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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왕이 평생을 기억되고 싶어했던 고대 유산, 아시리아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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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왕이 평생을 기억되고 싶어했던 고대 유산, 아시리아 조각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2.06.24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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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장면을 새긴 부조 /flickr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아나톨리아, 아르메니아 등 여러 나라의 일부 지역을 지배했던 고대 아시리아를 중심으로 돌아간 예술을 아시리아 예술이라 부른다. 석고로 조각한 거대한 조각상과 세밀한 부조가 특징이며 가장 잘 알려진 작품으로는 입구를 지키는 거대한 라마수와 궁전의 부조 등이 있다. 

대부분의 아시리야 조각들은 유럽, 미국 등지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IS의 약탈로 인해 현지 미술관에 있던 많은 작품들이 파괴되기도 했다. 현존하는 예술품으로는 건축 내부에 부조 장식을 가득 메운 것이라든지, 문 입구에 놓인 사람의 얼굴을 한 사자상이라든지 뛰어난 예술품이 많다.

강대한 힘, 왕의 의지가 담긴 아시리아 조각 

아시리아 부조 /flickr

고대 아시리아는 현재의 이라크 북부 쪽에 존재했다. 메소포타미아는 기원전 2270년까지 수메르인들의 지배를 받은 곳이었다. 1750년 바빌로니아 제1왕조의 제6대 왕인 함무라비가 죽었을 때 메소포타미아는 북쪽은 아시리아, 남쪽은 바빌론이라는 두 나라로 쪼개졌다. 메소포타미아 북부는 아시리아인들이 지배했고 남부의 절반은 바빌로니아인들이 지배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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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이후 아시리아는 메소포타미아 전역에서 큰 영향력을 떨쳤고 이집트에서 페르시아 만에 이르는 중동 대부분의 지역을 통합했다. 아시리아 예술은 기원전 1500년 전에 처음 나타났다. 궁전에서 발견된 조각상이 정교하고 세밀한 부조를 특징으로 하며 군사를 이끄는 군대, 왕의 사냥 장면 등이 포함된다.

아시리아가 영토를 통치할 당시 제국의 위대함을 강조했고, 전쟁과 사냥에 대한 예술에 전념했다고 한다. 아시리아 조각가들은 궁전 벽의 부조와 입구에서 볼 수 있는 인간의 머리를 가진 사자, 날개 달린 거대한 짐승의 형상들을 주로 조각했다. 조각가들은 대부분 페니키아와 시리아, 이집트와 같은 다른 나라들에서 들여왔을 가능성이 크다고.
 

산헤립 왕 시대의 부조 /flickr

아시리아의 조각들은 산헤립 왕과 아슈르나시르팔 2세가 세운 웅장한 궁전들과 조각들이 특히 돋보인다. 산헤립 왕은 니네베를 수도로 만들었는데, 이곳에서 그는 자신의 이름을 건 독특하고 화려한 건축물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는 이 건물을 '상대할 적수가 없는 궁전'이라 불렀다. 

산헤립 왕은 니네베에 있는 궁전을 두고 "궁전 출입구와 거실에 높은 창을 두었고, 가시관을 쓴 커다란 석고 조각상을 출입구 양쪽에 세웠다. 하얀색 돌로 날개 달린 큰 황소를 새겼고, 편백나무, 소나무, 이집트의 동북인 시나이에서 온 목재와 근처의 숲에서 가져온 큰 나무들을 베어 만든 뗏목에 이 조각들을 운반했다. 사람들의 많은 노력으로 내 궁전까지 가져왔다. 또 내 신의 거처를 위해 금과 은, 수정, 석고, 상아로 방을 만들었다"라 했다. 
 

발라왓 성문 /flickr

건축가들은 석고나 벽돌 말고도 목재도 건축 재료로 썼는데, 특히 삼나무와 편백나무가 많이 쓰였다고 한다. 아슈르나시르팔 2세의 아들 살만에세르 3세가 지은 궁전의 성문이며 현재 대영박물관이 소장 중인 발라왓 성문은 아시리아 비문에 따르면 삼나무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문에는 경첩이 없어 나무 기둥을 직접 돌려 열었다고 한다. 발라왓 성문은 규모를 따져 봤을 때 제국의 모든 지역을 방어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질 정도다. 
 

행진 중인 인물을 그린 부조 /flickr

니네베의 궁전은 80여 개의 방으로 가득 차 있고, 방마다 조각상들이 즐비해 있다고 한다. 궁전의 토대는 석회암과 진흙으로 만든 벽돌로 만들어졌고 주요 출입구들 중 일부는 날개 달린 사자나 사람의 머리를 가진 황소 조각상들이 문을 지키고 있다. 부조는 종교 의식, 총치하는 모습, 사냥과 전투 장면뿐만이 대부분인데 전투는 강을 건너는 군대의 모습, 도시를 포위하고 항복을 얻어내 군대가 본국으로 귀환하는 장면으로 이야기가 끝난다. 아닌 산헤립 왕의 부하들이 그의 전리품을 들고 행진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진 것은 아슈르나시르팔 2세의 시대다. 그는 서쪽으로 군사 원정을 떠나 지중해 연안에 도달했고 제국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아슈르나시르팔 2세는 전통적으로 아시리아의 수도였던 아수르에서 님루드로 옮겨가 그곳에 크고 멋진 궁전을 지었다. 

원래 님루드는 황제가 지배하는 수도가 되기 전까지는 평범한 지방의 한 도시였다. 이 수도에 큰 궁전과 신전을 지으면서 도시는 커졌다. 10만 명의 주민들이 살았다고 하며 식물원과 동물원 등 여가 시설도 많았다. 님루드는 이시리아가 기원전 612년, 메디아가 신바빌로니아와 동맹하여 아시리아를 멸망시키며 완전히 파괴될 때까지 왕실 거주지로 남아 있었다. 

아슈르나시르팔 2세의 궁전의 완공과 취임식에 대한 기록에서 보면 거의 7만 명의 사람들이 참석해 연회를 즐겼다고 한다. 아슈르나시르팔 2세의 궁전엔 많은 방과 테라스가 있으며 아시리아에 막대한 부를 가져다준 왕족 중 하나이기도 했다. 지방의 통치자들이 왕에 여러 조공을 바쳤고 수많은 자원이 아시리아로 유입되었다. 이 자원들은 남루드라는 새로운 수도에서 대규모의 건축 공사에 투입된다. 
 

메트폴리탄미술관의 입구를 지키는 라마수 /flickr

아슈르나시르팔 2세는 궁전 성벽에 석조 기반의 부조를 장식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왕의 업적을 기술하는 비문이 패널 중앙에 새겨져 있고 부조에 새겨진 수많은 인물들은 정교한 조각으로 자수 무늬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부조에는 동물의 머리를 한 기묘한 인물들을 보여주는데 아마도 왕과 궁전을 지키는, 마법을 부리는 상징이라 추측한다. 아슈르나시르팔 2세가 세운 황소 모양의 조각상들은 현재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입구에서 볼 수 있다. 
 

대영박물관의 아시리아 부조 조각 /flickr

아시리아인들은 철과 구리를 재료로 쓴 도구를 사용해 조각했다. 돌이 비바람에 노출되면 쉽게 침식되었기 때문에 노출되어 있는 조각상들은 페인트나 니스를 칠해 보호했다. 부조는 벽을 따라 고정되었고 아시리아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대대적으로 장식되었다. 대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감상하며 비문이 곁들여 있어 부조 인물의 행동을 설명하거나 왕의 이름이나 화려한 칭호를 알려주기도 한다.

부조 인물은 대개 옆모습으로 표현되며 일부 태블릿에는 왕과 다른 신하들을 포함한 실물 크기의 인물들이 나타나거나 군사 장면을 다룰 때엔 수십 명의 인물들을 표현, 동물이나 풍경화를 보여주려는 시도도 있다. 특이한 건 부조에 여성은 거의 묘사되지 않으며, 부조에 등장하는 신들은 인물의 형상화보다 상징적인 형태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아시리아의 설형문자 /flickr
빼곡하게 적혀 있는 기록들 /flickr

아슈르나시르팔 2세는 건축 말고도 지적 호기심이 강했다. 그는 왕이 누리는 승마, 사냥 말고도 읽는 것과 쓰는 것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는 여러 문서와 책들을 모았고 도서관도 세웠다고 한다. 종교, 과학, 역사, 문학 분야 등 모든 분야에서 축적된 지식을 남겨두기 위해 그는 신하들에게 명령을 내렸고 신하들은 수집된 지식들을 체계적으로 목록화했다.

이렇게 문서화된 2만 2천 여개의 태블릿들은 니네베 궁전 유적지에서 발견되었다. 제국이 넓어지고 영향력이 강해지니 아시리아 왕들을 찬양하는 태블릿과 기념판에 수많은 기록이 남겨졌다. 실제로 아시리아 제국은 영토 확장에 대한 꽤 자세한 기록들을 남겼다고 한다. 이 작품들은 세계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역사가들에게도 매우 귀중한 것이다.

아시리아 왕들에게 궁전은 왕실 귀족들의 거주지면서도 사업을 하는 곳 이상이었다. 통치자들은 실제 신은 아니지만 마치 신인 것처럼 행동했다. 백성들에게 왕은 신이나 다름없었고 태어날 때부터 왕이 하는 역할까지 통틀어 뭐든지 신과 연관되었다. 자연히 왕이 거주하는 궁전은 핵심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왕은 항상 침략을 두려워했고 사람들을 많이 믿지 않았다. 궁전은 왕을 위한 곳이었지만 동시에 외부에는 요새화된 탑과 성벽이 둘러싸였고 궁전 내부는 부조와 장식으로 외부와 대조되는 모습을 보인다.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라마수 /flickr

아시리아 예술의 정수는 아시리아 신화에 나오는 수호신인 '라마수'를 응용한 조각들이다. 민가에서 처음 나타났다고 하며, 보통 라마수를 새긴 진흙판을 출입문의 문지방 아래 묻어두었다고 한다. 궁전에서도 라마수 조각상을 세우면서 왕실 수호자로 발전해, 일반적으로 한 쌍의 라마수 조각상이 궁궐 입구나 도시의 성문에 서 있는 것이 특징이며 크기 또한 엄청나게 크다. 

라마수는 인간의 얼굴에 황소의 몸뚱이를 한 정령으로, 날개가 있고 인간의 머리에는 정교하게 땋은 머리와 수염이 있다. 라마수는 정면에서는 서 있는 것처럼 보이고, 측면으로 보면 걸어 다니는 모습이다. 라마수 형상이 처음 등장한 건 신아시리아 제국의 티글라트 필레세 2세 때로 권력을 상징했다고 한다. 아시리아인들은 라마수를 수호신으로 삼았는데 신화적 의미에서 그 안에 모든 생명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라마수는 부조 안에서는 아시리아인들을 보호하는 영물이자 수호신이었다. 
 

상아로 만든 염소 모양의 조각 /flickr

아시리아는 상아로 만든 유물들도 꽤 많이 발견됐다. 상아는 대부분 메소포타미아 밖 나라들에서 공수했고 교역로를 통해 왔다고 추정하며, 이제 멸종된 시리아 코끼리들에게서 얻은 것으로 추정한다. 가구, 무기, 작은 휴대품들에 다양하게 장식됐다. 많은 상아들은 원래 금박 등 귀한 것들로 화려하게 장식해 놓았지만 매장되기 전 대부분 벗겨진 것으로 추정한다. 이시리아 제국이 붕괴하고 도시가 약탈되는 동안 우물 바닥에 많은 상아 장식품들이 발견되었다고. 
 

청동으로 만든 황소 머리 /flickr
금박을 입힌 조각 /flickr

아시리아인들은 청동이나 금에도 능했다. 아시리아 중기 시대는 청동기 시대의 절정기였다. 아시리아인들은 청동으로 패널, 펜던트, 무기 등을 만들었다. 청동으로 만든 개 모양의 조각상은 일종의 보호용으로 건물 아래에 묻기도 했다. 또한 금은 아시리아에서 교역과 조공의 물건으로 쓰였는데 귀금속이 개인의 지위와 부를 나타냈기 때문이다. 무덤에서는 왕비로 추정되는 여성과 함께 묻은 금 장신구들이 무더기로 발견되기도 했다. 
 

황소를 탄 에우로파 /flickr

1855년 발굴이 얼추 마무리되면서 대부분의 아시리아 조각품들이 유물로 발견됐다. 오늘날까지 발굴은 계속되고 있지만 더 이상의 새로운 궁전은 발견되지 않았고, 발라왓 성문처럼 원래 건축에서 떨어져 나온 유물들이 대부분이다. 많은 작품들이 박물관으로 이동했지만 발견됐다가 다시 묻힌 상당한 유물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직 불명확하다.

아슈르나시르팔 왕은 훗날 사람들이 아시리아를 영원히 기억할 수 있도록 하고 싶어 했다. 수많은 기록물, 거대한 궁전을 지은 것도 그 때문이다. 자신의 업적이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기억되기를 바랐던 한 왕의 바람처럼 아시리아 조각은 한때 가장 강했던 사람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뛰어난 예술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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