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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의 세월이 쌓은 유산, 사크사우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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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의 세월이 쌓은 유산, 사크사우아만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2.05.25 09: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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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크사우아만 /unsplash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잉카의 수도였던 쿠스코는 수도였던 만큼 적들의 침입을 방어할 수 있는 성벽이 필요했다. 잉카인들이 만든 사크사우아만은 현재 쿠스코 북쪽 외곽에 존재하는 커다란 성채로 남았다. 15세기 잉카를 점령한 9번째 황제 파차쿠티는 잉카 제국의 황금기를 이끌었으며, 당시 잉카 문명의 훌륭한 석조 건축 기술이 빛나던 시기였다.

사크사우아만은 파차쿠티와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만들어졌고 1983년 쿠스코와 사크사우아만은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사크사우아만은 80년의 세월, 3만 명의 노동자들의 인력으로 만들어졌다. 가장 큰 돌만 해도 20톤이 넘으며, 돌과 돌 사이가 완전히 밀착되어 있어 잉카의 석조 기술이 얼마나 우수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고도의 기술은 유산을 만든다

사크사우아만 /flickr

사크사우아만은 케추아어로 '배부른 매가 사는 곳'이란 뜻인데, 실제로 이 지역에 매가 많이 살아 붙은 이름이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가파른 언덕에 위치한 이 요새의 가장 오래된 거주지는 약 90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스페인이 쳐들어오기 전까지는 사크사우아만이 무슨 도시였는지는 정확히 알려진 바 없이 다만 요새라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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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차쿠티 황제는 수도 쿠스코를 두고 '사자의 도시'라 불렀는데, 실제로 쿠스코라는 도시를 위에서 봤을 때 퓨마 모양이라는 설이 있다. 퓨마가 잉카인들에게는 매우 신성한 동물이었기 때문에 그럴싸한 이론이다. 두 강이 합류해 흐르는 지점을 꼬리로 비유하고 퓨마의 몸은 큰 광장과 그 주변의 집들이라는 것이다. 잉카인들은 도시 북쪽, 가장 높은 고원에 만든 이 요새를 두고 퓨마의 머리라 불렀다. 잉카인들에게 퓨마는 모든 것을 지켜보고 돌보는 신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사크사우아만의 확장은 파차쿠티 황제 시대에 시작된다. 인구는 갈수록 늘어 갔고 먹을 것은 부족해 자연히 점점 더 넓은 영토를 필요로 했다. 파차쿠티는 북쪽으로 영토 확장 계획을 세웠고, 주변 지역 마을들을 점령해 제국을 확장해 나갔다. 스페인인들이 이곳을 쳐들어올 때까지 요새로, 또는 의식의 성지로 사크아우만은 존재했다.
 

촘촘히 쌓인 돌담 /flickr

오랜 시간 잉카 제국은 이 장소를 확장해 돌로 거대한 성벽을 쌓았다. 스페인의 연대기 작가 페드로 치에자 데 레온은 그의 저서에 '이 요새는 파차쿠티 시대에 시작되었다'고 저술했으며 파차쿠티는 사크사우아만 건설을 위해 지방에서 2만 명을 공수했으며 4천여명이 돌을 채석하고, 6천여명이 가죽과 삼베로 만든 끈을 이용해 돌을 묶어 끌고 갔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땅을 파 기초를 다지고 기둥과 대들보를 잘랐다고. 요새를 지은 사람들에게 이 작업은 일종의 사회봉사이자 의무기도 했다. 

원래 잉카인들이 쿠스코란 도시를 만들었다는 설이 있지만 이미 쿠스코에는 잉카인들 이전 현지 원주민들이 살고 있던 곳이었다. 잉카 제국을 멸망시켰던 스페인의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쿠스코에 입성했을 때 같이 따라 들어갔던 페드로 피사로는 그들이 발견한 것을 이렇게 묘사한다. 

'언덕 위 그들은 석조 벽으로 둘러싸인 튼튼한 요새와, 매우 높은 탑을 갖고 있었다. 벽 아래쪽엔 너무나 크고 두꺼운 돌들이 있어 사람들의 힘으로 옮길 수 없을 것 같아 보였다. 돌들은 하나같이 빈틈없이 딱딱 맞았으며 전체 요새는 언덕 위 평평한 곳에 지어졌다. 수많은 방들에는 창, 화살, 곤봉, 커다란 직사각형 방패들로 가득 차 있었다'

스페인의 공격이 있었을 때 이곳은 요새 역할을 했고 수천 명의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었던 큰 광장은 공동체 의식 활동을 위해 만들어졌다. 
 

수추나 /flickr

유적지 뒤쪽엔 '수추나'라 불리는 곳이 있으며 사람들이 살았던 테라스, 건물, 뜰, 저수지를 포함한 관개 시설이 있다. 요새 서쪽에는 무유크마르카라는 높은 탑의 기단이 남아 있고, 나머지 탑인 파우카마르카와 사약마르카는 병사들이 머물던 곳으로 일종의 막사 역할을 했다. 언덕 꼭대기엔 일직선으로 배치된 탑들은 모두 지하 통로로 연결되어 있었다. 물이 풍부했던 이곳은 지금도 수로의 일부가 남아 있으며 현재는 파괴되어 기단만 남아 있다. 
 

바뇨스 델 잉카 /flickr

페루의 온천 명물이라고 하면 '바뇨스 델 잉카'라 부르는 온천을 들 수 있는데, 사크사우아만 북동쪽에 있는 이 곳은 잉카 왕의 휴식처이자 물을 숭배하는 곳으로 쓰였다. 잉카 시대에 온천은 귀족이나 특권층만 누릴 수 있었던 곳으로, 아름답게 장식된 수영장도 있었으며 1년 내내 흐르는 두 개의 수로가 있다. 지금도 가면 잉카 황제가 즐기던 온천의 돌담을 볼 수 있다.

사크사우아만 최초의 구조물들은 진흙과 점토만을 이용해 만들었지만, 이후 통치자들은 4미터가 넘는 높이와 100톤이 넘는 거대한 돌을 사용한 석조 작업으로 대체했다. 어떻게 보면 대규모 프로젝트라 부를 수 있는 일을 완성한 잉카인들은 옛날부터 유능한 석공들이 많았다고 한다. 거대한 돌들은 채석 작업을 거쳐 청동 도구만을 사용해 모양을 다듬었다. 
 

돌 곳곳에 도구를 쓴 여러 흔적이 보인다 /flickr

돌은 밧줄이나 통나무, 지렛대, 흙으로 만든 경사로 등을 사용해 이동했고 일부 돌엔 노동자들이 돌을 잡는 데 쓰인 움푹 들어간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잉카는 발전한 문명이었지만 심지어 당시엔 바퀴라는 것도 없었다. 틈 하나 없이, 철제 도구 하나 없이 어떻게 돌을 쌓았는지는 현대의 건축 공법으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미스테리 그 자체다.
 

한치의 틈도 없이 붙은 돌들 /unsplash

돌들은 채석장에서 모양을 잡고 최종적으로 쌓을 곳에서 다시 작업한 것으로, 채석장에서 성벽이 올라간 터로 가기까지 그 경로에서 남아버린 여러 미완성 돌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쌓여 있는 돌들은 접착제가 따로 필요 없을 정도로 일정하게 붙어 있는 모습이다. 돌벽은 종이 한 장도 통과하지 못할 정도로 정교하게 쌓여 있는지라 스페인 사람들이 이 성벽을 처음 봤을 때 이 작업을 악마가 한 게 아니냐는 말까지 있을 정도라고. 한치의 오차 없이 돌이 붙어 있는 모습이 이렇게까지 정교할 수 있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다. 가장 큰 돌의 무게만 128톤이라고 하니 불가사의한 일 그 자체일 수밖에.

벽 하나를 만드는 데에만 수개월이 걸렸다고 하며 잉카인들은 성벽을 쌓을 때 지진에 무너지는 것까지 대비하면서 돌을 쌓았다. 덕분에 500년 동안 이 구조물들은 큰 손상 없이 보존된 상태로 발견됐다. 
 

주변 경관과도 잘 어울리는 사크사우아만 /flickr

잉카인들은 구조물만 세워두는 것이 아닌 자연 풍경과의 조화도 중요시했는데, 사크사우아만 성벽의 윤곽은 뒤편에 있는 산맥의 윤곽과 비슷하게 만들었다고. 사크사우아만에는 태양신 인티의 사원을 포함해 의식 장소들과 무기들을 보관하는 창고들이 있었다. 스페인의 페루 정복 전까지는 사크사우아만은 요새로 사용되었고 스페인 사람들이 쿠스코를 정복하기 전까지도 잉카인들은 조직적, 지속적으로 침입을 막았다. 높은 성벽은 침입자들을 막기에 효율이 좋았다. 18m 높이의 성벽은 지그재그 형태로 배치되어 있고 성벽에 숨어 있는 군사들이 침입자들을 쉽게 잡을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졌다. 

이 때문에 페드로 피사로는 기병을 동원해 사다리를 세우고 성벽을 기어올라가게 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그의 동생이 죽기도 했다고. 잉카 제국이 붕괴된 이후 사크사우아만의 돌들은 대부분 쿠스코에서 세워진 식민지 건물에 쓰였다. 도저히 옮길 수 없는 커다란 돌만 남은 이 유적지는 잉카 반군들이 이 돌을 쓰지 못하게 하기 위해 흙으로 덮였고, 1934년 발굴되기 전까지 죽은듯이 숨어 있었다. 
 

터널을 구경하는 사람들 /flickr

유적지에서 쿠스코 시내까지는 마치 거대한 미로 같은 터널이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이 가장 넓은 터널의 끝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고 한다. 터널의 끝은 태양의 신전으로 이어진다는 말이 있지만 들어갔던 사람들이 실종되거나 하는 바람에 현재 터널의 입구는 닫혀 있는 상태로 출입 불가능이다.
 

사크사우아만에서 풀을 뜯는 양들 /unsplash

사크사우아만은 그 시절 잉카인들이 태양에 그 해의 풍작을 기원하는 제사인 태양제를 재현하는 장소다. 잉카인들은 당시 태양신 인티에게 제물을 바치는 의식을 진행했다고 한다. 지역 사람들은 화려한 의상, 경쾌한 음악, 전통적인 음악으로 의식을 채운다. 옛날엔 제물을 바쳤다면 지금은 진짜 희생 대신 표현만 할 뿐이다. 이 축제는 에콰도르, 콜롬비아, 칠레 등 다른 토착민들의 문화의 일부이기도 하다. 자연재해나 시위 같은 큰 일만 없다면 사크사우만은 언제나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있는 곳이다. 한번쯤 방문하게 된다면 중요한 문화유산이란 가치와 함께 오랜 시간 동안 머물다 스페인의 침입에 스러져간 잉카인들의 시간을 느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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