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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간 옻칠의 외길을 걷다, 생칠장 송복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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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간 옻칠의 외길을 걷다, 생칠장 송복남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2.05.06 10: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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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복남 장신이 만든 칠기 /경기무형문화재총연합회 유투브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의 보호를 받고 있는 칠기 제작 기능, 혹은 그러한 기능을 보유한 장인을 칠장이라 부른다. 전통 칠장은 칠액의 채취·정제 등을 관할하다가, 근대 이후에는 원료 가공보다는 옻칠에만 집중하거나 나전일까지 병행하는 칠장이 늘었다.

칠장은 옻나무에서 채취한 생칠이나 정제칠(옻나무의 수피에 상처를 입혀서 침출한 수액을 채취, 정제를 하여 만든 도료를 이용하여 목재 따위에 도장하는 방법)을 기물 위에 칠해서 칠기를 제작한다.

특히 옻액을 정제하거나 다른 것을 첨가하여 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는 것을 생칠이라 하며, 생옻으로 목기 등에 칠을 하는 장인을 생칠장이라 부른다. 칠불사 불상의 개금 옻칠작업 등 많은 불상과 문화재 복원에 참여했던 생칠장 송복남 장인은 전통 옻칠을 이어받아 보급하는 데 노력하고 있다. 
 

송복남 장인의 옻칠 목기 /경기문화재단

우리나라는 2000여 년의 옻칠 문화가 있다고 한다. 기물에 옻칠을 한 흔적은 기원전부터 있었으며 지속적으로 목칠기를 제작해 썼다. 옻칠은 전통적으로 귀한 재료라 옻칠의 수급과 칠장은 이미 통일신라 시대부터 국가에서 관리했다. 낙랑 시대에 발전한 칠기는 신라 시대에 들어서 더욱 발전했고,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나전과 결합되어 나전칠기라는 새로운 기법이 등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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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칠이 이전 시기보다 대중화되어 많은 칠기가 제작됐다. 국가에서도 전국의 옻나무 산지를 파악하여 여기에서 생산되는 옻칠을 공납받았으며, 서울과 지방에는 칠과 관련된 장인들이 주로 관청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조선 후기 칠기가 대중화되기 시작하면서 칠장의 활동도 활발했지만 조선이 패망하면서 장인 제도가 무너져 버려, 오늘날 칠장의 전통을 되살리기 위해 국가 및 시도 무형문화재로 지정했다.
 

송복남 장인의 작품들 /경기문화재단

칠장은 용도에 맞는 칠을 기물에 칠하여 나전과 같은 별도의 장식 없이 칠 자체로 아름답고 견고한 칠기를 완성하거나 나전·칠화 등의 밑바탕을 마련한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서 서양식 가구의 유행으로 전통 칠기와 칠장의 수요가 급감하게 된다. 

특히 대용칠인 캐슈가 싼 가격에 도입되어 적극적으로 활용되면서 칠액의 채취와 정제 등 원료 가공에 종사하는 칠장이 극히 줄어들고, 구입한 정제칠을 이용하여 칠도장만 하거나 나전일까지 병행하는 칠장이 늘어났다. 이에 원료 가공과 옻칠을 아우르는 전통 칠장의 기능을 되살리고 올바르게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칠장을 국가무형문화재 제113호와 시도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육성하고 있다.

기물의 표면에 옻칠을 하면 세련된 색감과 광택 효과뿐만 아니라 방충·방습·방수 등의 효과로 인해 목재의 내구성이 높아진다고 한다. 이 때문에 우리 민족은 이미 기원전부터 옻칠을 천연 도료로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생칠장 송복남 장인 /문화재청

경기도 무형문화제 제17호 생칠장 송복남 장인은 생옻으로 목기에 칠을 해 작품을 만든다. 1948년부터 생칠 공방에 들어가 생칠을 배웠는데,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 선택한 길이었다. 그는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무슨 일을 하는 건지도 모르고 친구를 따라 충무로에 있는 옻칠 공방에 들어갔다. 친구가 먼저 이 일을 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자신도 일을 할 수 있냐고 물어봤다고 한다. 하루 일당이 1천300원이었던 당시 그는 생칠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남들보다 500원 많은 1천800원을 받았다고.

집에 계신 어머니는 아프셨고, 동생들을 먹여살릴 돈을 벌어야 했으니 그는 악착같이 일했다. 일도 빨리빨리 배우는 성격이라 시키는 일을 곧잘 했다고 한다. 13살 때 시작한 일이 그에게는 천직이 됐다. 돈을 벌기 시작한 일인데 스승님을 따라하다 보니 실력이 늘었고 19세 때는 이례적으로 생칠공방의 공장장이 될 만큼 솜씨가 좋았다. 

송 장인은 그 후 여러 생칠공방을 옮겨 다니며 본격적인 장인의 길을 걸었다. 1981년 서울 중요무형문화재 故 홍순태 선생을 만나 15년간 기술을 전수받았다. 처음에는 칠장의 길을 걷게 될 거라 생각도 못한 그였지만 일을 하다 보니 이것이 자신의 길이라 생각했고, 열심히 하다 보니 1997년 경기도 무형문화제 제17호로 지정되었다고 그는 회고한다. 
 

생칠공예품 /문화재청

생칠은 옻나무에서 얻은 수액을 나무 그릇 등과 같은 물건에 칠해 광택을 내는 옻칠을 말한다. 옻액을 정제하거나 다른 것을 첨가해 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해 칠을 한다. 옻은 보통 6-7년 정도 성장한 나무에서 채취하며, 6월에서 10월 하순까지 채취한다. 3일 간격으로 옻나무 껍질에 날카로운 칼자국을 내 흘러내리는 수액을 채취, 모은 옻액은 공기와 닿으면 굳어지니 단단히 밀봉해 보관하고 모시나 명주천으로 걸러 불순물을 제거한다.

생칠 작업은 불순물이 제거된 옻액을 초칠, 중칠, 상칠이라 해 총 3번에 걸쳐 여러 번 반복해서 칠하고 건조시켜 완성한다. 대개 7-8번은 칠해야 완성되며 한번 칠하면 2-3일은 건조시키고 이 과정을 반복한다. 무엇보다 옻을 칠하는 과정에서 먼지가 붙으면 안 된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

작품에 먼지가 묻으면 건조시켜 사포로 다시 벗겨내고 칠해야 한다. 그래서 '생칠을 할 때 속옷 바람으로 한다'란 말이 있을 정도다. 그만큼 세심한 작업이라 규모가 큰 작업을 제외하고는 혼자 방에 들어가 칠을 한다고. 이렇게 칠과 건조 과정을 거치면, 마지막 칠을 마친 후에 솜으로 문질러 광을 내준다. 이 모든 과정에 끝나야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는 것이다. 짧게는 3달에서 길게는 1년 가까이 걸리는 작업도 있다.
 

송복남 장인의 식합 /안양박물관

생칠을 사용해 목기에 칠을 하면 처음에는 검은색이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원래 무늬가 서서히 나타나 은은한 광이 살아나며 오래되면 될수록 아름답게 변하는데 이것을 '색이 핀다'라 전문가들은 말한다. 100일 가까운 시간 동안 옻을 칠하고 말리기를 수차례 반복하는 과정으로 긴 시간을 기다려야 완성할 수 있으며, 이렇게 완성한 작품은 1-2년은 지나야 광택도 있고 아름다워진다. 

생칠장은 옻을에서 얻은 수액을 그대로 사용해 칠을 하기 때문에 옻이 오르거나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은 하지 못한다. 송 장인도 옻 때문에 한 달을 고생했다고 한다. 다루기도 까다롭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이 작업은 근 70여년간 꾸준히 해 온 이유는 작품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서이다. 나무 그릇에 생칠을 하면 처음엔 까만색이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원래 무늬가 드러나고 칠한 만큼의 은은한 색과 빛깔이 감도는 것이 일품이다. 
 

자신이 만든 작품을 보고 있는 송 장인 /경기무형문화재총연합회 유투브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나뭇결도 살아나고 윤기가 진해지는 것이 옻칠 목기의 매력이며, 옻액의 주성분인 옻산은 항암 효과도 있다 전해져 건강에 신경쓰는 사람들이 옻칠 식기를 많이 찾는다고 한다. 옻이 가진 부패 방지, 항균 효과 덕에 해인사의 팔만대장경과 북한 묘향산의 팔만대장경도 오랜 시간 보존될 수 있었다고 귀띔한다. 또 물리적인 파손이 없는 한 수백년도 거뜬하고 알레르기 반응이나 독성도 없어 식기에 많이 쓰인다.

송 장인은 1989년 경남 칠불사 불상의 개금, 1994년 합천 해인사 불단의 옻칠작업 등 전국 사찰의 불상 개금과 불단 등 문화재 보수 옻칠 도장에 참여했고, 제4회 옻칠 공예작품 공모전 특선(1994), 제21회 동아대전 입선(1993) 등을 수상했다. 그는 무형문화재 선정에 대해서도 큰 관심이 없었다. 그가 문화재 신청을 하게 된 건 故 홍순태 선생에게 배우던 다른 제자가 무형문화재에 서류를 내는 내면서부터였다.

스승은 그에게 서울특별시무형문화재, 경기도무형문화재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고 그는 경기도를 택했다. 경기도 안양에 사는 그였기에 당연히 경기도무형문화재가 되고 싶었다고. 시간이 많이 지나 이제는 그에게도 옻칠 작업이 버겁다. 일이 워낙 힘들어 옻칠을 일로 선택한 사람도 점점 줄고 있고, 옻칠 목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도 줄어 가고 있지만 그에게 옻칠을 오늘도 뗄 수 없는 일이다. 
 

작품을 살피는 송 장인 /경기무형문화재총연합회 유투브

그는 지금도 경기도에서 개최되는 여러 공예 축제에 참가해 생칠의 아름다움을 알리고 시연 행사도 갖는다. 박물관이나 쇼핑몰에서도 그의 작품을 전시하거나 판매하며 생칠이라는 작업을 대중에게 알릴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그는 자신 혼자만으로는 생칠을 보급하는 데 부족하다며, 정부와 지자체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간절히 호소한다.

특히 지역문화재로 지정되면 지역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문제도 있어 그는 경기도 밖을 떠날 수가 없다. 그래서 정부가 더 앞장서서 생칠이라는 우리네 전통을 적극적으로 알려 주었으면 한다고 전했다. 전통이 하나씩 사라져 가는 건 한곁같이 생칠에 70년 외길을 걸어온 장인에게도 슬픈 일일 수밖에 없다. 전통을 지키는 일은 장인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전통을 이어 가는 장인의 노력 못지않게 사람들이 꾸준히 우리네 전통을 기억해야 하는 것도 중요한 것이다. 
 

2017년 내내 뜨거운 감자였던 전안법은 현실과 다른 불합리함으로 수공예 작가들의 목을 죄어오는 올가미 같았습니다. 극적으로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많은 작가들이 한숨 돌릴 수 있게 됐지만 아직 바뀌어야 할 부분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핸드메이커는 이러한 불합리에 ‘NO’를 외치기 위해 시작됐습니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은 정말 매력적인 일입니다. 그들은 실을 꿰 엮기도, 펜과 물감 으로 그리기도, 흙을 빚어내기도, 금속을 녹여 두드리기도, 정성스런 요리를 만들어 내기도 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만들고 있는 세상을 함께 들여다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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