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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적이고 화려한 예술의 표현, 모체(Moche)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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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적이고 화려한 예술의 표현, 모체(Moche)사회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2.05.11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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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와카 유적지 /flickr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페루 하면 흔히 잉카나 마추픽추 등을 생각할 수 있는데, 페루 북쪽 해안 강 유역을 중심으로 발달한 고전기 문화도 있다. 옥수수 농경 생활양식이 발달해 계곡 평야 개척을 성공한 주민들 사이에서는 '모체(Moche)사회'가 있었다. 특히 모체 사회는 상형 토기가 발달해 사람의 머리를 비롯해 동물과 식물의 모양을 한 토기가 많았다.

모체 사회는 뛰어난 장인들의 시대, 또는 페루의 전성기라고도 불리는데 유물들의 종류가 다양하면서도 완성도가 높기 때문이다. 모체 사회 시기에는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모체인들은 피라미드 건축이나 관개 시스템을 이용해 뛰어난 건축이나 유물들을 만들어냈다.  

농경 사회에서 시작한 독특한 문화

모체 문화에서 볼 수 있는 사람 얼굴 모양의 도자 /flickr

모체 사회는 서기 200년에서 900년 사이 페루의 북쪽 해안에서 번성했다. 잉카 문화 이전까지 흥했던 이 문화에 대한 특별한 기록은 없다. 모체 사회는 고고학자들이나 미술사학자들이 고대 비문학 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과학적인 데이터 수집을 이용해 알아낸 대표적인 예시이기도 하다. 20세기 초만 해도 페루에서는 과학적인 발굴이 거의 없었으며 박물관이나 개인 소장품으로 들어온 유물들은 무덤에서 가져오거나 한 게 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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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제한된 지식을 바탕으로 학자들은 모체 사회가 통일된 국가가 아니며, 건축 구조나 도자 스타일이 지역마다 다르다는 것을 알아낸다. 학자들은 모체 문화가 단일 국가, 즉 정치적인 집단에서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추측한다. 오늘날 남아 있는 유물이나 건축물을 봤을 때 공통의 문화를 공유하는 자치적인 정치 집단이었을 확률이 크다.

탐험가인 라파엘 라르코 호일은 모체 사회를 두고 '뛰어난 예술품'과 '대규모 공공 시설의 창조'와 같은 특징을 꼽기도 했다. 농업에 기반을 둔 모체 사회는 특히 농작물을 재배하기 위한 정교한 관개 시스템 건설에 엄청나게 투자를 했다고 한다.

페루 북해안 토르히요시 동남쪽 교외에 있는 모체 문화의 유적인 '달의 와카 Huaca de la Luna'는 프레 콜럼비언 문화, 1492년 콜럼버스가 미대륙 도착 이전의 페루 원주민 문화에서 가장 큰 구조물이었다고 한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금을 얻으려 무덤을 약탈했을 때 부분적으로 파괴되었지만, 그 내부는 아직 화려한 벽화와 초상화로 가득 차 있으며 보존 상태는 그나마 양호한 편이다. 1990년대 초부터 현재까지 고고학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달의 와카 안에 있는 벽화 /flickr
달의 와카 발굴 모습 /flickr

페루 남부와 북부의 모체 문화는 다르며, 학자들은 각자 그들만의 왕조를 갖고 있었을거라 추측한다. 모체 사회 전체에 대한 중앙 집권은 때때로 있기도 했지만 간혹 드물게 나타났다고. 북부 모체 문화의 대표적인 유적지인 팜파 그란데는 가장 큰 유적지 중 하나로, 단기간에 설계되고 지어졌다. 모체 사회 당시 주요 수도였고, 후기 모체 시대엔 거대한 의식 단지를 포함해 짧은 시간 내 새로운 건축물들이 만들어졌다.

도시 중심부를 둘러싼 마을에는 부유층이나 엘리트들을 위해 농사를 짓는 농민들이 많이 살았다. 인근 하천에서 람바예크 계곡으로 이어지는 정교한 관개 시스템은 농민의 농작물 생산을 도왔고 자연히 농작물 대량 생산으로 이어졌다. 이 유적에서는 1,200여개의 동물 뼈가 발견되었는데 대부분이 길들여진 동물들로 사냥 흔적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발굴된 도구도 농업과 관련된 것이다. 다만 동물 외에도 조개껍데기나 바다사자 같은 해양 동물들의 잔해도 발견되었다고.

후기 모체 시대에 들어 농민들은 자치권을 자연스레 잃고 엘리트와 귀족에게 의지하게 된다. 인구가 도시로 몰려들면서 자원이 부족해지자 자연스럽게 무역이 성사된다. 도자기, 조각상, 구슬 같은 여러 물품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거래됐다. 흰꼬리사슴, 코카잎, 과일 등 이국적인 음식들은 서민들에게는 보기에 어려웠지만 부유층 가정에서는 흔히 볼 수 있어 권력자들의 거래 능력이 훨씬 폭넓었음을 알 수 있다. 
 

강렬한 얼굴 모양의 도자 /flickr

팜파 그란데에는 엘리트들이 후원하는 수많은 작업장이 있었다고 한다. 작업장 내부엔 자료나 기술 관련 기밀이 있어 출입이 통제되었는데, 작업장의 많은 전문가들은 거의 다 일반인이었지만 엘리트들은 이들을 적극 지원을 했다고. 일반 가정에서도 여러 공예품을 생산했는데, 대를 따라 이어받으며 조직을 만들고 독립적인 분위기에서 운영되었다. 이러한 형태의 워크숍은 통제도 덜 했고, 상품을 부유층들에게 올리는 경우에만 관리자들이 점검 차원으로 갔다고 한다.

여성들이 아이를 키우고 식량을 준비하는 일상 활동을 한다면 남성은 공예품과 농산물 생산을 주로 맡았고, 주형을 사용해 주걱, 방울 등 여러 용기들의 표준인 틀을 만들었다. 저장 용기도 처음에는 주형을 쓰다가 모체 사회 후기에는 금형을 사용해 생산하는 용기의 수가 많이 늘어,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했다.
 

발굴 중인 달의 와카 /flickr
신전 입구에서 볼 수 있는 조각 /flickr

팜파 그란데에는 부유층이 살았던 성지와 공동 주택 등 두 가지의 유형이 있다. 부유층들의 성지는 절연 효율이 높은 어도비 벽돌로 만들어진 피라미드 모양이었는데, 공사 의식을 위한 공간 역할을 하며 부유층들을 수용하는 곳이었다. 사원 안에는 천연 색소로 여러 벽화를 그렸는데  그들의 신을 그리는 데 초점을 맞추거나 동물이나 인간의 희생 같은 일상의 주제를 그리기도 했다.

태양의 신전인 '태양의 와카'와 달의 신전인 '달의 와카'는 0.5㎞ 정도 떨어져 있으며 모체 사회의 일부였다. 이 두 신전을 만드는 데에만 수억 개의 어도비 블록이 필요했고, 신전의 유물들은 근처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원래는 붉은색, 흰색, 노란색, 검은색으로 채색되었고 의식을 행하기 위한 웅장한 규모로 만들어졌지만 스페인 정복자들이 이 피라미드를 부수고 안에 있는 무덤을 약탈해 갔다. 태양의 와카와 달의 와카 사이에는 벽으로 둘러싸인 큰 주택들이 많은데, 약 25,000여명의 인구가 살았다고 한다.
 

태양의 와카 /flickr

태양의 와카는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통치자들에 의해 확장되고 재건되었다. 수도 중심에 위치한 이 신전은 의식 활동과 더불어 왕실 귀족들의 거주지로도 활용되었다. 스페인이 페루를 점령했을 때 식민지 개척자들은 사원에서 유물을 약탈하는 것이 쉽도록 모체 강이 흐르는 방향을 바꾸고 수력 광산을 설치해 현재는 신전 밑부분이 침식된 상태다. 고고학자들은 태양의 신전이 행정, 군사, 주거의 기능뿐이 아닌 부유층들의 무덤으로도 쓰였다고 추측한다. 또 피라미드가 부유한 사람들을 위한 무덤으로 수세대에 걸쳐 사용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발굴된 진흙 벽돌들 /flickr

도시 중심부에는 부유층과 서민들 모두를 위한 많은 주거 시설이 있었다. 건축에 사용된 재료들은 현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을 썼다. 어도비 벽돌은 기본적으로 햇볕에 말린 진흙 벽돌로, 주요 건축물을 쌓아올리는 재료 중 하나였다. 부유층들의 주거지는 일반 서민들의 주거지와 비교해 여유있는 안뜰과 여분의 주거 공간이 따로 있었다. 이런 공간들은 귀족들의 경제적, 사회적 행사에 쓰였다. 
 

독특한 모양의 도자기들 /flickr

팜파 그란데에서 가장 흔하게 발견되는 유물은 도자 공예품이다. 초기 모체 사회의 도자는 인간, 동물, 식물을 다양하게 묘사한다. 후기는 복잡한 세선 스타일을 특징으로 하며 금과 은으로 도자를 작업한 모체 예술가들은 망치질이나 납땜 등에 익숙해 목걸이와 팔찌, 귀걸이 등을 부유층들에게 만들어 올렸다. 모체 사회는 어부, 농부, 도공들과 장인 등 다양한 집단으로 구성되었다. 특히 장인들의 무덤에서 발견된 유골에서 오랜 수작업으로 인한 관절염과 류마티스에 시달린 흔적이 있다고. 
 

올빼미를 묘사한 도자 /flickr

모체 예술가들은 도자기에서 자신들이 말하고 싶은 것들을 이야기했다. 주로 일상 생활, 종교적 신념, 신화 등을 표현하는 그림을 그렸다. 특히 동물은 이들에게 꽤 중요했고 도자기나 장신구에 흔히 등장했다. 올빼미, 박쥐, 고양이, 해양 생물까지 인기가 많았다. 모체인들은 올빼미가 사람의 죽음 너머에 있는 어둠을 꿰뚫어보는 생명체이며, 다음 생으로 가는 여정에 보호자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모체 사회에서는 실용적인 도자기가 제일 많은데, 일반적으로 대형 저장 용기나 목이 짧은 용기, 항아리 등의 도자기나 그릇 접시 등이 있다. 대부분의 도자기는 금형을 사용해 대량으로 생산했다. 이는 실용적이면서 서민층과도 관련이 있다. 세선 페인팅과 3차원 형태가 도자기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형태로, 후기 모체 사회에서도 볼 수 있다. 가장 많이 발견된 만큼 도자기는 모체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예술 형태 중 하나이다.
 

뱀과 싸우는 전사의 모습 /flickr

도자에서는 사실적인 인간과 동물 이미지가 눈에 띄며 신들을 묘사한 그림도 흔하게 발견된다. 신을 묘사한 '주름진 얼굴', '넓고 동그란 운동자' 등의 특징이 있으며, 동물과 싸우는 모습이 주로 그려진다. 도자기는 노란색, 붉은색이 엘리트들의 도자기에 주로 쓰였다. 금형을 사용해 만들어진 것들이라 복제품들도 많았다. 모체 사회의 도자기는 먹고 마시는 일상적인 것에서부터 신에게 바치는 제사까지 모든 일에 쓰였다. 복잡하고 정교한 조각은 의식이나 행사에 쓰였고 부유층의 무덤에 함께 묻히기도 했다. 
 

화려한 금속 목걸이 /flickr
사슴 장식의 귀걸이 /flickr

모체인은 도자 말고도 금속 세공에도 능했다. 주로 금박을 입히거나 금속을 납땜하는 기술 장인이 세공 작업을 맡아 했다. 이들은 장식적이면서도 의례적인 물건들, 무기, 보석 등을 만들었다. 대부분 금, 은, 구리로 주조했으며, 반귀석이나 조개껍질을 디자인에 차용했다. 사람들은 몸을 장식하기 위해 목걸이, 귀걸이, 팔찌 등의 장식품을 사용했다. 이 장신구들은 대개 엘리트들의 무덤에서 발견되었는데, 의식용품으로 투미 칼도 많이 발굴되었다. 초승달 모양의 금속으로 만들어진 투미 칼은 학자들이 당시 인간의 희생을 수반하는 의식에 쓰였다고 추측한다. 
 

동물 디자인의 도자 /flickr

페루의 모체 문화는 페루의 북쪽 해안에서 시작해 900년경에 멸망했다. 다른 문화와 비교했을 때 모체 문화는 공예 분야에서 보다 뛰어남을 자랑한다. 장인과 예술가는 그들이 만든 공예품에서 자신들의 문화, 가치, 이념을 알렸다.

모체 사회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전문가들은 발견된 유물로 지금도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모체 문화를 가리켜 아주 적절한 말이 있는데, '모체족은 그들의 예술을 소통의 수단으로 사용한 비문학적인 민족이다'라 평가한 말이 있다. 모체인들이 남긴 유물을 보고 있으면 이보다 더 맞는 말이 있을까 싶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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