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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짜는 대나무와 아름다운 패턴의 만남, 채상장 서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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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짜는 대나무와 아름다운 패턴의 만남, 채상장 서신정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2.03.21 09: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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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신정 장인의 작품인 차바구니와 다기함, 소반 /김서진 기자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8월 28일까지 서울공예박물관에서 개최하는 '이 땅의 풀로 엮는 초경공예'전에서는 수많은 짚풀공예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이 전시에서는 채상장 서신정 장인의 여러 작품도 볼 수 있는데, 서신정 장인은 국가무형문화재 故 서한규 선생의 뒤를 이은 유일한 채상장 기능보유자다.

전남 담양에 있는 채상전시관에 가면 서신정 장인과 남편 김영관 장인, 아들 김승우 작가가 만든 채상 공예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채상을 가업으로 잇고 있는 한 가족으로, 김영관 장인도 채상을 배운 지 20년이 훌쩍 넘었다. 김승우 작가는 채상장 전수자 과정을 마치고 이수자로서 부모님과 같이 일하고 있다. 

아버지를 따라 시작한 일이 업이 되기까지

채상 작업 모습 /국립무형유산원

얇게 떠낸 대오리를 갖가지 색으로 물들여 짜면서 다채로운 무늬를 놓은 것을 채죽상자라 부르며, 채상이란 단어는 채죽상자의 준말이다. 큰 상자 안에 3개 또는 5개의 작은 상자가 크기대로 차곡차곡 들어가도록 만들어졌고, 큰 상자 안에 들어가는 상자의 개수에 따라 3합 또는 5합상자로 불린다. 채상장은 얇게 떠낸 대나무 껍질인 피죽을 색으로 물들인 다음, 아름다운 무늬가 배치되도록 엮어서 상자를 만드는 장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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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상의 역사는 2세기경으로 추정되는 다호리 출토의 대나무 상자와 대고리에 옻칠을 입힌 채협총 출토의 채화칠협 등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우리나라 죽세공 가운데 그 세공과 화려함이 무엇보다 두드러진 채상은 대나무를 다루는 지역이라 해서 모두 생산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특정 지역을 지목하여 제작하도록 권장했다. 각기 지역에 따라서 다른데, 우리나라 중부 이북 지역에서는 싸리나무와 버드나무로 만든 고리가 주를 이루며 남부지역에서는 대나무로 만든 고리가 일반적이다. 

특히 대나무의 주산지인 전라남도 담양군에서는 오래전부터 대나무로 만든 고리 제품이 특산품 가운데 하나다. 예로부터 담양은 기후와 토질이 대나무 생육에 알맞아 전국에서 죽림면적이 가장 많은 지역으로 이곳에서 자란 대나무로 만든 담양죽제품은 재질이 단단하여 무겁고 표면이 매끄러워 대나무 제품으로는 전국은 물론 전세계적으로 단연 으뜸이라고 한다. 
 

채상 공예품 /국립무형유산원

특히 채상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궁중과 귀족계층의 여성들이 귀하게 여겼던 안방가구의 일종이었다. 얇고 가늘게 쪼갠 대나무에 빨강, 파랑, 노랑의 색깔을 채색하여 만든 상자는 처녀들이 시집갈 때 혼숫감을 담거나 여인들의 반지그릇, 보석함, 임금이 승하할 때 서울에 봉물을 담아 보내는 용도 등으로 사용했다. 

이렇듯 채상은 고대 이래로 궁중과 귀족 계층의 여성들이 귀하게 여기고 애용했던 안방 가구의 하나였으며 조선시대 말기에는 양반사대부가 뿐만 아니라 일반 서민층에서도 채상이 혼수품으로 유행했다고 한다. 화려하고 토속적인 색 구성과 정교한 제작 기술로 인해 민속 공예품으로서의 가치가 높아, 목가구가 일반화된 이후에도 혼수품 등 특수한 용도로 전용되면서 지속적으로 발전했다.

채상은 1970년대 중반부터 플라스틱 제품이 일반화되면서 다른 죽제품과 같이 수요가 줄었다. 1930년대 10여호 정도가 채상일에 종사하다가 1975년 이후로는 단 1호만이 작업을 계승하고 있었다. 이에 채상 기술의 명맥이 끊길 것을 우려해 정부에서는 채상장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 김동연 선생을 초대 기능보유자로 인정하게 된다. 그 뒤를 이어 1987년 故 서한규 선생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인정받았다. 
 

故 서한규 선생 /국립무형유산원

故 서한규 선생은 서신정 장인의 아버지다. 서한규 선생은 초등학교 졸업 후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집안의 죽물 제작 일을 돕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죽세공을 배울 수 있었다. 그는 외할머니의 채상을 보고 연구를 시작했고, 젊은 시절 수많은 실패와 시련을 거듭하였으나 지속적인 실험과 노력을 통하여 다수의 공모전에서 수상했다. 이로 인해 선생의 대나무 다루는 기술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어 1987년 국가무형문화재 채상장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그는 자신의 채상 기술을 딸인 서신정 장인을 포함한 여러 제자들에게 전승하며 채상의 전통 계승과 보급에 평생을 헌신했다. 서신정 장인은 이런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고 자랐는데, 그가 채상장으로 아버지의 뒤를 잇기로 한 것은 채상 장인이 되겠다는 생각보다 그저 아버지의 일을 돕고 싶어서 시작한 것이었다.

채상은 원래 남자와 여자가 2인 1조로 하는 작업으로, 남자가 대나무를 베고 갈라 대오리를 만들면 여자는 그 대오리를 짜는 일을 맡았다. 그런데 아버지는 혼자 그 일을 다 한 셈이니 이왕 딸인 자신이 쉬는 동안 아버지를 도와드리자고 했던 것에서 그의 채상 일이 시작된 것이다. 원래 미대 진학을 목표로 했을 만큼 미술에 관심이 많았던 그였지만 대나무를 얇게 뜬 대오리를 접하기 시작하면서 벌써 40년이 넘게 이 일을 해왔다. 서신정 장인은 워낙 손재주가 좋아 매일 새벽 1-2시까지 채상을 붙들고 작업했다고 한다. 옛 문헌도 공부해 가며 50여가지 문양을 복원하고 개발했다.

화학 염료로 대오리를 염색하던 것에서 천연 염색으로 방식을 바꾸고 전통 색인 오방색을 사용한 것도 그의 아이디어다. 그가 수백번 시도하고 실패할 때마다 서한규 선생은 그에게 왜 쓸데없는 짓을 하냐고 걱정했지만 서신정 장인은 그저 그 작업 자체가 즐거웠다고 회고한다. 서신정 장인은 자신의 아버지가 채상을 업으로 삼으며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하루종일 대나무를 쪼개고 댓살을 엮는 작업은 아버지에겐 힘든 작업이었고, 그렇다고 돈벌이가 되는 직업도 아니었다.

특히나 담양은 대나무가 많았던 곳이라 이 곳을 떠나야 채상과 연을 끊을 수 있다고 이사도 하고 다른 직장에 취업도 해 봤지만 그의 아버지는 도저히 대나무를 떠날 수 없었다고 한다. 그에게 대나무가 운명이었던 만큼 서신정 장인에게도 숙명이 되었다. 아버지는 그에게 한번도 칭찬을 해 준 적이 없었는데, 유일하게 2012년 서신정 장인이 무형문화재 채상장 보유자로 인정받았을 때 눈물을 보였다고 한다. 
 

화려한 무늬 /국립무형유산원

그는 채상의 매력으로 여러 색을 섞어 고급스러운 색을 만들어 내는 것을 꼽았다. 당시 아버지와 만들던 패턴은 두 가지였는데 문헌에는 12개의 패턴이 있었고 재현하지 못하던 상황에 서신정 장인이 긴 연구 끝에 그 패턴들을 복원했고, 현재는 약 50개의 패턴을 개발한 상태다. 옛 채상 작업이 단순한 상자나 바구니에 그쳤다면 그는 채상을 현대적으로 해석해 핸드백, 도시락, 모빌, 벤치나 의자에도 채상을 덧입혔다. 
 

서신정 장인과 아들 김승우 작가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현재 서신정 장인의 남편인 김영관 장인과, 아들인 김승우 작가도 채상 일을 함께 하고 있다. 김영관 장인은 원래 광주에서 인쇄소를 운영했는데, 기계만 한번 돌리면 수천장이 찍혀 나오는 인쇄물에 비해 몇 개월에 걸쳐 하나의 작품이 탄생하는 채상을 처음에는 답답하게 생각하기도 했다고. 그러나 아내의 설득 끝에 장인 어른에게 채상을 배웠고, 20년 넘게 같이 채상 작업을 하고 있다.

아들 김승우 작가는 외할아버지부터 시작해 아버지까지 걸쳐 대오리를 만지는 것을 보고 자랐다. 독립을 하면서 일상처럼 생각했던 채상 일이 그에게는 다르게 다가왔고, 외동아들인 자신이 이 일을 잇지 않는다면 가업이 끊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외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까지 일을 배워보고 싶다고 해 채상장 전수자 과정을 거쳐 지금은 이수자로 활동하고 있다. 전주국립무형유산원 '무형유산 전통공예 창의공방'에 입주해 평일에는 전주에 머물며, 소목·누비·염색 등 다양한 분야의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들과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건축 전공을 살려 인테리어에 채상을 접목하는 작업을 한다. 

이들의 작업은 분업으로 이루어지며, 가족 소유의 작은 대밭에서 베거나 죽물 시장에서 구한 대나무로 김영관 장인이 대를 뜨면 서신정 장인이 천연 염색하고 기물을 짜며, 다시 그걸 김영관 장인이 이어받아 테를 두르고 마감하는 식이다. 

채상 작업 /국립무형유산원

서신정 장인은 치자·쪽·잇꽃·갈매 등으로 천연 염색을 하며 사용되는 문양 또한 태극 문양, 수(壽), 복(福)등 총 50여종의 문양으로 작업한다. 채상 작업은 대나무를 절반 너비로 쪼개고 이를 다시 또 절반으로 수차례 쪼개어 너비 약 7mm의 댓가지를 만드는 데서 시작한다. 그 후 이 댓가지를 깎아내 좀 더 매끈하고 폭을 좁게 만드는 작업(조름빼기)을 거친다. 다음으로 댓가지를 대올 즉, 대나무로 만든 실이나 끈처럼 얇게 뜨는 작업(대올뜨기)을 한다. 보통은 댓가지 한쪽 끝을 입에 물고 칼로 대올을 뜨는데 그 두께에 따라 채상의 품질이 결정된다고 한다. 채상 작업에서 가장 어려운 과정으로, 최대한 얇고 고르게 뜨는 것이 관건이다.

그 후 대올을 물에 담가 불려 놓았다 받침대와 칼 등을 이용해 ‘훑는’ 과정을 거친다. 한 가닥씩 대올을 훑어 종잇장처럼 더 얇게 뽑아내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자칫 잘못하면 얇은 대올이 쉽게 끊어지기 때문에 숙련된 솜씨와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대올을 염색할 때 치자(노란색)와 같은 천연염료를 이용해 색을 내고 명반물로 착색을 한다. 채상을 만들 때 연한 색은 바탕색으로 쓰이고, 진한 색은 문양을 내는 데 쓰인다.

갖가지 색으로 물들인 대올이 마련되면 본격적으로 ‘채상짜기’가 시작된다. 먼저 겉상자를 짜고 다음에 속상자를 짜는데 상자의 바탕이 되는 부분은 기본적으로 세 올 뜨기 방식으로 대올을 엮는다. 반면 문양이나 글자를 넣을 부분에는 그 모양에 따라 한 올 뜨기부터 다섯 올 뜨기까지 다양하게 놓게 된다.

채상짜기는 바닥을 이루는 부분을 먼저 짠 뒤 이를 토대로 상자 옆면을 접고 상자의 귀 부분을 엮어 나가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겉상자와 달리 속상자는 바탕무늬와 어울리는 색깔의 비단으로 테두리를 감싸 붙여 아름답도록 꾸민다. 속상자 안쪽에는 두 겹으로 한지를 붙이는데 이는 대나무 올에 옷이나 물건이 긁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또한 상자의 네 귀퉁이에도 비단을 붙여 귀퉁이가 쉽게 닳는 걸 방지하는 한편 멋스러움을 더할 수 있다.

채상 작업 /국립무형유산원
완성된 작품 /국립무형유산원

서신정 장인은 “문화재청과 담양군의 지원으로 지어진 채상전수관에서 채상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군에서 전기세 정도로 약 500여만원이 지원되고 있지만, 고가인 채상을 판매해서 운영하기에는 어려운 상황으로 관광상품을 판매해 운영하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로 채상3합의 경우 가격이 천만원대까지 간다. 서신정 장인과 김영관 장인이 한달을 넘게 걸려 수작업으로 만드는 작품들이며 1년간을 꼬박 매달려도 12개를 만들기는 쉽지 않다.

재정 문제로 인해 현대적인 생활 소품을 개발하고, 기획 전시회를 여는 등의 노력을 하고 있지만 전수자와 이수자도 부족한 상황이라 서신정 장인은 이 길에 아들이 함께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3대째 이어지는, 험난하고 고된 길이긴 하지만 우리 조상의 뛰어난 기술과 정성스러운 마음이 담겨 있는 우리나라 죽세 공예품의 정수가 바로 채상이라 강조하는 그는 오늘도 가족들과 함께 채상 공예의 전통을 지켜 나가고 있다. 
 

2017년 내내 뜨거운 감자였던 전안법은 현실과 다른 불합리함으로 수공예 작가들의 목을 죄어오는 올가미 같았습니다. 극적으로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많은 작가들이 한숨 돌릴 수 있게 됐지만 아직 바뀌어야 할 부분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핸드메이커는 이러한 불합리에 ‘NO’를 외치기 위해 시작됐습니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은 정말 매력적인 일입니다. 그들은 실을 꿰 엮기도, 펜과 물감 으로 그리기도, 흙을 빚어내기도, 금속을 녹여 두드리기도, 정성스런 요리를 만들어 내기도 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만들고 있는 세상을 함께 들여다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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