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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호 목적으로 지은 건물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카이핑 댜오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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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호 목적으로 지은 건물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카이핑 댜오러우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2.05.18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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댜우러우 주변의 단층집들 /flickr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1920년대 귀국한 중국 이민자들에 의해 세워진 중국 광둥성 장먼(江門)에 있는 마을 카이핑의 댜오러우는 이민자들의 성향처럼 인도네시아, 유럽, 북아메리카 등 여러 나라들의 스타일을 반영하고 있다. 1920년대 당시 중국은 내부 갈등과 혼란이 만연한 시대였다. 

카이핑 댜오러우는 혼란의 시기, 원래 방호 등의 목적을 위해 세워진 곳이었다. 나라 곳곳에 도적이 들끓었고 여러 도시들이 약탈을 당했다. 카이핑 댜오러우는 야간에 쳐들어올 적들을 대비한 감시탑으로, 침입자들이나 납치범들로부터 자신들의 가족을 보호하는 수단으로 쓰였다. 2007년 “카이펑 누각과 촌락”으로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방어를 위한 건물, 이제는 문화유산으로

댜오러우 /flickr

방어탑을 건설하는 일종의 전통이었다. 카이핑 사람들 역시 탑을 쌓기 시작했고, 카이핑의 댜오러우 또한 이 전통의 마지막 번성기이기도 했다. 댜오러우는 19세기와 20세기 중국과 서양의 독특한 건축 양식의 융합을 보여준다. 명나라부터 시작해 20세기 초까지 건설되었으며 오늘날 카이핑에는 약 1,800여개의 건물이 현존한다. 산둥성 중부 태산에도 약 500여개의 건축물이 있으며 광둥성의 다른 지역에서도 드문드문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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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시대 한족들은 중국 중원에서 카이핑으로 옮겨와 월족(중국 윈난성에 거주한 소수민족)들과 섞이기 시작했다. 월족은 농업과 어업으로 생활했으며 풍수 원리에 따라 씨족 집단끼리 거주했고 진흙 벽돌이나 구운 벽돌과 나무로 집을 지었다. 16세기에 북쪽의 강을 통해서 오는 도적들의 약탈이 늘어나고 홍수가 잦아지면서 이에 대비하기 위해 요새화된 망루를 짓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댜오러우’로 알려졌다. 

카이핑은 ‘평화의 시작’이라는 뜻으로, 이 마을 사람들은 16세기 중반부터 나무로 만든 배를 타고 다니면서 동남아시아 근처에서 해상 무역을 하기 시작했다. 1839년에 가난한 농부들은 마을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탄광이나 철도 선로 건설 노동자로 일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북쪽에서 내려온 하카족(중국의 소수 민족)과 전쟁을 하면서 어려운 상황이 시작되었고, 인구가 늘어나면서 먹을 것이 부족해지자 대단위 이민이 시작됐다.

수천 명의 카이핑 마을 사람들은 마카오, 홍콩, 미국, 캐나다, 호주로 떠났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여러 나라에서 급속한 경제 성장이 일어나면서 중국 화교들의 재산도 엄청나게 늘어났다. 화교들은 부를 이뤘지만, 살고 있는 나라의 발전에 대해 자신들의 피와 땀이 사회적으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고 여겼다. 자연스럽게 화교들의 꿈은 고향으로 돌아가 살면서 고향의 부에 기여하는 것이 됐다. 
 

서양식 스타일이 돋보인다 /flickr

당시 카이핑은 관할하는 행정 기관이 없었던 탓에 치안이 매우 불안한 지역이었다. 또한 하천이 많아 폭우가 내릴 때마다 침수가 흔했다. 카이핑 주민들은 침수 피해를 막고 도적으로부터 피신하기 위해 이때부터 고층 누각을 짓기 시작했다. 댜오러우 건설은 이 지역 출신 화교들이 19세기 초에 귀향하면서 전성기를 맞았다. 귀향한 화교들은 도적으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댜오러우를 지었고, 현존하는 1800여개의 댜오러우 중 90% 정도가 1900년에서 1931년에 지어진 것이다.

서구 문화를 접했던 화교를 중심으로 건축이 되었기 때문에 외관은 유럽식 건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댜오러우는 화교들이 사는 곳 주변에 정말 많았다고 하며, 화교들의 자금 또한 댜오러우를 올리는 데 쓰였다. 원래는 침입자들을 막기 위해 지어졌지만 많은 건물들은 사람들의 주거지로도 쓰였다. 하나의 가족이 단독으로 지을 때도 있었고, 여러 공동체가 함께 짓는 경우도 많았다. 

1949년 이후 본격적인 행정 체계가 만들어지면서 댜오러우는 방어적인 목적을 잃고 사람들은 떠나갔다. 그러나 여전히 댜오러우는 중국과 서양의 독특한 혼합 문화에 대한 상징으로 남아 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스타일로 설계, 건축, 장식되어 있으며 로마 양식의 돔이라든지 고전 스타일의 지붕이라든지, 중국 전통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 특징이다. 
 

돔 형식의 댜오러우 /flickr

카이핑 댜오러우는 주로 외적의 침입을 막는 데 쓰였다. 탐조등, 경보기 등이 갖춰져 있어 침입자를 미리 찾아내고 마을 주민들에게 경고를 보내는 것도 용이했다. 댜오러우는 총 네 가지의 종류가 있는데 석조 망루, 흙다짐 망루, 벽돌 망루, 콘크리트 망루 등이다. 석조 망루는 주로 구릉 지대에 위치해 있으며 일부 벽은 가공한 돌로 쌓았지만 다른 벽은 자연석으로 쌓았다. 약 10개로 카이핑의 전체 탑 중 약 0.5%를 차지한다. 

흙다짐 망루는 지역 사람들에게는 '지구 망루'라 불리며, 수십년 동안 바람과 비의 침식을 겪었지만 아직도 매우 견고하다. 벽돌 망루에서 쓰인 벽돌은 명나라 때의 붉은 벽돌, 청나라 시대 검은 벽돌, 현대에 들어서 만든 벽돌 등 세 가지로 만들어졌다. 다만 명나라의 토착 벽돌은 카이핑에서는 매우 드물며, 벽돌 망루는 약 100여개 정도 남아 있다.
 

콘크리트 망루 /flickr

콘크리트 망루는 대부분 1920-1930년대에 지어졌는데, 중국과 서양의 건축적 특징들을 결합했다. 영국에서 수입한 시멘트, 모래, 자갈 등으로 만든 이 망루는 매우 튼튼했다. 다만 건설 자재를 주로 서양에서 수입했기 때문에 비용이 꽤 많이 들었다고. 그래서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탑 바닥의 일부는 나무로 만들었다. 콘크리트 망루는 1474개로 전체 카이핑의 망루 중 80%로 제일 많다.

댜오러우의 목적에 따라서는 중러우, 쥐러우, 겅러우로 나뉜다. 마을 뒤쪽에 주로 중러우를 세웠고 건설 시 마을 주민들의 자금 지원을 받았다. 각 집들은 도적들의 침입, 홍수나 태풍을 피하기 위해 중러우에 임시로 사용 가능한 방을 하나씩 갖고 있었다. 중러우는 폐쇄적이고, 단순했지만 방어성이 강했다. 
 

쥐러우 /flickr

쥐러우는 부유층들이 주로 소유했는데, 방어 기능과 주거 기능 모두 있었다. 부유층들의 소유라 특별히 더 높이 지었고, 여러 부가 생활 시설도 많았다. 쥐러우는 때로는 마을의 상징이 되기도 했고, 중러우보다 건축미를 더 강조하는 용도이기도 했다. 수가 가장 많기도 한데, 총 1149개로 약 62%를 차지하고 있다. 

겅러우는 주로 마을 입구나 언덕 등 넓은 시야를 확보할 수 있는 장소에 지어지는 누각으로, 탐조등이나 경보기가 설치되어 있다. 도적이 습격했을 때, 마을 전체가 혹은 주변 기타 마을과 협력해서 대응할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봉수대” 역할을 하며 현재 221채가 남아 있다. 가장 큰 특징은 일반 주택보다 고층이어서 방어에 유리했다는 점이다. 

카이핑 댜오러우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남아시아, 오세아니아, 북아메리카의 여러 나라에서 돌아온 화교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반영하는 건물이다. 또한, 엄청난 부를 이루며 발전한 중국의 화교 사회와 카이핑 마을의 지속적인 관계를 반영한다. 유네스코는 세계문화유산지정을 두고 '댜오러우는 세계의 특정한 문화 지역 내에서 인간이 문화적 가치를 서로 교환한 것(북아메리카에서 중국으로 돌아온 화교들이 토착 지방 전통과 서양 건축 양식을 섞어 지은 건축물)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고 평했다.
 

리 가든 /flickr

리 가든은 1920년 미국계 화교에 의해 세워졌으며 약 10년 동안 지은 개인 정원이다. 18세기 중반 청나라 중기 건륭제 때 쓰인 '홍루몽'에 묘사된 그랜드뷰 가든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정자와 다리, 벽화, 장식이 풍부하다. '스몰뷰 가든'이라 불리는 리 가든은 중국 전통 정원 스타일, 서양식 건축 스타일 및 장강 남쪽의 수상 마을 스타일 등 여러 가지가 혼합되어 있다.
 

리 가든 /flickr

리 가든은 '다리, 개울, 가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정원은 거대한 규모의 정원, 작은 정원, 가정집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나뉘며 인공 개울을 잇는 다리들이 정원 풍경을 아름답게 만든다. 작은 정원은 사람들의 휴식 또는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로도 쓰였다. 현재 중국에서는 AAAA급 관광지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쯔리촌 /flickr

카이핑의 쯔리촌은 '독립독행', 즉 자력갱생을 바라는 마음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248명의 동포들이 서양과 홍콩, 마카오 등에서 이주해 왔다고 한다. 대부분의 댜오러우는 20세기 중반 버려졌지만 복원된 주택들도 존재한다. 전하이강 옆에 위치한 이 곳은 서쪽에 있는 성곽으로 둘러싸인 마을로 연못, 논, 초원의 목가적인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강이 가까이 있어 항상 침수와 홍수가 문제였지만 탑과 성곽이 마을을 보호했다.
 

봄의 풍경이 궁금한 쯔리촌 /flickr

77개의 전통 민가, 6개의 별장, 9개의 타워주택 등 여러 주택들을 구경할 수 있으며 서로 건축 양식들이 다르다. 마을에 들어서면 마치 중세에 있는 성들을 구경하는 느낌이 든다. 몇몇은 5-6층이며 대부분은 2층 주택으로 만들어졌다. 특히나 쯔리촌은 건물들이 주변 환경과 어우러지며 원없이 녹색을 구경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연꽃 연못이 유명하다고 하며 전통적인 주거지와 망루가 고루 분포되어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멀리서 보이는 마강용 촌락의 탑들 /flickr
마강용 촌락의 한 건물 /flickr

마강용 촌락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들'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카이핑에서 20㎞ 정도 떨어져 있으며 5개의 독립된 마을들이 모여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13개의 건축물들은 매우 잘 보존되어 있으며 2층부터 7층까지 높이도 다양하다. 철근 콘크리트와 벽돌을 사용해 건물을 만들었으며 중국, 영국, 독일, 유럽 등 여러 스타일이 혼합되어 있다. 마을에 있는 7개의 댜오러우와 8개의 별장은 20세기 초에 지어진 것이라고. 2007년 6월,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 세계유산위원회는 마강용 마을을 세계문화유산목록에 등재했다.
 

모여 있는 집 /flickr

이사를 왔던 사람들도 많이 떠나간 지금, 대부분의 댜오러우는 텅 빈 상태로 정부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그러나 화교들은 가족 행사로 마을에 돌아오기도 하고, 조상의 제사를 위해 돈을 기부하기도 하며 이곳을 정신적 고향으로 여기고 있다. 몇몇 주택에는 원래의 가구와 가재도구들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주변 마을과 농장은 아직도 지역 경제의 일부로 활동적인 기능을 하고 있다고 한다.

탑 정상에 올라 바라보는 마을 전체의 풍경은 관람객들이 앞다투어 잊을 수 없는 풍경이라 말한다. 댜오러우는 화교들의 배경, 문화, 역사를 알 수 있기도 하지만 이국적인 아름다움까지 느낄 수 있으며 큰 돈을 벌어 성공한 화교들의 결실, 화교들의 걸작이라 칭송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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