하고 조금 더 무식하게 생각했을 때 만일 인간이 육식이 아니어도 살아갈 수 있다면, 즉 대체 수단이 얼마든지 존재한다면 가능하겠지만 불행하게도 아직 그럴 정도로 이 시대의 기술이 발전하진 못했다. 물론 여기서 고기를 먹지 않고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할 말이 없다.

문제는 예술이라는 것에 있어 살아 있는 동물이 필수적인 재료는 얼마든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얘기다. 어쨌든 현실적으로 필수인 것과, 필수가 아니어도 되는 것은 구별할 수 있다면 해야 한다. 이번 경우에도 금붕어가 살아 있든, 죽어 있든, 모형이든 변하는 건 없다. 시간이 지나며 죽어가는 금붕어의 모습이 인간의 내면에 자리잡은 폭력성과 이중성을 표현한 것이라는데, 그게 왜 꼭 살아 있는 금붕어야 하냐는 이야기다. 

그 폭력성과 이중성을 '죽음'으로 표현하는 수단이 정말 살아 있는 금붕어가 죽어가는 모습으로 표현하는 것밖에 답이 없다는 이야기일까. 모형 물고기가 움직이다가 배터리가 없어 점점 움직임이 느려지는 모습으로써는 폭력성과 이중성이라는 주제를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일까. 미디어 아트나 디지털 아트로 죽어가는 물고기를 표현했어도 될 일이다. 예술이라는 형태에 어떤 수단을 쓰는지는 작가의 마음이지만, 그 수단까지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해지고 느껴질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는 것 또한 예술을 사람들에게 표현하는 작가들이 해야 할 일이다. 
 

데미안 허스트의 전시, 일종의 해체쇼 같기도 하다 /flickr

살아 있는 동물을 대상화해 예술을 하는 작가들은 그 존재로 인한 사람의 어떤 특성을 나타낸다고 믿는다. 그러나 결국 대상화된 동물의 끝은 죽음이다. 상어가 그랬고 곤충들이 그랬고 나비가 그랬으며 금붕어가 그랬다. 예술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대상화할 수 있다고 믿고 그것이 예술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는 무엇이든 용인될 수 있다고 믿는다. 결국은 예술도 사람들이 살면서 지켜야 하는 윤리 안에서 행해져야 하는 것임을, 예술이라고 해서 모든 행위가 용서될 수 없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작품을 전시한 유벅 작가는 "일반인의 시선으로 보면 다소 불편할 수 있지만, 예술가는 일반인의 사고와 다르게 생각하고 표현한다"고 해명했다. 물론 산 동물을 대상으로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들이 모두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부디 모든 작가들이 '나는 일반인과 다른 어떤 예술'을 한다는 생각에 빠져 있지는 않길 바란다. 일반인과 다른 사고로 하는 예술은 어떤 위대한 작가여도 결국 그 작품을 봐 주는 일반인들을 이해시키기 어렵다.

 

2017년 내내 뜨거운 감자였던 전안법은 현실과 다른 불합리함으로 수공예 작가들의 목을 죄어오는 올가미 같았습니다. 극적으로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많은 작가들이 한숨 돌릴 수 있게 됐지만 아직 바뀌어야 할 부분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핸드메이커는 이러한 불합리에 ‘NO’를 외치기 위해 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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