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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품도 조각도 아니지만 작품이 된다, 데스마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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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품도 조각도 아니지만 작품이 된다, 데스마스크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2.05.0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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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미케네성 안 원형 왕족묘지인 그레이브서클에이에서 발견된 데스마스크 /flickr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사람들이 장례를 치를 때 떠나는 사람을 기리기 위한 여러 장치를 설치하는 경우가 많으며, 서양에서는 죽은 사람의 초상을 무덤에 장식하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고인의 살아 있던 모습을 남기거나, 또는 그가 남긴 위대한 기록을 기리는 의미에서 만드는 '데스마스크'도 장례 풍습의 한 일환이다.

데스마스크는 죽은 사람의 얼굴을 본뜬 것으로 주형을 만드는 과정에서 재료인 석고로 인해 약간의 왜곡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중세부터 19세기까지 데스마스크는 주로 고인의 동상과 흉상 등을 만드는 조각가들의 모델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들의 가치가 생긴 건 1800년대 이후다.

종교적 의미에서 기록이 되기까지, 데스마스크

이로쿼이 부족의 마스크 /flickr

옛날부터 가면은 사람의 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종교적 의식에 필수였다. 어떤 사회에서는 가면을 쓴 비밀 조직의 구성원들이 마을 전체의 질병이나 악마를 몰아내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런 부족들 중 가장 잘 알려진 곳은 이로쿼이 부족의 '가짜 얼굴' 조직인데, 이 조직의 치료사들은 이로쿼이 부족을 괴롭히는 악마를 쫓아내기 위한 폭력성 짙은 무언극을 열었다고 한다. 이들은 극을 수행할 때 말총으로 만든 긴 가발에, 찡그리고 뒤틀린 표정의 가면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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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가면은 대개 특정 의식에 주로 쓰였으며 장례식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죽은 사람의 얼굴을 본뜬 가면은 많은 나라에서는 이미 전통의 한 일부다. 인류는 아주 옛날부터 한 사람의 죽음을 다양한 방식으로 추모했다. 그 중에서도 데스마스크는 죽은 사람을 떠나보내는 마지막 준비였다. 데스마스크는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 한없이 선량한 사람에서부터 극악무도한 범죄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일부 아프리카 부족들은 데스마스크를 고인에게 씌워 힘을 불어넣는 용도로 썼다고 한다. 고대 이집트에서 장례식에 가장 중요한 과정은 시신의 미라화로, 기도와 봉헌을 끝낸 후 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석관에 고인을 넣었다. 이 과정에서 단연 특별한 것은 고인의 얼굴에 씌운 가면이다. 이 가면은 미라의 영혼을 건강하게 하고, 저승으로 가는 동안 악귀로부터 영혼을 보호한다고 믿었다. 
 

투탕카멘 /flickr

데스마스크로는 가장 유명한 것이 투탕카멘의 가면이다. 투탕카멘의 가면은 금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치장되어, 고대 통치자의 위엄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양식을 취하고 있다. 다만 투탕카멘의 가면은 주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미라화로 고인의 형체를 보존한 것이 특징이다. 이집트인들은 개인과 함께 묻힐 데스마스크가 고인이 사후 세계에서 자신의 몸을 되찾을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라 믿었다. 이집트인들의 데스마스크는 보통 벽토나 회반죽으로 덮인 천으로 만들어졌고, 좀더 지위가 높은 인물들은 금이나 은을 사용했다. 
 

어떤 로마인의 데스마스크 /flickr

로마의 엘리트들은 장례식에서 데스마스크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일생 동안 만들어진 것들이라 한다. 가면은 한 사람이 죽은 후에 그의 무덤에 사회적, 정치적 중요성을 나타내기 위해 전시되었다. 중세 후기에 들어서 이 가면은 고인과 같이 묻히지 않았고, 나중에 도서관이나 박물관, 대학 등에 보관되었다. 중세에서 데스마스크는 영적인 의미에서 남은 사람들이 고인을 기억하는 방법이 됐다. 이는 죽은 왕족이나 귀족들 뿐이 아닌 유명한 작곡가, 정치 지도자, 철학자, 시인 등에게도 쓰였다. 유명한 사람들의 얼굴을 본뜬 데스마스크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전시되었다. 

데스마스크는 대개 고인의 얼굴을 본뜬 석고나 밀랍으로 만든다. 때때로 고인이 정말 살아 있는 것처럼 작게 만들기도 했다. 이집트에서 시작된 데스마스크는 유럽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처음에는 사후 세계에서 영혼을 지키고 보호하는 용도였지만 실용적인 목적으로 바뀐다. 데스마스크는 예술가들과 조각가들이 미라가 된 이후 고인의 모습을 사실적인 묘사하게끔 도왔다. 사람의 얼굴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부패가 진행되기 때문에 데스마스크는 고인의 얼굴을 실제처럼 유지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매우 사실적인 작곡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데스마스크 /flickr

무엇보다 데스마스크는 사망 직후의 고인의 표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묘하다. 이목구비가 일그러지기 전에 빨리 데스마스크를 만드는 것이 그만큼 중요했다고. 실제 데스마스크는 고인의 주름이나 잡티까지 포함해 만든다. 예술가들은 데스마스크를 만들어 전시하면서 고인의 가족뿐만이 아닌 더 많은 사람들이 이 가면을 보길 바랐고, 사람들이 죽음에 대한 생각을 조금은 바꾸길 바랐다고 한다. 

 

조지 워싱턴의 라이프 마스크 /Live Free 유투브

데스 마스크가 죽은 사람을 기억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반대의 경우도 있다. '라이프 마스크'는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본뜬 것으로, 같은 기술을 사용해 만들지만 라이프 마스크는 실제 사람이 숨을 쉴 수 있도록 한다. 라이프 마스크도 부유층들에게 꽤나 인기가 많았다. 엘리트들 사이에서 이 라이프 마스크는 예술적인 표현을 곁들인 작품과도 같았다. 프랑스의 조각가 장 앙투안 우동은 조지 워싱턴의 라이프 마스크를 만든 것으로 유명한데, 그는 조지 워싱턴을 유심히 관찰하고 그의 라이프 마스크를 석고로 만들었다.

1785년 10월 10일, 조지 워싱턴의 일기장에는 장 앙투안 우동이 라이프 마스크에 매료되어 마스크를 만드는 방법과 재료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지 워싱턴의 얼굴 모양을 본뜨기 위해 장 앙투안 우동은 워싱턴의 피부에 석고가 달라붙지 않도록 보호용 기름을 넉넉히 바르고 눈을 가린 뒤 젖은 회반죽 코팅을 덧대고, 숨을 쉴 수 있도록 그의 코에 빨대를 꽂았다. 워싱턴의 눈이 감겨 있었기 때문에 최종 마스크에서 장 앙투안 우동은 뜬 눈을 다시 조각했고, 빨대 때문에 조각할 수 없었던 콧구멍도 새로 조각했다고. 참고로 워싱턴의 뺨에 있는 기포는 석고가 주형에 붙으면서 생긴 것.

 

에이브러햄 링컨의 마스크 /flickr

조지 워싱턴 외에도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도 두 개의 라이프 마스크를 만들었다. 첫 번째는 그가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은 직후에, 나머지 한 개는 그가 암살되기 불과 몇 달 전에 만들어졌다고.

 

앙또르마키 의사의 나폴레옹 데스마스크 /Wikimedia Common CC BY-SA 2.0 fr 

투탕카멘의 데스마스크만큼 가장 핫하게 연구되고 있는 것이라 하면 나폴라옹의 데스마스크를 꼽을 수 있다. 나폴레옹이 죽은 후 그의 얼굴로 만들어진 최초의 주조물이라 추측하며, 가면 아래에는 나폴레옹이 한 말인 "Tete d'Armee"(육군 총사령관)이란 글이 씌어 있다. 회반죽에 새겨진 나폴레옹의 표정은 눈을 감고, 입은 약간 벌리고 있으며, 머리칼은 뒤로 젖혀져 있다.

나폴레옹 최초의 데스마스크는 1821년 5월 5일, 세인트루이스에서 시작됐다. 대서양 한가운데 위치한 세인트헬레나섬으로 유배를 간 나폴레옹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난다. 1815년 6월 워털루 전쟁에서 참패한 뒤 영국과 그 동맹국들에 의해 추방된 그는 섬에 갇혀 죽었고, 그가 죽고 나서 프랑스와 영국 의사들이 그의 머리맡을 에워쌌다. 이 중에는 앙또르마키 의사도 있었다. 위대한 지도자가 사망했을 때 당시의 관례대로 나폴레옹의 얼굴을 딴 데스마스크를 만들었다. 

나폴레옹이 죽은 지 40시간 정도 지났을 때 밀랍과 회반죽의 혼합물을 나폴레옹의 얼굴 위에 올려놓고 형태가 굳은 후에 떼내 만드는 형식이었다. 앙또르마키 의사는 영국 동료들로부터 나폴레옹의 2차 석고 주형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이것을 프랑스로 가져가 청동과 석고로 복사를 한 후에 하나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채플힐로 가져갔다. 1834년 앙또르마키 의사는 미국을 여행하던 중 뉴올리언스를 방문해 도시에 데스마스크 청동 사본을 선물했으며, 동료인 에드윈 스미스 박사에게도 데스마스크 복사본을 선물했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나폴레옹의 데스마스크 /flickr

스미스 박사가 세상을 떠난 뒤 이 마스크는 해군 제독인 헨리 프랜시스 브라이언에게 넘어갔고, 1894년 브라이언은 이 가면을 모교인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에 기증하며 대학에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큰 볼거리가 될 것이라 전했다. 현재 나폴레옹의 데스마스크는 여러 박물관에 복사본으로 전시되어 있는데, 복사본이지만 아주 좋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과학자나 예술가 같은 유명한 인물들의 데스마스크 말고도, 두골의 형상에서 사람의 성격을 비롯한 심적 특성 및 운명 등을 추정하는 학문인 골상학을 연구하는 로버트 노엘과 같은 골상학자들은 범죄자들의 범죄 패턴을 예측하는 데에 관심을 컸기에 교수형에 처해진 사람들의 데스마스크를 연구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것이 존 딜링거의 데스마스크인데, 특이한 건 딜링거의 데스마스크는 FBI의 허락 없이 영안실에서 비밀리에 만들어졌다는 것. 

 

존 딜링거의 데스마스크 /flickr

1934년 7월 22일 존 딜링거는 FBI와 대치 중 총에 맞아 사망했다. 딜링거의 죽음은 갱스터 시대의 종말이라 종종 묘사된다고 한다. 딜링거는 악랄하면서도 악명 높은 도둑으로 10명의 사람을 죽였고, 7명에게 상해를 입혔다. 그는 은행과 경찰서를 털었고 총 3번의 탈옥을 시도했다. 1934년 딜링거가 사망한 지 12시간이 지났을 때 치과 의사 헤럴드 메이는 석고 품질을 시험하기 위해 시카고 쿡 카운티에 있는 영안실에서 딜링거의 데스마스크를 만든다. 

FBI의 사건 파일에서는 시카고의 모든 정치인들과 그의 동료들이 딜링거의 유해를 보기 위해 영안실에 몰려들었다고 한다. 심지어 영안실에는 딜링거의 시신을 보기 위해 수천 명의 사람들이 입원을 하려 했다는 기록까지 있다. 경찰 당국은 FBI에 데스마스크 사본을 요구했지만 FBI는 이 요청을 거절한다.

그러나 FBI 국립 아카데미가 설립되면서 딜링거 데스마스크의 복사본을 만드는 것을 허용, 아카데미의 학자들은 수년간 법의학 모델링 연구의 일환으로 데스마스크의 금형을 주조했다. 딜링거가 죽은 이후 총 4개의 석고 데스마스크가 만들어졌고 그 중 하나는 워싱턴 D.C의 국립범죄형벌박물관에, 또 하나는 일리노이주 경찰 유산 재단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의 여러 데스마스크 /flickr

데스마스크의 인기는 19세기 후반 들어 감소하기 시작했다. 빅토리아 여왕이 세상을 떠나자 빌헬름 2세는 여왕을 위한 데스마스크를 만들려 했지만 여왕 가족들의 반대로 무산되기도 했다. 인기는 시들해졌어도, 일부 예술가들은 대상이 죽은 후에도 기념으로 갖고 있을 수 있도록 '라이프 캐스트'라 부르는 손이나 발 등의 신체 부위로 만드는 라이프 마스크를 만들기도 한다고.

골상학 연구를 위해 만든 범죄자들의 데스마스크는 의과대학 박물관 등에서 볼 수 있고, 영국 런던의 국립초상화미술관에서는 아이작 뉴턴, 존 키츠 등의 모습을 담은 데스마스크 컬렉션을 소장 중이다.

많은 데스마스크가 만들어졌다가 사라졌지만 오늘날에도 볼 수 있는 전시 유물이나 누군가의 소장품이 된 것들도 많다. 미술 작품이나 조각도 아닌, 예술적 수단이나 목적이 개입되지 않았지만 떠나간 사람을 어떤 목적으로든 기록하는 것만으로도 엄연한 작품의 의미가 있다.
 

2017년 내내 뜨거운 감자였던 전안법은 현실과 다른 불합리함으로 수공예 작가들의 목을 죄어오는 올가미 같았습니다. 극적으로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많은 작가들이 한숨 돌릴 수 있게 됐지만 아직 바뀌어야 할 부분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핸드메이커는 이러한 불합리에 ‘NO’를 외치기 위해 시작됐습니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은 정말 매력적인 일입니다. 그들은 실을 꿰 엮기도, 펜과 물감 으로 그리기도, 흙을 빚어내기도, 금속을 녹여 두드리기도, 정성스런 요리를 만들어 내기도 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만들고 있는 세상을 함께 들여다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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