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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로 발달한 옛 도시는 때로는 현대보다 위대하다, 모헨조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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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로 발달한 옛 도시는 때로는 현대보다 위대하다, 모헨조다로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2.06.20 09: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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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헨조다로 /Wikimedia Common CC BY-SA 3.0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모헨조다로는 '죽은 자의 언덕'이라는 뜻이다. 뼈와 유물이 발견된 무덤들이 많아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인더스 계곡 문명의 수도, 모헨조다로는 1922년 영국인 고고학자 마셜에 의해 인더스 문명이 발굴되면서 알려졌다.

당시 영국은 인도를 지배하고 있었고, 인도에서 진행된 가장 큰 규모의 발굴 조사 중 하나였다. 고고학자들이 하라파를 발굴하기 시작했을 때 이들은 근처 비슷한 장소들까지 알게 되고 모헨조다로의 발견까지 이어졌다. 
 

촘촘한 벽돌로 쌓인 유적 /Wikimedia Common CC BY-SA 3.0

모헨조다로 근처에 있는 도시 하라파는 기원전 2500년 하라파족에 의해 세워졌다. 사막 한복판에서 발견된 모헨조다로는 이집트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 크레타 문명과 비슷한 시기에 번성했다. 인더스 계곡 문명은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에서 인도 북서부 강을 따라 땅을 넓혀 갔다. 인더스강 상류에 하라파가 번성했다면 하류엔 모헨조다로가 있었다. 하라파인들은 인더스강 근처에서 살았기 때문에 잦은 홍수가 도시를 위협한다는 것을 깨닫고, 홍수를 막기 위해 도시와 강 사이에 장벽을 쌓고 살았다. 

모헨조다로는 600여 년간 사람이 살았지만 서서히 인더스 계곡 문명은 쇠퇴해 갔다. 하라파인들은 작은 도시를 선호했고 하나둘씩 자신들이 살던 도시를 떠났다. 인더스 문명이 쇠퇴한 건 대표적으로 세 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는 홍수로 인한 멸망으로 아라비아 해가 일으킨 해일이 이 일대를 뒤엎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열대 지방에서 창궐한 전염병, 마지막으로는 나라끼리의 전쟁에 의한 멸망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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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인더스 문명을 사실상 하라파인들이 세웠고 전쟁을 했어도 자신들끼리 싸운 것이라 세 번째 설은 가장 설득력이 희박하다. 홍수로 멸망했다는 설도 인더스강의 범람 후에도 도시가 재건된 흔적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다지 설득력은 없다.

현재는 인더스강의 흐름이 바뀌어 모헨조다로 지역이 건조 지대가 됨으로써 멸망했다는 설이다. 토지가 건조해져 염분이 지표로 표출, 농작물 생산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어 이 문명이 멸망했다는 얘기다. 유적 최상층에서 학살된 것으로 보이는 수많은 인골이 발견된 것도 이 도시의 종말이 어쨌든 엄청나게 비극적이었음을 암시한다.
 

유물로 나온 조각들 /flickr

하라파인들은 기원전 7000년 전부터 인더스강 주변에 정착한 농부들이었다. 이들이 세운 모헨조다로와 하라파는 현재 인더스 계곡 문명의 대표적인 두 도시가 됐다. 모헨조다로는 약 7번에 걸쳐 파괴되고 재건되었다고 한다. 새 도시들은 오래된 도시 위에 다시 차곡차곡 세워졌다. 

모헨조다로는 대부분의 건물이 구운 벽돌을 사용해 격자형으로 반듯하게 지어진 인류 최초의 계획도시로, 전성기 때는 약 4만 명의 인구가 거주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는 당시 다른 도시 인구의 약 5배에 달하는 수치다. 모헨조다로가 발견되었을 때 역사계와 고고학계는 말 그대로 혁명이었다고 말한다. 인더스 계곡 문명은 모헨조다로보다 훨씬 이전에 생겼고, 이미 사람들이 수천 개의 마을을 이루고 살았지만 그 중에서도 모헨조다로는 가장 크면서도 우아한 도시였다. 
 

정교하게 나뉜 구획 /Wikimedia Common CC BY-SA 4.0

발굴 작업이 진행되면서 고고학자들은 기원전 1700년까지 핵심 문명이 이뤄졌다고 본다. 당시의 주거 환경은 벽돌로 지어 올린 집들로, 사막의 더위를 피하기 위하여 상당히 높이 지은 것이 특징이다. 건물들 사이는 도시 계획이 철저하게 되어 있어서 바둑판 같은 형태로 되어 있다. 거리는 집들 사이의 도로 구획이 열십자로 구획되어 있고 건물들은 구운 진흙과 햇볕에 말린 벽돌로 쌓아 올렸다. 

도시들에 세워진 공공건물들은 고위층의 사회 조직들이 쓴 것으로 추정한다. 구획으로 나뉜 모헨조다로엔 곡물 창고들이 많았는데, 시골에서 수확한 농작물을 운반하는 카트도 있었다고 한다. 창고의 배관은 곡물 건조 기능을 위해 만들었고, 곡물 창고 주변에는 공중목욕탕과 수영장도 있었다. 특히 큰 수영장은 누수를 방지하기 위해 천연 타르로 세밀하게 지어졌으며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것 말고도 종교 의식 등에 쓰였다는 말도 있다.
 

모헨조다로의 목욕탕 /Wikimedia Common CC BY-SA 3.0

모헨조다로의 도시 건물들은 소음이나 냄새, 도둑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설계되었으며 세계 최초의 배관 시스템 또한 포함된다. 모헨조다로에 살았던 사람들은 물과 위생에 대한 수준 높은 인식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깨끗한 물을 집안으로 들여오고, 폐수를 밖으로 내보내는 배수 시설을 만들었다. 도시 내 개별 가정들은 우물에서 물을 퍼다 썼다. 대부분의 집들은 실내 배수관을 갖고 있었고 집들 중 일부는 목욕을 위한 방도 있었다고. 골목길의 좌우로는 벽돌 한 장을 낮춘 수로가 패어 있어서 하수도 시설을 완비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도시의 건물들은 2층 높이까지 솟아 있었다고 하며 농업 도시였기 때문에 도시 곳곳의 700여 개가 넘는 우물과 큰 시장을 갖추었다. 심지어 고대 로마의 저택, 공중 욕장 등에서 쓰인 열기에 의해 바닥이나 벽을 가열하는 난방 시스템으로 우리나라로 치면 온돌 역할을 했던 히포카우스툼도 있었다. 또 모헨조다로는 방어 체계도 잘 구축된 요새화 도시로, 주요 도시의 서쪽엔 높은 탑이 있었고 남쪽엔 요새가 있었다.

모헨조다로는 정부 조직이 매우 강력했다고 한다.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의 위치에 있는 대표자는 선출직이나 엘리트 계층으로 이루어졌고, 정부는 중앙집권적 성격이 강했다. 모헨조다로와 하라파 모두 공공건축 사업이 진행되었고 사용한 벽돌도 같은 크기로 썼을 만큼 건축과 건설 형태 또한 두 곳 다 동일했다고 한다. 모헨조다로는 건축에 사용된 벽돌의 균일한 크기를 비롯해 무역에 필요한 표준화된 무게와 측정 기준 또한 갖췄다. 
 

모헨조다로의 대표적인 유물인 인물 조각상 /flickr
토기 /flickr

모헨조다로가 대규모 도시였던 만큼 무역도 활발했는데,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해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중국과도 해외 무역을 활성화시켰다. 이러한 무역으로 하라파인들은 건물 건설에 쓸 수 있는 재료들을 얻게 된다. 모헨조다로는 농사와 무역으로 부유해졌고, 주로 석재와 구리, 청동과 같은 금속을 사용해 집을 짓고 공예 작업도 했다고 한다. 인더스 문명 쇠퇴 원인엔 무역 관계의 중단도 한몫했다는 설도 존재한다. 이웃 무역 국가였던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가 청동기 시대 말기에 불안정한 상황에 이르렀고 이로 인해 무역 또한 중단되었다는 것이다. 
 

여러 재료로 만들어진 목걸이 /flickr
동물들의 모습이 새겨진 조각들 /flickr

198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모헨조다로는 1920년대에 재발견된 후 수십 년간 진행된 발굴로 인한 지하수의 분출로 고대 구조물들의 침식 피해가 이어졌다고 한다. 이후 1966년 유적지에 대한 모든 추가적인 고고학적 발굴이 중단된 상태다. 현재 지금까지 전체 유적의 10% 정도밖에 발굴되지 않은 모헨조다로에서는 무역과 경제 확장을 상징하는 도자기나 공예품 등이 발견됐다. 발굴된 유물 중 동물 조각상은 주로 진흙으로 빚어 만든 작은 형태로 코끼리, 소, 사자 등이 주로 많다. 그래서 이 흔적을 놓고 당시의 샤머니즘적 경향이 사람들 사이에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모헨조다로는 현재까지 천여 개의 도시가 발견되었으며 학자들은 아직도 인더스 문명의 언어를 해석하지 못한 상태다. 동물과 신, 인간 등의 모습이 석판이나 인장에 새겨져 있는 인더스 그림 문자는 그 변종만 해도 400개에 이르지만 기본적인 문자는 250자 정도로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컴퓨터를 통한 해독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고 그 결과 인더스 문자는 현재 남인도에서 사용되고 있는 드라비다어 계통에 속하는 문자로 밝혀졌다. 드라비다어는 기원전 3500년경 이란 고원에서 인도로 이주해 온 드라비다 민족이 사용했던 언어로, 현재 사용되고 있는 언어의 조상 언어다. 그러나 아직 인더스 문자에 대한 결정적인 해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모헨조다로는 아직도 비밀이 많은 곳으로 남아 있다.
 

모헨조다로 /Wikimedia Common CC BY-SA 3.0

모헨조다로엔 벽돌로 쌓은 집, 우물, 배수구, 목욕탕 등을 통해 다양한 직업과 계층의 사람들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또 이들이 세웠던 도시의 규모나 철저하게 구획별로 나누어진 도시 계획 등은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것이라 한다. 어쩌면 과거의 유적이 남긴 유산은 현대와 첨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더 과학적이었을 사람들의 현명함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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