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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탐구] 러시아의 억압과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신념, 카지미르 말레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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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탐구] 러시아의 억압과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신념, 카지미르 말레비치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2.03.22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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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ning in the Village after Snowstorm' /flickr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2021년 12월 31일부터 현재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러시아 아방가르드 작품전 「칸딘스키, 말레비치 & 러시아 아방가르드 : 혁명의 예술전」이 개최 중이다. 아방가드르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전 세계적 위기에 경각한 지성의 반작용으로 등장한 혁신적 예술 경향으로, 이번 전시에서는 러시아 아방가르드 작품들 중에서도 1917년 러시아혁명 당시 ‘미술 혁명’을 주도했던 대표 작품들을 소개했다.

러시아의 국립미술관인 예카테린부르크 미술관 소장품들을 중심으로 크라스노야르스크 미술관, 니즈니 노브고로드 미술관, 연해주 미술관 소장품들이 함께 소개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러시아 연방 문화부에 문화재로 등록 관리되고 있는 국보급 작품들로 알려져 있다.

'절대주의' 창시자인 러시아 화가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1916년 작 <절대주의 구성 회화>를 비롯한 작품 두 점도 현재 전시되어 있다. 그런데 최근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가 이 전시 미술품을 조기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이유는 '정치적인 상황'이다. 

전시 주최자인 한국일보 측은 4월 17일까지 예정되어 있던 전시를 4월 3일까지 종료하고 작품을 반환하라는 이메일을 받았다고 전했다. 이미 대여료를 받고, 대여해준 미술품을 일방적으로 조기 반환하라는 얘기다. 전시 측은 계약 조건을 이유로 거절했지만 미술관 측은 러시아 정부 명령에 따라야 한다면서 조기 반환을 통보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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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키이우 태생의 추상화가, 말레비치

'Self-Portait' /flickr

말레비치는 현재 러시아에게 온갖 폭격을 당하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에서 태어났다. 기하학적 추상미술의 선구자이며 '절대주의'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순수추상회화가 발전할 수 있는 결정적인 토대를 마련했고 예술을 개인이 향유하는 것이 아닌 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봤다. 덕분에 후대 미술가들까지 그의 작품들에서 영감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는 폴란드 태생 부모에게서 태어났고, 이 가족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 러시아 곳곳을 돌아다녀야 했다. 당시 말레비치의 가족은 무려 10명이 넘었는데, 이 대가족을 부양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지만 다행히 부모님이 돈을 벌어 아이들을 먹여살릴 수 있었다고. 그의 아버지는 설탕 공장, 철도 건설 쪽에서 일했고 어린 말레비치 또한 10대 초반부터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했다. 다만 아버지의 직업이 자주 바뀌는 바람에 말레비치는 툭하면 이사를 해야 했고 어린 날의 대부분을 우크라이나의 설탕 농장에서 보냈다.

말레비치는 스스로 12살 무렵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2살까지 어떤 종류의 문화를 접한 적도 없고, 고전적인 미술품 하나 직접 보지 못했던 그였지만 대신 마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던 촌스러운 장식이나 집안 분위기를 밝게 하기 위해 꾸민 벽과 난로 등에 영감을 얻었다. 다만 그는 정해진 수순대로 설탕 공장의 일원이 되야 하는지, 전문 화가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어떠한 확신이 없었다.

그러다 1904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그는 자신 마음이 가는 대로 따르기로 한다. 사업은 다른 형제들에게 맡기고 그는 자신이 가장 하고 싶은 것을 하기로 결심한다. 진로를 예술 쪽으로 잡은 그는 결심이 확고해지자 1895년 키이우 예술학교를 시작으로 예술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이후 그는 스트로가노프예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이사하고, 저명한 건축가 이반 레르베르크에게 따로 개인 수업을 듣기도 했다. 
 

 'Girl with a Red Pole' /flickr

그는 모스크바의 회화, 건축, 조각 등을 계속 연구했다. 여러 화가들에게서 인상주의 기법을 배웠고 실제로 말레비치의 초기 작품들은 후기 인상주의 기법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바실리 칸딘스키, 미하일 라리오노프 등의 유명 예술가들과 친분을 쌓으며 전위 예술로의 전환을 맞이한다. 

1910년 라리오노프는 말레비치에게 '다이아몬드 잭'이란 이름의 작가 모임에 초대했고, 1912년 말레비치와 라리오노프는 다이아몬드 잭을 나와 좀 더 급진적인 성향의 '당나귀 꼬리 Donkey's Tail and Target'를 창립한다. 이 그룹은 급진적인 성향이 강해 유럽 미술의 영향을 받는 것을 거부하고 독립적으로 바로서길 원하는 그룹이었다. 이 시기 말레비치의 작품은 대부분 시골 소작농의 삶에 초점을 맞췄다. 그는 'Donkey's Tail and Target'에서 연 전시회에서 소작농들을 그린 원시주의 그림을 선보이고 난 후에 라리오노프와 인연을 끊게 된다. 
 

오페라 'Victory over the Sun 태양을 넘어선 승리'의 커스텀 디자인 /flickr

그는 종합적 입체파(Synthetic Cubism)와 미래주의의 여러 요소들을 결합한 입체 미래파(Cubo-Futurist)스타일로 작업해 공간에 존재하는 인물의 기하학적 해체를 추구했다. 그는 오페라 'Victory over the Sun 태양을 넘어선 승리'를 위한 무대장치와 의상을 맡았는데, 미래주의를 연상시키는 기하학적 형태의 화려한 무대와 의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는 1915년 '입체파에서 초현실주의로'를 내세우며 회화의 조형적인 요소를 포기하고 순수 추상화로 바뀌며 그만의 '절대주의'를 만들었다. 그가 왜 절대주의에 빠졌는지는 20세기 미술 역사상 가장 알 수 없는 미스터리 중 하나라고 우스갯소리로 말할 정도다. 
 

'Black Square' /flickr

유럽의 최신 트렌드를 편안하게 따르기만 했어도 됐을 그가 왜 절대주의라는 것을 생각해 냈을까. 가장 초기의 절대주의 작품으로는 말레비치가 만든 것들 중 가장 유명한 '검은 사각형 Black Square '과 '흰색 위의 흰색 White on White'이 있다. 말레비치는 예술이 개인의 즐거움과는 상관없이 스스로 발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즉 예술은 사람들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마치 별이 하늘에서 빛나는 것도 사람들을 위해 빛나는 것이 아닌 그저 자신 스스로 빛나고 있다는 얘기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논리나 이성을 가지고 작품을 분석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예술 작품의 의미는 순수하게 느끼는 감정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검은 사각형'에서 그는 사각형은 감정의 표현이며, 흰색은 감정이 없는 무감각이라 생각했다고. '검은 사각형'은 그의 최초의 완전한 추상 작품이며 거의 뒤샹의 '변기'에 버금가는 충격을 준다. 그는 다른 그림에서도 자신의 서명으로 이 작고 검은 사각형을 사용했다. 그만큼 검은 사각형이라는 것이 그에게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검은 사각형' 을 보고 있는 관람객 /flickr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은 현실에 기반을 두지 않은 최초의 완전한 추상으로서 세계미술사에서 혁명적 전복을 시도한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여겨진다. 말레비치는 새로운 시대의 회화가 외부 세계의 어떤 것도 재현하기를 원하지 않았는데, 세상의 최고 진리는 100퍼센트 순수한 형상, 즉 어떤 것도 재현하지 않는 순수한 도형으로만 표현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회화의 가장 본질적이고 정신적인 핵심을 찾기 위해 인물, 풍경, 사건, 이야기, 신화와 같은 대상이 없는, 극단적인 절제를 통해 아주 단순한 기하학적 형상만 남겨 놓고 완전히 새로운 예술체계 구성을 선언한 것이다.
 

'절대주의 구성 회화 Suprematis' /flickr

말레비치는 순수한 단색의 배경 위에 원이나 사각형, 또는 십자형 등의 기본적인 기하학적 형태만을 남기고 이를 제외한 인식 가능한 형상의 흔적들을 모두 제거했다. 이로 인해 말레비치는 그가 '쓰레기가 가득한 연못'이라 생각했던 아카데미 미술로부터 해방된 형태를 창조하게 된다. 그의 1916년 작품인 '절대주의 구성 회화'는 2008년 뉴욕 소더비에서 6000만 달러에 팔려 러시아 미술 작품 중에서는 경매 역사상 가장 비싼 가격을 기록했다. 이후 2018년 다시 크리스티 경매장에 나와 8,580만 달러에 판매되며 앞선 기록을 경신하기도 했다.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며 부르주아적 표현을 버리고 급진적 추상화의 세계를 가르쳤다. 1919년 말레비치가 비테프스크 공립 미술 학교에서 설립하고 지도해 만들어진 'UNOVIS'는 절대주의 양식의 러시아 예술가 단체로, 처음에는 학생들에 의해 'MOLPOSNOVIS'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졌으며 예술의 새로운 이론과 개념을 탐구하고 개발하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한다. 말레비치의 지도를 통해 UNOVIS로 이름을 바꾸고 그의 예술 관념인 절대주의에 초점을 맞춘 많은 프로젝트와 출판 활동을 진행했다. 

UNOVIS라는 이름은 "새로운 예술의 옹호자"라는 뜻의 러시아어 "Utverditeli Novogo Iskusstva"의 줄임말이다. 이는 러시아 뿐만 아니라 해외의 전위 예술에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고. 이 그룹은 어떤 개인도 자신의 이름으로 서명을 하지 않고, 이 그룹의 이름으로 서명하는 관습이 있었다.
 

그의 석고 작품인 아키텍톤 /flickr

20세기 초 그는 아키텍톤이라 불리는, 유토피아적이고 미래주의적인 건축 모델에서 그의 절대주의를 발전시킨다. 말레비치는 건축에도 관심이 많았고 미래적이며 기하학적인 도시의 모습을 하얀색 석고의 작은 직사각형 조각들로 만들었다. 말레비치는 이 조각들을 폴란드와 독일 전시회에 가져갔고 현지 예술가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다만 당시의 소비에트 러시아에서는 이와 다른 문화적 흐름이 생겨나고 있었다. 

1920년대 국가가 후원하는 사회주의 예술이 출현했고, 이것은 다른 예술 운동을 자연스럽게 억압하게 된다. 러시아의 예술은 공산주의의 바탕을 두고 있었고 그 개념에서 벗어난 모든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스탈린 정권이 떠오르며 말레비치의 미학은 자연히 사회 질서를 파괴하는 것으로 여겨져 제재를 받는다. 1930년 키이우에서 열린 말레비치 회고전은 폐쇄되었고, 말레비치는 당국에 체포되어 그의 새로운 미술 형식의 이데올로기를 설명하라는 요구를 받게 된다. 

그는 두 달 뒤에 풀려났지만 예술적인 자유를 끊임없이 위협받아야 했다. 예방책으로 말레비치와 그의 친구들은 작품 일부분을 태워야 했고 그의 그림에는 추락, 반소련적이라는 경멸적인 구호가 붙어 다녔다. 프랑스 화가 알렉상드르 브누아 장 뒤페를 포함한 여러 비평가들의 그의 예술을 두고 삶과 자연, 사랑 등 모든 선한 것에 대한 부정이라 비웃었고 말레비치는 이 비판에 대해 '예술은 굳이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그런 적 또한 없다'라 답했다. 
 

'Head of a peasant' /flickr

그러나 계속되는 억압에 그는 어쩔 수 없이 추상을 포기하고 구상회화로 돌아간다. 공립학교와 전시회에 출입할 수 없었던 그는 소작농을 그리던 예전의 모티브로 돌아왔고 친구와 가족들의 초상화도 가끔 그렸다. 이후 그는 1933년 암 진단을 받았고, 1935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기 전 자신이 쓸 관을 디자인했는데, 관 뚜껑을 검은 사각형과 원으로 장식했다. 그의 친구와 제자들은 생전 말레비치가 원했던, 무덤에 찾아올 방문자가 목성을 볼 수 있는 망원경인 아키텍톤으로 무덤을 덮는다는 소원까지는 이루어 주진 못했다.

그의 장례식 때 추모객들은 검은 사각형이 새겨진 깃발을 흔드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는 모스크바 인근에 있는 넴시노브카의 떡갈나무 아래에 묻혔다. 그러나 그의 무덤은 제2차세계대전 중에 파괴되고 2013년 고급 아파트가 들어서며 현재는 그의 무덤을 찾아볼 수 없다. 그의 작품이 일반에게 공개된 건 1988년 고르바초프가 통치하던 때였고, 이전까지는 그의 작품 중 몇 점만 미국에서 간신히 볼 수 있었다. 이 중에서 몇 점은 뉴욕현대미술관(MoMA)의 초대 관장 알프레드 바의 특별 조치에 의해 독일에서 밀반출되었던 것들이었다. 

 

'Reservist of the First Division' /flickr

현재 전시중인  「칸딘스키, 말레비치 & 러시아 아방가르드 : 혁명의 예술전」에 러시아 측이 요청한 작품 반환 요구를 두고 한국일보사 측은 "당초 계약 조건대로 전시 일정을 마쳐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어쨌든 전시회 측은 정당하게 대여료를 지불하고 전시회를 연 만큼 계약 조건과 비용 문제 등을 문제로 들 수밖에 없다. 러시아 측은 미술품 회수를 위해 항공기까지 띄운다고 하는데, 정말 가져가겠다고 한다면 비행기 띄워 올 시간에 차라리 위약금을 지불하는 게 도리에 맞지 않겠는가 싶다. 전시회 측은 정당하게 돈을 내고 전시를 열고 있는데 가져가는 측에서 아무 이유 없이 그저 가져가겠다고 생떼를 부리는 것도 억지이니 말이다. 

러시아가 자신들의 것이라 주장하는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태어나 사회주의 예술에 저항하다 세상을 떠난 말레비치가 이 상황을 보고 있다면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한 부분이다. 공산주의가 그의 예술을 인정하지 않고 제재를 가했어도 말레비치는 그의 절대주의를 지켰다. 아무리 자유를 막고, 이미 말레비치가 세상에 없다 해도 그의 작품이 남아 그를 세상에 존재하게 만든다. 때로는 어떤 억압을 가해도 결코 꺾을 수 없는 신념이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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