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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탐구] 왕의 끝없는 총애를 받은 뛰어난 1등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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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탐구] 왕의 끝없는 총애를 받은 뛰어난 1등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2.05.16 0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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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chen Maid with the Supper at Emmaus' /flickr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정치적으로 몰락했었던 스페인의 펠리페 4세 시기는 문화적으로는 가장 빛나는 시기로 평가받는다. 펠리페 4세는 문화, 지식 분야의 열렬한 후원자였고 왕 자신도 극작가들의 애호가로써 자신이 연극 작품을 쓰거나 직접 극에 출연하기도 했다. 

펠리페 4세는 미술 후원에도 적극적이었다. 왕실 미술관을 넓혔고 약 800여점의 그림을 구입해 부엔 레티로 궁전에 배치했다. 그는 여러 예술가들을 후원했지만 그 중에서도 유독 디에고 벨라스케스와 각별했다고 한다. 24살의 젊은 나이로 벨라스케스가 궁정 화가가 되어 50세가 넘은 기존의 궁정 화가 6명에게 시기를 받자 공정한 경쟁의 장을 마련해 질투로부터 정당하게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기도 했다. 

또한 인사위원회의 반대를 물리치고 벨라스케스를 마부장으로 임명하였으며, 귀족 출신이 아니었음에도 결국 귀족의 작위를 내렸다. 올리바레스 백작이 파면된 후에는 왕의 신임이 더 깊어져 왕실의 열쇠까지 받는 등 엄청난 특권을 누렸다. 벨라스케스가 외교 임무로 외국으로 떠나 있던 동안은 다른 궁정 화가가 펠리페 4세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왕실 가족의 초상화도 그리지 못하게 했을 정도라고.

그저 평범한 천재, 디에고 벨라스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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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고 벨라스케스 /flickr

바로크 시대 펠리페 4세의 궁정 화가로는 거의 붙박이였던 '디에고 로드리게스 데 실바 이 벨라스케스'는 대개 디에고 벨라스케스라 불렸으며 스페인 왕족의 초상화를 포함해 수많은 사람들의 그림을 그렸다. 그의 작품은 인상주의, 사실주의 화가들에게 칭송을 받았으며 고야, 마네, 피카소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6남매 중 첫째로 태어난 벨라스케스는 부모님에게 종교, 언어, 철학 등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그의 부모님은 세비야로 이주한 포르투갈인들로, 벨라스케스의 아버지는 아들이 스케치북에 그린 그림을 보고 일찍이 아들의 재능을 알아채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데 에레라 밑에서 공부할 수 있게 했다. 벨라스케스가 장모붓을 사용하는 법은 프란시스코에게 배운 것이라고. 

벨라스케스는 12살이었을 때 그의 스승으로 유명했던 프란시스코 파체코에게 문학과 철학, 기술적인 드로잉 등을 배웠다. 당시 화가들은 위대한 종교적, 역사적 이야기를 묘사하거나 부유한 후원자들을 위한 초상화를 그렸지만 벨라스케스는 예외였다. 스승이었던 파체코는 단순하면서 직접적인 사실주의를 표현했고, 벨라스케스는 스승 말고도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 조의 자연주의에 영향을 받아 특정 상황이나 대상이 아닌 모든 상황의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그렸다.

벨라스케스는 평범한 사람들이 일상의 생활을 공유하는 작품들을 그려 사람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다만 그의 스승 파체코는 벨라스케스의 성실성과 재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벨라스케스가 다양한 상황의 사람들을 그림으로써 수많은 모델들을 연구, 뛰어난 초상화를 그릴 수 있었다고 감탄했다. 실제로 벨라스케스는 파체코 밑에서 5년간 인물의 구도, 비례를 공부하고 세비야의 문화 동향을 연구했다. 

'An Old Woman Frying Eggs' /flickr

벨라스케스의 초기 작품은 주방의 분위기를 묘사한 것이 많은데 이 설정을 묘사한 최초의 스페인 예술가들 중 하나였다. 특히 '계란을 부치는 할머니 An Old Woman Frying Eggs'는 그의 뛰어난 재능이 사실적인 표현에서 드러나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은 현재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이 소장하고 있으며 1618년 벨라스케스가 마드리드로 이사하기 전에 그린 그림이다.

'Christ in the House of Martha and Mary' /flickr

벨라스케스는 초기 그림에서 노동자 계급을 주로 표현했으며 그의 가족도 모델의 대상이 되었다. 그림의 주인공인 노파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 Christ in the House of Martha and Mary'에도 나오는데, 그림에서 어떤 요리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논쟁이 있다. 일부는 계란을 부치는 모습이 아니라 포칭한다고 표현하기도. 

'계란을 부치는 할머니'는 벨라스케스의 초기 작품 중 가장 강렬한 작품으로 간주된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왼쪽으로 비치는 햇빛이 노파의 식기와 계란을 비추고, 노파의 오른쪽에 서 있는 소년은 매우 깊은 그림자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듯한 명암법을 보여준다. 벨라스케스의 명암법은 매우 강렬하며 벽은 보이지 않아도 벽에 걸린 바구니가 생생하게 보인다.

'계란을 부치는 할머니'는 황토색, 갈색이 지배하는 팔레트를 사용해 어둠과 빛, 그림자의 대비가 절묘한 작품이다. 그림의 구도는 타원형으로 구성되어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이 그림에서는 벨라스케스의 사실주의가 눈에 띄는데 유리 표면의 광택, 소년이 들고 있는 멜론의 빛의 반사 등을 잘 보여준다. 끓는 팬은 계란 흰자위가 매우 사실적이며, 인물들의 손 디테일 또한 매우 공을 들인 것이 보인다.

'Portrait of Sebastián de Morra' /flickr

성 루크 길드에 가입한 벨라스케스는 18살에 자신만의 작업실을 차리고 파체코의 딸과 결혼한다. 파체코는 '5년 간의 교육과 훈련 끝에 나는 그의 미덕, 성실함과 재능에 반해 그를 내 딸과 결혼시켰다'라고 회고했다. 세비야에서 그의 명성이 알려졌어도 벨라스케스는 초상화를 비롯해 역사적 장면, 신화적 장면 등을 계속 그렸다. 펠리페 4세가 즉위한 지 1년이 지난 1622년, 벨라스케스는 왕실의 후원을 얻기 위해 마드리드를 방문한다.

당시 왕이나 왕비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 허락되지 않아 그는 시인 루이스 데 곤고라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가 펠리페 4세와 만난 건 첫 작업실을 차리고 5년 후의 일이었다. 펠리페 4세가 총애했던 궁정 화가 로드리고 데 빌란도란도가 죽고 나서 올리바레스 백작이 벨라스케스를 그 자리로 불러들인다. 1622년 올리바레스 백작의 초상화를 그렸던 벨라스케스라 백작이 그의 공로를 추천한 것이다. 

펠리페 4세는 그 초상화를 보고 벨라스케스를 궁정 화가 중 하나로 임명한다. 2년 후 벨라스케스는 가족을 스페인 마드리드로 이사시켰고, 모든 생활비를 지원받으며 왕실에 입성했다. 벨라스케스는 다른 주제들도 그렸지만 궁정 화가로서 왕가의 구성원들과 수행원들을 묘사하는 데에도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가 살아 있는 동안 펠리페 4세의 수많은 초상화를 그렸는데, 파체코는 벨라스케스가 작업장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을 황제 폐하가 구경했다고 회상한다.

벨라스케스가 일한 곳은 세비야의 주요 지식인들과 시인, 학자 등 여러 예술가들의 회동이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했다. 이들의 심도 있는 토론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카라바 조 같은 거장의 예술가들과 그에 대한 이론들이었다. 벨라스케스는 이 창조적인 토론에서도 중심에 있었다. 

'Portrait of Mariana of Austria (La reina Mariana de Austria)' /flickr

벨라스케스는 당시의 다른 궁정 화가들과 너무나 달랐는데, 그를 차별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피사체를 전형적으로 미화시켜 그리는 것이 아닌 자연주의적이며 사실적인 특징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그는 사람과 그에 대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어했는데, 강조하고 싶은 부분에 눈길이 가는 구성을 쓰기도 했다.

1628년, 벨라스케스는 마드리드의 궁정에서 바로크 예술가인 루벤스를 만난다. 베라스케스와 루벤스는 많은 대화를 나눴고 서로 깊은 존경심을 내보였다. 루벤스는 벨라스케스에게 진짜 예술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는 나라인 이탈리아를 가 보라고 했고, 벨라스케스는 펠리페 4세의 허락을 받고 처음으로 이탈리아를 방문한다. 

그는 제노바, 베네치아로 가 그가 세비야에서 견습 생활을 했을 때부터 존경했던 베네치아 르네상스의 유명한 화가 '티티안'의 작품을 보게 된다. 피렌체와 로마를 방문했을 때에도 그가 존경하던 많은 거장들의 작품을 보게 되면서 그는 약 1년간 로마에서 머문다. 로마에 있는 동안 그는 명화를 모사하며 자신만의 캔버스에 그림을 그렸다. 마드리드로 돌아온 벨라스케스는 궁정 화가 일을 계속했는데, 펠리페 4세의 부엔 레티로 궁전을 꾸미는 일도 계속 맡아 했다고.

'Portrait of Innocent X' /flickr

벨라스케스는 1649년부터 3년간 이탈리아로 두 번째 여행을 떠난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를 그릴 기회가 주어졌고, 지금까지 그가 그린 초상화 중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여겨지는 작품을 제작했다.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의 초상 Portrait of Innocent X'은 '시녀들 Las Meninas'와 더불어 벨라스케스의 역작이며, 많은 예술가와 미술 평론가들은 이 초상화를 역사상 가장 훌륭한 초상화로 평가한다. 

이 작품은 로마 도리아 팜필리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더 작은 크기의 작품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소장 중이다. 초상화가 완성되었을 때 교황은 “지극히 생생하다”고 감탄하며 감사의 표시로 벨라스케스에게 상당한 액수의 보수를 지불하려 했지만 벨라스케스는 스페인의 외교 사절로서 이탈리아를 방문했던 자신의 입장을 감안해 이를 사양했다고 한다. 이에 교황은 보수 대신 금으로 된 목걸이와 교황의 상패를 벨라스케스에게 하사했다고.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의 초상'은 지적이면서도 슬기롭게 나이 든 한 남자의 초상화로, 금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의자에 앉아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고개를 돌려 관람객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털이 없는 고위 성직자 용의 짧은 케이프와 각진 모자를 착용하고 있는데, 이는 여름이었던 제작 시기에 적합한 옷차림이다. 그의 왼손은 자신과 화가의 이름, 그림의 제작 연도가 쓰인 종이를 쥐고 있다.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의 초상'의 세부 모습 /flickr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의 초상'의 전체 화면에는 교황의 케이프와 모자, 의자 등받이, 배경의 커튼에 사용된 붉은색이 주조를 이루고 여기에 금색, 백색, 흑색이 일정 부분 가미되어 있다. 벨라스케스는 이렇게 제한된 색을 사용하면서도 미묘하고 섬세한 색감의 변화를 잘 살려 각 대상의 특징적인 표면 느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화면 전체에 강렬함과 생동감을 부여했다.

당시 벨라스케스는 그의 조수였던 후안 드 파레야의 초상을 그렸는데, 이 작품은 살바도르 달리가 자신의 그림으로 재해석하기도 했다. 흥미로운 건 이 조수는 스페인 남부에서 노예로 태어난 사람이었다는 것. 벨라스케스는 그와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고, 1650년 후안 드 파레야는 벨라스케스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그의 그림들 몇 점은 마드리드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여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Venus at her Mirror' /flickr

이 당시 교황을 그린 작품만큼 유명한 작품이 있는데 다름아닌 '거울 속의 비너스 Venus at her Mirror'다. 벨라스케스가 그린 네 점의 누드화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작품이다. 스페인 미술사에서 여성의 누드를 다룬 경우는 매우 드문데, 스페인의 종교재판소가 누드화를 그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벨라스케스는 궁정 화가라는 위치 덕분에 검열은 피할 수 있었다.

서양 미술사상 가장 매혹적인 여인의 뒷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거울 속의 비너스'는 현재 런던 내셔널 갤러리가 소장 중이며 '로크비 비너스'라고도 불린다. '로크비'라는 말은 이 작품이 옮겨지기 전 19세기 요크셔의 로크비 홀에 걸려 있었어서 붙은 말이다. 풍부한 붓 터치와 육감적인 색채가 매우 사실적이며, 한 손으로 머리를 괴고 침대 위에 길게 누운 여인은 큐피드가 들고 있는 거울을 통해 반사된 자신의 모습을 생각에 잠겨 바라보고 있다.

여인의 얼굴은 정면에 있는 거울을 통해 희미하게 보여지지만 정작 거울에 비친 모습은 비현실적이다. 거울이 놓인 위치로 볼 때 비너스의 얼굴을 비출 수 없는 구도이기 때문이다. 거울 속 여인은 오히려 자신의 몸을 지켜보는 관람객을 이 거울을 통해 들여다보고 있는 듯하다. 사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벨라스케스의 애인 플라미니아 트리바이지만, 비너스와 큐피드로 치환해 표현했다고. 

'Las Meninas or The Family of Philip IV' /flickr

이후 펠리페 4세는 벨라스케스에게 스페인으로 돌아올 것을 촉구했고 벨라스케스는 1651년 바르셀로나를 경유하며 많은 그림과 작품들을 가지고 돌아왔다. 펠리페 4세는 벨라스케스의 작업장을 확장시키며, 많은 조교와 학생들을 맡겼다. 벨라스케스는 1656년 스페인 왕가의 집단 초상화를 마지막으로 그렸다. 당시 나온 그림이 벨라스케스 하면 바로 떠오르는 '시녀들 Las Meninas or The Family of Philip IV'이다.

1656년 제작된 이 작품은 최초에 마드리드 알카사르 왕궁에 있는 왕의 개인 집무실에 소장되었다가, 왕궁의 다른 공간으로 몇 번 이전된 후 19세기 초에 프라도 미술관으로 옮겨졌다. 왕실 가족과 그 측근, 고위 성직자 등 소수의 인물들만이 볼 수 있었던 이 작품은 미술관에서 일반 대중에게 공개되면서 큰 주목을 받았다. 아직도 이 그림의 명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고.

왕과 왕비, 공주, 시녀들과 수행원 등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하는 '시녀들'은 벨라스케스 초상화의 전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는 서로 다른 신분에 속한 사람들의 다양한 조건, 직업 및 외형적 특성들을 정확하게 옮기면서도 이들이 자신이 설정한 체계 안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화면 왼쪽에 있는 벨라스케스의 자화상은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인데, 벨라스케스는 캔버스 앞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전통적인 ‘화가’의 도상으로 자신의 모습을 넣음으로써 예술 창작과 회화의 순수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다.  

프라도 미술관 앞 벨라스케스의 동상 /flickr

1660년, 그는 마드리드에서 세상을 떠난다. 19세기까지 그의 작품은 스페인 밖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마네는 벨라스케스를 두고 '화가의 화가'라 불렀으며, 그의 스타일인 자유로우면서도 느슨한 붓놀림의 대담한 조합에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마네는 벨라스케스의 모티브를 바탕으로 자신의 예술을 창조했다고 알려져 있다.

수염이 멋드러진 벨라스케스 /flickr

마드리드 왕립 미술 아카데미 학생이었던 피카소도 스페인의 프라도 미술관에서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모사했다고 한다. 특히 '시녀들'은 피카소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피카소가 1950년대 후기 입체파 스타일로 58번이나 재현을 했다고.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는 벨라스케스의 콧수염에 감탄해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콧수염을 창조하는 데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벨라스케스는 약 120여점의 작품을 남겼다. 작품의 수가 많은 건 아니지만 벨라스케스가 죽은 후 그보다 더 위대한 시각적 사실주의 화가는 다시 나오지 않았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는 "나는 높은 수준의 미술에서 2등이 되기보다는 평범한 것들의 1등 화가가 되겠다"란 말을 남겼는데,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을 그린 것에서부터 시작해 여러 대작을 남긴 그의 이력을 보면 높은 수준의 미술에서 1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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