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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탐구] 꽃 같은 화가, 얀 브뢰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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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탐구] 꽃 같은 화가, 얀 브뢰헬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2.06.14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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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브뢰헬 'The Adoration of the Kings' /flickr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여기 삼대에 걸쳐 내려오는 예술가 집안이 있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아들도 모두 예술의 피가 흘렀던 사람들이다. 그의 할아버지인 피테르 브뢰헬은 유명한 플랑드르 화가였고, 그의 아들인 얀 브뢰헬 2세는 아버지의 미완성 작품을 복제하고 아버지의 회화 양식을 계승하는 데에 주력했다.  

얀 브뢰헬은 피테르 브뢰헬의 아들로 폴 루벤스와도 각별한 사이였다고 한다. 두 사람은 17세기 초반 플랑드르 화가들을 이끄는 선두에 있었다. 얀 브뢰헬은 우화, 신화, 풍경 등을 포함해 그를 유명하게 한 정물화에 뛰어난 두각을 보였다. 그는 17세기 꽃과 관련한 그림으로도 유명했지만 그의 아버지가 그린 작품들, 풍속이나 농촌의 풍경들을 모방하고 붙이고 재작업하는 풍경화도 그렸다. 

할아버지에서 아버지로, 아들로

Hunters in the Snow /flickr

얀 브뢰헬의 예술의 피는 아버지인 피테르 브뢰헬에게서 이어받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다. 피테르 브뢰헬은 이전 르네상스 시기 미술 경향을 지배했던 종교화와는 다른 경향으로 나아갔다. 그의 작품은 주로 시골 농부들의 생활, 신화, 그 당시의 정치적·사회적 음모 같은 주제가 많았다. 주제는 현실적이거나, 풍자적이거나, 그로테스크한 유머가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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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이후 다른 예술가들은 이 '소작농 브뢰헬'이라 알려진 사람의 정신을 이어받아 작업하기도 했다고. 피테르 브뢰헬의 작품은 인간과 자연 세계에 대한 그의 통찰력이 돋보인다는 평을 받는다. 당시 화가라면 미술 공부를 위해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나는 게 거의 필수 코스였는데, 그는 1551년 앤트워프 화가 길드에 가입해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나 3-4년 정도를 머무르게 된다. 

그는 이탈리아에 있는 동안 플랑드르 스타일에 이탈리아 요소들을 섞으며 작업 스타일을 확립해 나갔다. 또 자신만의 복잡하고 독창적인 예술의 시발점으로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참고로 히에로니무스 보스는 브뢰헬에게 영향을 준 것 빼고는 어떤 그룹, 어떤 학파와도 연관성을 찾을 수 없는 무인도 같은 사람이었다고. 
 

The Fight Between Carnival and Lent /flickr

브뢰헬은 초기 판화 디자이너로 활동하다가 앤트워프의 출판업자 히에로니무스 코크의 문하생으로 들어간다. 이 시기 동안 브뢰헬은 앤트워프 시대, 낙관론이 만연했던 작품과는 달리 인간의 어리석음과 타락에 대한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비관주의를 자신만의 스타일로 그려냈다. '사육제와 사순절 사이의 싸움'은 보스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작품으로 가톨릭에서 40일간 고기를 먹지 않는 '사순절'과, 사순절이 오기 전 고기를 많이 먹으려 시작됐던 '사육제(카니발)'를 치르는 사람들의 아수라장이 눈에 띈다. 풍부한 색채가 사용되었으며 또 수수께끼 같은 환상적인 매력을 발산한다. 
 

Tower of Babel /flickr

그의 또 하나의 역작인 '바벨탑'은 구약성서의 창세기에 실린 이야기에 영감을 받았다. "높고 거대한 탑을 쌓아 하늘에 닿으려 했던 인간들의 오만한 행동에 분노한 신은 본래 하나였던 언어를 여럿으로 분리하는 저주를 내렸다. 바벨탑 건설은 결국 혼돈 속에서 막을 내렸고, 탑을 세우고자 했던 인간들은 불신과 오해 속에 서로 다른 언어들과 함께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피테르 브뢰헬의 '바벨탑'은 부분적으로 지어진 거대한 탑 주변으로 작은 인물들이 점철되어 있다. 일부는 굽어 있는 층을 따라 걸어가며, 다른 인부들은 비계 위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 오른쪽엔 배들이 여러 건축 자재를 내려놓고 있으며 모든 요소들은 매우 섬세하다. 창세기에서 신은 왕이 하늘 높은 곳까지 올라갈 수 있도록 설계된 탑이 세워지는 것을 막고 건설자들이 서로 언어소통이 되지 않도록 저주를 내린다.

작품에서는 님로드왕이 아첨하는 신하들과 함께 자신의 프로젝트를 논의하고 있으며, 이미 힘이 약해진 신하들은 그의 발밑을 기어다닌다. 피테르 브뢰헬은 넓은 지역을 하나의 화면에 담았고, 그림 중심에는 바벨탑을 배치해 탑이 얼마나 커다란 크기인지를 강조하고 있다. 그 당시 플랑드르 화가들이 많이 묘사했던, 하늘에 올라 신을 이기고 싶었던 인간의 탐욕과 오만함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Peasant Wedding /flickr

피테르 브뢰헬은 그의 전 스승의 딸과 결혼해 자식들을 낳았는데 첫째와 둘째 아들 둘이 모두 화가로 활동했다. 피테르 브뢰헬은 말년에 '농부의 결혼식' 작품 등 해학적인 농부들의 모습을 주로 그렸다. 이 작품은 그의 가장 유명하고 사랑받는 작품 중 하나로, 피테르 브뢰헬은 농부로 가장하고 시골의 결혼식에 직접 가서 피로연을 지켜보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가 가까이에서 관찰한 이러한 농촌의 기록은 따뜻한 애정이 비쳐지면서도 상당히 풍자적이다. 축하객들은 혼례식은 뒷전이고 자기들끼리 먹고 마시는 일에 몰두하고 있는데 그만큼 그들의 삶이 가난하면서도 배고프기 때문일 것이다. 혼례식이 열리고 있는 장소와 가난한 세간, 소박한 잔칫상이 그 반증이다. 
 

Bouquet of Flowers in an Earthenware Vase /flickr

아버지 피테르 브뢰헬이 네덜란드 소작농의 일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회화 장르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다면 얀 브뢰헬은 식물들을 섬세하게 그린 풍경화와 정물화로 인해 '꽃 같은 브뢰헬'로 알려져 있다. 얀 브뢰헬이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피테르 브뢰헬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는 형제와 함께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의 할머니 또한 예술 활동을 했다고 하며 아들들의 미술 선생님으로도 활동했다고 한다. 할머니는 아들들에게 미니어처 그림 그리기, 수채화 등을 가르쳤고 형제들은 지역 예술가들에게 수업을 받기도 했다. 

1592년 얀 브뢰헬은 이탈리아 로마로 떠났고 거기서 그는 플랑드르 지역과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화가인 폴 브릴과 친구가 된다. 폴 브릴의 형인 마태우스 브릴과 합류한 브뢰헬은 브릴의 생생한 풍경과 자연주의에 영감을 받았다. 얀 브뢰헬은 로마에 있는 동안 30~40센티미터 사이의 크기 구리판에 유화로 그려진 '캐비닛 페인팅'(Cabinet painting)이라고 불리는 소형 그림 작업에 탁월했던 로텐 함머를 알게 된다. 

로텐 함머는 주로 종교나 신화적 작품을 그렸으며 독일과 이탈리아의 양식을 결합시켰다. 브뢰헬은 폴 브릴, 로텐 함머와 자주 같이 다니며 로마의 고대 유적들을 스케치하고 그렸다. 얀 브뢰헬은 페데리코 보로메오 추기경과도 알게 되었고 든든한 후원자를 얻게 된다. 그는 보로메오 추기경의 베르첼리에 거주할 수 있었고, 1595년 6월 보로메오가 밀라노 대주교가 되었을 때 브뢰헬은 그를 위한 많은 풍경화와 꽃 그림을 그렸다. 

밀라노에서 1년 정도 머문 얀 브뢰헬은 1596년 앤트워프로 돌아와 활동했다. 1601년 10월 4일에는 안트베르펀 시민 계급을 부여받으면서 '브뤼셀의 화가이자 피터르의 아들인 얀 브뢰헬' 이라는 칭호를 받게 된다. 1606년에는 남네덜란드의 총독을 역임했던 알브리히트 7세 폰 외스터라이히 대공과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 데 에스파냐 왕녀 부부의 궁정 화가로 임명되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The Garden of Eden /flickr

얀 브뢰헬은 다재다능한 예술가였고 특히 꽃을 다룬 정물화, 풍경화, 지옥불이 끓는 지하 세계의 묘사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했다. 그는 자연에 대한 정확한 묘사와 함께 세밀화 기술이 뛰어났다. 그의 작품들은 작은 백과사전에 동물과 새들의 그림이 실린 카탈로그 같다는 평이 있을 정도다. 

그는 많은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작업장을 운영했는데, 1635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얀 브뢰헬은 그의 아버지와 같은 방식으로 작업장을 운영했다. 피테르 브뢰헬은 다른 예술가들과의 협업이 많았고 얀 브뢰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다양한 기술을 가진 덕분에 주로 폴 브릴, 프란스 프랑켄 2세, 헨드릭 드 클레르크 등 다양한 기술을 가진 예술가들과 함께 작업했다. 
 

Madonna on Floral Wreath /Wikimedia Common

얀 브뢰헬의 또 다른 협업자는 폴 루벤스였다. 두 예술가는 1598년부터 1625년까지 약 25개의 작품을 공동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아마존의 전투', '화관 속의 성모' 등이 있다. 

얀 브뢰헬은 네덜란드에서 순수한 꽃 정물화를 그리기 시작한 최초의 화가들 중 하나였다. 그가 그린 순수한 정물화는 일반적으로 꽃병의 꽃이나 다른 그릇에 들어 있는 꽃을 주요 주제로 묘사한다. '꽃 같은 브뢰헬'이란 별명을 얻었을 땐 이미 그는 정물화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증거기도 하다. 그의 정물화는 자연 세계의 일반적인 묘사이며, 자연을 사실적이다 못해 거의 과학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그의 기술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Flower Bouquet /flickr

그의 꽃은 어두운 배경에 놓인 꽃에 나비나 달팽이 같은 사소한 아이템이 추가되는 형태다. 브뢰헬은 희귀한 꽃들을 찾으면서도 자신이 그리는 꽃에 튤립, 아이리스, 장미 등 흔한 꽃도 썼다. 서로 다른 계절에 피는 꽃을 모으고, 앤트워프에서 볼 수 없는 꽃을 그리기 위해 여행을 하기도 했다. 브뢰헬은 과학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꽃을 자세히 표현했다. 꽃을 겹치지 않게 배열해 각각의 꽃들이 잘 보이도록 했고 심지어 다양한 각도로 보인다. 
 

Landscape with the Flight into Egypt /flickr

그는 아버지 피테르 브뢰헬이 남긴 미완성 그림들을 복원하는 데에도 힘썼다. 피테르 브뢰헬은 풍경화의 중요한 선구자였고, 얀 브뢰헬 또한 풍경을 그릴 때 인물들을 어떻게 배치하는지를 아버지의 그림에서 배웠다. 그는 원거리에 있는 인물들의 크기를 줄임으로써 광대한 풍경을 연출했다. 아버지처럼 얀 브뢰헬도 다양한 풍경을 그렸는데 주로 시장, 시골길을 돌아다니는 농부들을 그렸다. 그의 풍경화는 17세기 후반 플랑드르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고. 
 

Allegory of Abundance /Wikimedia Common

얀 브뢰헬의 아들 얀 브뢰헬 2세도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아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작업장을 물려받는다. 그는 아버지와 비슷한 스타일로, 또 아버지와 같은 주제로 그림을 그렸으며 아버지가 걸어왔던 것처럼 당대 주요 플랑드르 화가들과도 많은 협업을 했다. 그 또한 1622년 밀라노로 가 아버지의 후원자이자 친구인 페데리코 보로메오 추기경의 환영을 받아 미술 공부를 이어갔다. 

1625년까지는 시칠리아의 지상낙원이라 불렸던 팔레르모에 거주했는데, 그때 아버지가 콜레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는다. 바로 출발해야 했지만 그 또한 열병에 걸려 16일 후에야 떠날 수 있었다고. 1603년에 어머니가 먼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아버지의 작업장에서 교육을 받았던 그였고, 아버지의 생각을 따라 안토니 반 다이크와 함께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났던 그였다. 

이탈리아 유학은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부고로 끝이 났고, 앤트워프로 돌아온 그는 1651년까지 아버지의 작업장을 이어받아 운영했다. 그 해 그는 앤트워프 출신 유명 화가인 에이브러햄 얀센의 딸과 결혼했고 총 11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 중에서 5명이 화가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종종 아버지가 그랬듯이 작품을 복제해 내다 팔거나 섬세하게 묘사했다. 얀 브뢰헬 2세는 아버지의 화풍을 이어가는 데에 모든 경력을 바쳤다고 한다. 이러한 행보는 당대에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꼼꼼한 섬세함과 장식적인 작품에 대한 수요가 높았던 당시 네덜란드 미술품 수집가의 구미를 맞추고자 노력했다고. 
 

Flowers in a Wooden Vessel /flickr

얀 브뢰헬의 아버지는 플랑드르 화가로 풍경화의 선구자라 불렸으며, 아들인 얀 브뢰헬 2세 또한 예술가의 길을 걸었다. 여러 예술가들 간의 협업, 아버지의 기술을 습득하면서도 자신이 쏟았을 끊임없는 노력 등이 합쳐져 그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가 그리는 꽃을 보면 과학적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갈 것이다. 꽃을 누구보다도 꽃답게 그리는 화가인 얀 브뢰헬은 그의 별명대로 정말 '꽃 같은 화가'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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