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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탐구] 역사상 가장 유명했던 말 화가, 조지 스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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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탐구] 역사상 가장 유명했던 말 화가, 조지 스텁스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2.04.13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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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슬재킷 Whistlejacket'을 보는 관람객들 /flickr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세상에 딱 하나뿐인 말 '휘슬재킷'을 그린 화가, 조지 스텁스는 역사상 최고의 동물화가 중 하나로 꼽힌다. 동물을 그린 화가라면 정말 많을 텐데 왜 최고라는 말이 붙었냐는 의문이 든다면 그의 그림을 보면 된다.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한 그의 말 그림은 사냥과 경마에 대한 당시 영국인들의 관심과 사랑으로 커다란 인기를 끌었다.

특히 말 그림에 있어서는 그를 능가할 자가 없었다고 한다. 낭만주의 운동의 초기 예시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그의 대표작인 '휘슬재킷'은 영국 런던 내셔널갤러리에 걸려 있다. 금방이라도 액자를 박차고 나갈 것 같은 말의 기세, 말의 움직임과 근육 하나하나까지 그의 피나는 노력이 깃들어 있다. 

'단순한'이 아닌, '대단한' 말 화가였던 조지 스텁스
 

조지 스텁스 /Public Domain

가죽공이었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스텁스의 삶의 전반적인 정보는 거의 전적으로 동료 예술가이자 절친인 오자스 험프리의 기록에 의존한다. 험프리의 비공식적 회고록은 스텁스가 험프리와 나눈 사적인 대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스텁스는 청소년기까지 아버지 일을 도왔는데, 정규 교육은 거의 받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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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는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마을에서 지나다니는 동물들을 스케치하곤 했다. 어느날 스텁스는 아버지에게 화가가 되고 싶다는 얘길 꺼낸다. 아버지는 처음엔 반대했는데, 결국 적절한 멘토 선생을 찾는 조건으로 나중에는 아들이 하는 일을 묵인했다고. 스텁스는 영국 랭커셔에 사는 판화가인 햄릿 윈스탠리에게 자문을 구하게 된다.

처음 견습 생활부터 시작했던 스텁스는 이후 예술가로서의 독학을 시작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해부학에 관심이 많았는데, 당시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많은 르네상스 시대 거장들과 마찬가지로 인간과 동물에 대한 관심을 해부학으로 돌렸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관찰을 많이 했고, 기술을 배우면서 수많은 스케치를 했다. 

그의 그림엔 말과 부유층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flickr

스텁스는 1744년 전문가 밑에서 해부학을 제대로 배워보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영국 요크로 이사를 했다. 그는 1753년까지 요크에서 초상화 전문 화가로 일하면서 요크 카운티 병원의 외과의사에게 인체 해부학을 배웠다. 그는 이 병원에서 인체 해부에 참관해 매우 정확한 드로잉들을 그렸고, 이 드로잉들은 존 버튼 박사의 『완벽한 새로운 조산제도에 관한 소고』(1751)의 도판으로 실려 출판되었다. 그는 책을 낸 것뿐만이 아닌 의대생들에게 개인 해부학 수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식견이 높았다.

1755년에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난 그였지만 고전주의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고, 자연주의의 신봉자로 남았다. 험프리는 스텁스가 이탈리아로 간 이유는 '자연은 그리스인이든 로마인이든 예술이든 그 무엇보다 훨씬 위대하다는 것'을 확신하기 위해서였다고 회고한다. 스텁스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가 남긴 예술보다 자연이 우월하다는 개인적 신념을 강화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떠난 것으로 보인다.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스텁스는 1756년 링컨셔의 외딴 농가를 빌려 1년 반 동안 말을 체계적으로 해부하고 이를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가까운 무두질 공장에서 말의 시체들을 입수하여 피를 뺀 후, 혈관에 밀랍을 채워 넣었다. 그런 후에 말을 자연스러운 모습이 되도록 자세를 취한 후, 해부를 해 가며 각 단계별로 상세하게 스케치했다. 

그는 런던으로 영구 이주한 뒤 예술가들과 학자들에게 중요 참고서가 된, 1766년에 출간된 『말의 해부학 The Anatomy of the Horse』을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스텁스의 판화가 실린 이 책은 예술적이면서도 과학적인 가치가 있는 작품으로 인정받았다. 이것은 그의 말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정확한 해부학적 연구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헌트맨과 사냥개들 /flickr

그는 해부학 연구와 더불어 수채화 연구를 하면서도 정기적으로 여행을 떠났는데, 이때부터 후원자들이 소유한 말과 망아지를 묘사한 그림들을 그렸다. 1760년대 들어 스텁스는 화가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는 작은 것에서 커다란 크기까지 모든 스케일로 작업을 했고 경주, 사냥, 사격 등의 모습을 포함한 말과 야생 동물, 초상화를 그렸다. 당시 스포츠였던 승마는 부유층들의 취미였기 때문에 활기찬 모습의 말은 주인들의 체면을 올려주는 것이기도 했다. 

당연히 그의 후원자들도 꽤 많았다. 후원자들은 스텁스의 그림이 다른 화가들의 작품보다 더 정확하며 사실적이라 느꼈다고. 1759년 제 3대 리치몬드 공작으로부터 커다란 그림 세 점을 의뢰받은 이후 스텁스는 화가로서도 재정적인 안정감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의 그림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경주나 사냥을 위해 비싼 옷을 입고 말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는 말을 먼저 그리고 배경을 그리는 것으로도 유명했는데, 먼저 각 말들을 그리고 칠한 다음 빈 배경 안에 세세하게 묘사했다. 그다음에 영국의 배경을 채워넣어 말과 어우러질 수 있게 했다. 

그는 이국적인 동물들도 많이 그렸는데, 당시 다른 화가들의 작품에서 보기 드문 세세한 부분까지 주의를 기울여 동물들을 묘사했다. 아마도 해부학을 공부했던 그의 눈썰미가 작용한 것일 테다. 

캥거루 /flickr
딩고 /Public Domain

특히 스텁스의 이 캥거루 그림은 18세기 영국인들에게는 문화적 충격이었다. 이들은 캥거루를 이때 처음 본 것이기 때문이다. 스텁스는 캥거루 말고도 딩고도 그렸는데, 호주에 사는 동물들을 묘사한 첫번째 시도였다. 딩고는 남작인 조지프 뱅크스가 1770년 제임스 쿡 중위가 호주에서 딩고들을 관찰한 것을 바탕으로 의뢰한 그림이다. 현재는 런던의 국립해양박물관이 기부금을 받아 그림을 매입했다고.

사자에게 잡아먹히는 말 /flickr
사자를 발견하고 겁먹은 말 /flickr

그는 1763년, 사자가 말을 공격하는 것에 대한 수십개의 작업을 진행했다. 30년 동안 그는 약 17개의 이미지로 사자와 말을 그리고 재해석했다. 학자들은 사자가 말을 공격하는 그의 그림을 두고 특이성, 독창성이 두드러진 18세기 영국 미술의 뛰어난 유산 중 하나라 평했다. 이 주제에 대해, 스텁스가 이탈리아에서 돌아오는 길에 모로코에 들렀다가 사자가 말을 공격하는 것을 목격한 것에서 얻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이 주제를 다룬 골동품이나 조각상 등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말도 있다.

파리 대학의 장 클레이 미술사학교수는 '그의 그림에서 보이는 동물들의 에너지, 공포가 낭만주의와도 연결되며 그의 시리즈가 늘어날수록 그 공포는 전체로 확장되는 것처럼 보인다'라 평했다. 그의 작품은 낭만주의 운동의 일부로 여겨지는데, 18세기 후반 등장한 낭만주의는 감정과 자연의 회귀를 강조했다. 낭만주의 화가들은 분노나 두려움, 경외심 등의 감정을 동물에게 투영한 작품을 제작했고 스텁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휘슬재킷' /flickr

그의 그림 중 독보적인 '휘슬재킷'은 1762년부터 시작된 그의 초기 말 초상화 중 하나다. 휘슬재킷은 스텁스의 후원자였던 2대 로킹엄 후작이 좋아하는 말이었다고 하며, 그의 주된 관심사는 경마와 도박이었다고 한다. 앞발을 땅에서 들어올린 채 뒷다리로만 서 있는 이 말은 광기어린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이 그림은 사람 없이 말만 등장하는 그림 중에서도 좋은 평을 받는데, 후작의 소유물인 말을 훌륭히 묘사했기 때문이라고.

말의 탄탄한 몸통을 비롯해 갈기와 꼬리의 푸슬거리는 느낌까지 가감없이 그대로 볼 수 있다. 만일에 사람이 올라탔거나 옆에 서 있었더라면 말의 온전한 모습을 보기 힘들었을 게다. 실제로 스텁스의 말 그림들은 말을 탄 사람들보다, 옆에 서 있거나 아예 안장이 없는 말의 모습이 많다.

하나 더 특이한 점은 '휘슬재킷'에는 배경이 없는데, 그는 원래 자연 풍경을 즐겨 그렸고 하늘과 들판을 그리는 데 익숙했다고 한다. 그의 그림들에는 수많은 자연 풍경이 많았는데, 이 경우에 스텁스는 아마 배경을 그리는 것 자체가 휘슬재킷을 방해할 것이라 생각했을 수 있다는 얘기다. 

여담이지만 휘슬재킷은 꽤 활발한 성격의 말이었고 당연히 그리기도 쉽지 않았다. 스텁스도 '놀라울 정도로 다루기 힘들다'란 말을 했을 정도라고. 그리는 동안 한 소년이 말을 앞뒤로 다니게 하면서 다루고 있었는데, 스텁스가 그림을 그리고 있자 휘슬재킷은 소년을 끌고 가 그 그림에 얼굴을 들이박으려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덕분에 스텁스와 소년은 휘슬재킷이 이 그림을 망치고 다른 말들까지 공격하지 못하도록 막느라 고군분투했다고. 

싸우는 소들 /Public Domain

1770-1780년대 들어 예술성과 현실성 등이 높이 평가된 스텁스의 작품을 토대로 한 판화가 점점 더 많이 복제되며 널리 유통되었다. 그의 말 그림들은 대부분 온화하면서 따뜻한 느낌을 주지만 두 마리의 황소가 머리를 맞대고 싸우는 장면이나 사자가 말을 공격하는 일련의 작업들을 보면 그가 자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잔인함과 공격성 또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특히 사자가 말을 공격하는 그림들은 아주 본능적이며, 그가 좋아하는 이미지였다고 한다. 말년에 그는 역사적인 사건도 그림으로 다뤘지만 동물 주제에 비해서는 인기가 덜했다고. 

특이한 건 그는 '스포츠 화가'로 분류되었기 때문에 로열아카데미 정회원 자격에서 제외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그는 웨일스 왕자를 포함한 많은 귀족 후원자들의 의뢰를 받아 나이가 들어서까지 일했고, 81세의 나이로 런던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생전 사랑했던 말 /flickr

스텁스의 작품은 인기가 많았다. 그에게는 영향력 있는 후원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가 미술계에서 그토록 얻고자 애썼던 평론가들의 호평을 얻지는 못했다. 그래도 그는 활동적인 예술가였다. 그는 부유한 후원자들의 인기를 얻었고, 그의 그림의 대부분은 개인 소장품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귀족들의 성 안에서만 볼 수 있었다. 그의 작품들이 20세기가 넘어서야 세상에 공개되자 그는 더 큰 주목과, 큰 명성을 얻게 된다. 

다른 화가들이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었지만 화가 벤자민 마샬이 그의 전통을 이어 많은 사냥과 경주 작품을 남겼다고 한다. 미술계의 눈으로 봤을 때 그는 그저 단순한 말 화가로 치부되었고, 진지한 예술가로서는 무시당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막을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이 한 예술가가 이뤄낸 업적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18세기 가장 위대한 예술가들 중 하나로 자리잡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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