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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아름다움으로 평생을 박제되다, 핀업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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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아름다움으로 평생을 박제되다, 핀업걸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2.07.05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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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업걸, 그리고 모델 /flickr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핀으로 고정하다'란 의미의 핀업 걸은 벽에 걸어두고 보고 싶을 만큼, 여성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이나 매력을 보여주지만 철저히 성적으로 이상화되어 연출된 사진 속 여성을 뜻한다. 대중문화에서 사용되는 대량 생산된 이미지 중 하나로 패션모델, 글래머 모델, 여배우들이 대개 핀업걸로 불린다. 회화나 삽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도 이용된다.

핀업걸은 때때로 '치즈 케이크'라고 불렸는데, 이 단어는 20세기 초 핀업이 금기시되어 노출도가 많거나 반나체, 누드 사진을 가리키는 속어이기도 했다. 핀업걸을 그린 포스터가 전쟁 시기부터 대량 생산되면서 20세기 들어 한 시대를 풍미했을 정도로 유행했다. 반대로 남성을 성적 대상화한 것은 '비프 케이크'라 불렸는데 인기 있는 남자 연예인들을 대상으로 했다고.
 

찰스 다너 깁슨 /flickr

핀업걸의 시초는 미국 화가인 찰스 다너 깁스가 만든 1890년대 '깁슨 걸'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깁슨은 어릴 때부터 병을 앓아 유약했고, 아버지는 아픈 아들을 즐겁게 해 주려 그림을 그리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아픈 아이의 의욕을 돋우어 주기 위한 이 놀이가 깁슨에게는 평생의 커리어가 되었다. 사실 깁슨은 재능 있는 예술가였다. 

깁슨은 12살 때부터 예술 감각을 인정받았고 부모님도 그의 재능을 인정해 그를 많은 전시회와 학원에 데리고 다녔다. 돈을 벌기 위해 깁스는 19살에 학교를 떠나 1885년 잡지 '라이프'에 입사했다. 그는 잡지에 실릴 여러 삽화를 그렸고 1890~1900년대의 아이콘이 된 '깁슨 걸'을 만들었다. 깁슨 걸은 모든 여자의 이상향이었고 모든 남자의 소망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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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깁슨 걸' /flickr

수잔 마이어는 자신의 저서 '미국의 위대한 일러스트레이터'에서 깁슨 걸을 두고 이렇게 묘사했다. '이 여성은 다른 잡지에서 볼 수 있는 여성보다 키가 크다. 훨씬 더 활기차고 독립적이면서도 여성적이다. 그는 빳빳한 셔츠를 입고 다녔고, 부드러운 머리는 뒤로 모아 틀어 올린 머리 모양인 시뇽이 특징이며, 머리엔 깃털이 달린 커다란 모자를 썼다. 이 여성은 교양이 있지만 눈에는 종종 장난기가 숨어 있다. 미소를 짓지만 결코 웃는 모습을 보이진 않는다. 이것이 그의 매혹적인 모습을 더했다" 

'깁슨 걸'의 이미지는 연약한 여성, 또는 관능적인 여성과 같은 오래된 여성을 나타내는 요소들을 결합했다. 이 '연약한 여성'으로부터 나온 여성의 이미지는 가느다랗고 유려한 선이 특징이었고, '관능적인 여성'에서의 여성은 큰 가슴, 엉덩이를 자랑했지만 이전에 묘사되었던 것처럼 저속한 이미지는 아니었다. 이 조합을 이리저리 조합한 결과, 키가 크고 호리호리하지만 가슴과 엉덩이는 풍만한 이미지의 '깁슨 걸'이 나타났다. 
 

신여성이라 불리기엔 한계가 있었던 깁슨 걸 /flickr

깁슨 걸은 19세기 말경 인습과 싸우며 자유와 독립을 요구한 여성을 가리키는 1세대 '신여성'으로도 불렸다. 다만 깁슨 걸은 진보적인 사회와 정치 변화에 대한 여성들의 욕망을 다 채워 주지는 못했다. '신여성'은 진보적인 개혁, 성적, 참정권과 평등권을 요구하며 기존 질서의 붕괴와 변화를 이끄는 본보기로 여겨졌고 깁슨 걸은 그런 점에서는 '신여성'의 여러 면모를 보여주진 못했다는 평을 받았다. 
 

'깁슨 걸'에서 보이는 여성과 남성 /flickr

특이한 점이라면 깁슨 걸은 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존재, 또는 여성이란 남성을 놀리는 이미지로 묘사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정말 작아진 남자들을 현미경으로 관찰하거나, 여성의 발밑에 남성을 마치 개미처럼 내려다보고 있는 식이다. 깁슨 걸에서 남자들은 단순한 이미지고, 심지어 외모가 잘생기고 돈이 많았어도 이 여성에게는 만족이 되지 않았다. 깁슨 걸은 여성의 아름다운 외모에 홀린 남자들이 자신을 따라다니며 욕망을 채우려 하는 모습을 그렸다. 단지 이 여성이 원했기 때문에, 잎도 없는 나무를 거꾸로 심어 보라는 명령을 주저 없이 따르는 바보 같은 남성들의 이미지도 볼 수 있다. 
 

'깁슨 걸'의 이미지가 바뀌어 가는 모습 /flickr

1900년대가 시작되며 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산업 혁명은 공산품을 널리 보급하게 했고, 수많은 일자리들을 만들었다. 중산층 여성들은 슬슬 집 밖으로 나와 일하기 시작했다. 1900년까지 미국에서 5백만 명 이상의 여성들이 직업을 가졌다고 한다. 여성들은 활동적인 패션이 필요했고, 스타일은 점점 더 단순해지고 실용적이 됐다. 여성들은 깁슨 걸이 입는 우아한 드레스, 테니스 치마보다 실용적인 옷을 선호하면서 깁슨 걸의 인기도 점점 떨어져 갔다. 

바비 인형이 1900년대 후반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것처럼, 깁슨 걸 또한 1900년대 초반 사회에 여러 영향을 줬다. 두 이미지 모두 엄청나게 상징적이지만 둘 다 이상적인 '미국 여성'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깁슨 걸은 미국인이었지만 미국 말고도 다른 나라에서도 모방되었다. 모든 계층의 여성들이 깁슨의 그림에 등장하는 여성의 패션을 모방하길 원했다. 심지어 남성들도 깁슨 걸 이미지에서 여성과 같이 나오는, 콧수염 있는 남성의 외모를 흉내 내기도 했다고. 

19세기, 여성들은 자전거의 발명과 더불어 자유로움을 얻었다. 물론 몇몇은 여성의 '안전'을 이유로 자전거 반대 운동을 펼치는 등 허튼소리를 해댔다. 당시 여성들은 밖에서 노출이 많은 옷을 입거나 몸매를 드러내서는 안 되는 분위기가 있었다. 여성들은 발밑까지 오는 드레스를 입는 게 일상이었지만 자전거를 타는 것 자체가 여성들의 많은 것을 바꿨다. 자전거를 타기 위해서라는 아주 좋은 핑계를 대며 여성들은 기능적이면서도 편한 바지를 입기 시작했다. 
 

핀업걸 /flickr

긴 드레스에 가려져 있던 여성들의 몸은 당당하게 노출이 되었고, '깁슨 걸' 이미지와 함께 여성의 섹스 어필을 강조하는 모습이 벽에 걸어 놓는 달력에 등장했다. 달력에 걸린 이 이미지들은 섹슈얼한 이미지를 골자로 하는 '핀업걸'로 달력에 단골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1917년부터 본격적으로 대중들에게 친숙해진 핀업걸은 전쟁 기간 동안 미국 정부에 의해 적극적인 홍보로 쓰였다. 이 핀업걸의 임무는 전쟁 중 병사들의 사기를 고취시키는 '선전용'이었다. 
 

전투기에 붙어 있는 핀업걸 이미지 /flickr

섹스 어필용 이미지가 팔린다는 걸 깨달은 미국 정부는 군인 채용 포스터에 핀업걸을 사용했다. 달력 삽화가들은 여성들을 점점 더 성적인 방식으로 묘사했고 핀업걸을 다룬 삽화는 신문 가판대에서도 흔히 볼 수 있게 됐다. 핀업걸은 군인을 모으기 위한 모집용 포스터뿐만이 아닌 채권 구매를 촉진하기 위한 홍보용으로도 쓰였다. 군대는 이 이국적이고, 에로틱한 이미지로 군인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애를 썼고 군인들은 자연스럽게 핀업걸 이미지를 그들의 막사, 배, 잠수함에도 장식했다.

이들은 전투기에 핀업걸 이미지를 붙이고, 심지어 헬멧에도 붙였다고 한다. 핀업걸의 이 사랑스러운 여성들은 군인들, 선원들, 비행사들이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지를 상기시키고 집에서 누가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를 끊임없이 기억하게 만들었다. 그러다 1945년 전쟁이 끝나고, 이 시대 가장 유명한 핀업걸들이 등장한다. 
 

베티 그레이블 /flickr
베티 페이지 /flickr

폭스사의 간판 배우였던 베티 그레이블은 1943년 '핀업걸'에 출연하며 인기가 최고조로 달했고 그의 늘씬한 몸매와 아름다운 미소를 보기 위해 찾은 관객들이 극장을 꽉꽉 채웠다고 한다. 또 베티 페이지는 일러스트레이션에서 사진으로 성공한 최초의 핀업걸이며, 1950년대 핀업 사진으로 유명세를 얻은 미국의 모델이다. 종종 "핀업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그의 어깨부터 팔까지 이어지는 검은 머리, 파란 눈, 트레이드 마크인 앞머리는 수 세대에 걸쳐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의 인기는 빠르게 올라갔고 전국에 걸쳐 수많은 출판물에 등장했다. 

핀업걸은 한 세기 이상 영리한 마케팅 기법으로도 활용되었다. 아름답고 관능적인 여성의 사진을 보는 즐거움을 벽에 고정시켜 즐길 수 있는 것과 동시에 해당 제품의 홍보까지 되는 셈이다. 직설적으로 말한다면 '섹슈얼리티'는 돈이 되는 좋은 수단이었다. 모델과 작가들 또한 돈이 되고 홍보가 되었기 때문에 이 스타일을 차용했다. 
 

예전 핀업걸의 모습 /flickr
핀업걸 특유의 전형적인 자세와 모습이 눈에 띈다 /flickr

핀업의 고전적인 스타일은 1940년대부터 시작되었으며 여러 광고지나 전단지에 등장해 홍보하기에 핀업걸은 좋은 소재였다. 자연스러운 피부 톤을 유지하는 파운데이션, 눈 화장을 위한 아이라이너, 뺨의 홍조를 강조하는 블러셔, 선명한 입술색을 돋보이게 하는 립스틱 등이 핀업걸을 꾸몄다. 핀을 꽂아 만드는 곱슬머리인 핀 컬은 핀업걸 스타일의 주요 요소로 1940년대 헤어스타일은 최대한 풍성하면서 부드러운 컬을 강조했다. 

20세기 초, 전형적인 핀업걸의 이미지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존경의 대상에서 구시대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이미지들이 여성의 수준을 낮추고, 존엄성을 파괴하며, 남성을 즐겁게 하는 단순한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에 여성과 청소년 모두에게 해롭다는 주장 또한 제기됐다. 1900년대와 제2차 세계대전, 여성의 섹스 어필이란 꼬리표가 따라다녔던 핀업걸은 이제 연예인들과 가수 등 유명인들이 차용하는 하나의 문화로 바뀌었다. 
 

마치 옛날 핀업걸 이미지를 보는 듯한 케이티 페리 /flickr

비욘세는 1950년대 베티 페이지에게 경의를 표하는 "Why Don't You Love Me"라는 노래를 발매했고, 케이티 페리는 핀업걸과 관련된 모델링을 종종 차용해 뮤직비디오와 의상에 적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상적인 미국 여성의 틀을 확립해 여성들을 들고일어나게 만든 이유에도 한몫했던 핀업걸은 실제로 여성들의 많은 것들을 바꾸게 만들었다. 이상적인 아름다움으로 평생 벽에 박제되어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던 핀업걸은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고풍의 디자인과 예술이 결합되어 여러 예술가들에게 다양한 영감을 주고 있다. 

 

2017년 내내 뜨거운 감자였던 전안법은 현실과 다른 불합리함으로 수공예 작가들의 목을 죄어오는 올가미 같았습니다. 극적으로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많은 작가들이 한숨 돌릴 수 있게 됐지만 아직 바뀌어야 할 부분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핸드메이커는 이러한 불합리에 ‘NO’를 외치기 위해 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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