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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판에 새기는 예술, 스텔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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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판에 새기는 예술, 스텔레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2.02.28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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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텔레 /flickr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지중해의 여러 나라나 고고 유적에서 공공장소에 세워진 고지판, 또는 경계 표지판, 묘비 등을 스텔레라고 부른다. 동양의 석비를 번역할 때에도 이 말을 쓰며 대표적인 유물로는 광개토대왕릉비 등이 있다. 나무나 도자기도 있고, 천연 바위에 만든 것은 암벽 스텔레라 부른다. 

이집트에서는 전쟁, 건조, 공납, 즉위, 국경 결정 등 공적 사건을 기록한 스텔레가 수도의 중요한 신전과 사건이 발생한 장소에 세웠다. 개인 것은 거의 공양한 것으로 묘의 내부나 근방, 또 특별히 숭배를 받은 신의 신전에 가까운 곳에 세워졌다. 

현존하는 공양용 스텔레의 대부분은 사자에 대한 오시리스신의 가호를 기원하고 아비도스에 세워진 것으로 아비도스 스텔레라고 불린다. 리스에서는 미케네 시대부터 있어 대강 깎은 석판을 묘의 표시로 세웠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조각으로 장식하게 되고 5세기 후반부터 죽은 사람을 가족, 친지들과 함께 조각했다. 자연히 비석의 폭이 넓어지고 인물도 둥글게 조각하는 것까지 등장했다. 

고대의 문화를 알 수 있는 징표, 스텔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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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텔레 /flickr

스텔레는 묘비를 뜻하며 '무덤'이라는 단어와 결합하면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지를 알 수 있다. 스텔레의 표면에는 문자나 장식, 또는 둘 다 있는 경우가 많으며 대개 새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한다. 법과 법령을 발표하는 내용, 또는 통치자의 명예를 기록한 내용, 영토나 재산을 표시하기 위한 형태나 전쟁의 승리를 표현할 때에도 쓰였다. 메소포타미아나 그리스, 이집트를 비롯해 마야 지방에서도 돌무덤이나 비석은 흔하게 발견됐다.

많은 스텔레는 매장지 근처에서 발견되어 자연스럽게 무덤이나 공동묘지, 기념물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기도 했다. 상형문자와 같은 옛 언어들이 현대에 와 번역이 되며 학자들은 비문이 여러 목적으로 사용된 것을 알게 된다. 수메르에서 스텔레는 사회의 법칙을 대중들에게 알리는 칙령으로도 쓰였고, 아시아에서는 과거의 유산을 보존하고 후대에게 남기는 역할을 했다. 

또 메소아메리카의 스텔레는 대도시의 경계 표시였고, 마야인들은 달력을 만들기 위해 스텔레를 사용했다고 한다. 아테네 사람들은 무덤의 표시를 단순하게 했고, 조각가들은 무덤에 세울 기념물을 만들기 시작했다. 6세기부터는 죽은 사람의 생전의 옆모습을 새겨 팔메트 등의 장식 무늬를 넣기도 했다. 

아리스티온의 묘비 /flickr

아리스티온의 묘비는 조각가 아리스토클레스가 대리석으로 만든 것으로 아티카 지방의 벨라니데자에서 발견됐다. 아테네 국립 고고학 박물관이 소장 중이며 그리스 후기 최고의 조각들 중 하나다. 가장 윗부분은 없어진 상태로 기단 위에는 죽은 사람의 이름을 '아리스티온'이라 새긴 글자가 있다. 아리스티온은 오른쪽을 향해 서 있으며 수염을 기른 군인으로 묘사된다. 짧고 얇은 키튼을 착용하고 있으며 여러 장식와 어깨에는 별 무늬가 눈에 띈다.

묘비에는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 물감을 바른 흔적이 남아 있다. 특히 바닥, 어깨의 휘장 등에 붉은 안료를 칠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래라면 묘비의 색은 파란색이고, 머리카락은 어두운 색으로 칠했을 것이란 설이 있다. 아리스티온은 아티카 헬멧을 쓰고 있으며 왼손에는 창을 들고 있다. 휘날리는 수염의 물결 모양, 머리카락, 팔다리와 가슴의 근육 등 디테일한 묘사가 돋보인다. 헬멧의 윗부분, 턱수염 끝부분은 분실되어 따로 조각해 비석에 추가한 것이다.

발 아래 빈 공간에는 조각가의 이름이 씌어 있다. 아리스토클레스의 작품이라는 뜻인 '아리스티오노스'가 새겨져 있다. 이 이름은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안 성벽 유적지에서 발견된 조각상 바닥에도 새겨져 있다. 비문은 그리스어로 되어 있지만 죽은 사람의 이름은 카리아어로 씌여 있다. 특히 팔 윗부분과 허벅지 사두근의 디테일이 뛰어난데 조각을 한 아리스토클레스와도 관련이 있다. 참고로 아리스토클레스는 장례 관련 조각을 전문으로 했다고.

아리스티온이 누구인지는 여러 설이 많은데 그리스에서 가족 내에서 비슷한 이름을 쓰는 걸 좋아했다는 성향 때문에 이 비석을 조각한 아리스토클레스가 고인의 친척이라는 설도 있으며 조각가인 '파로스의 아리스티온'이라는 설도 있다. 

헤게소의 묘비 /flickr

고전기 스텔레의 대표적 작품으로는 헤게소의 묘비가 있다. 고대 그리스의 학자, 시인이며 에피메니데스의 후배인 칼리마크스에 의해 만들어졌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아티카 스텔레 중 가장 훌륭한 것으로 유명하다. 모두 펜텔릭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붙임기둥과 팔메트 장식을 한 페디먼트가 눈에 띈다. 아테네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1870년 아테네 케라메이코스에서 발견됐다. 프로크세노스의 딸 헤게소와 코로이보스를 위한 기념물로 외형이 복원되어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키톤을 착용한 성숙한 여인 헤게소가 클리스모스 의자에 앉아 발판 위에 발을 얹고 있는 모습이다. 의자의 존재는 그리스에서는 계급의 표시이며, 부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발판과 결합해 부유한 귀족 여성의 느낌을 낸다. 발판으로 인해 헤게소는 절대 땋에 발이 닿지 않는다. 그의 왼손은 피크시스(회양목으로 만든 상자)를 들고 있고 오른손은 원보석 조각을 든 채 생각에 잠긴 모습이다. 언뜻 보면 시종이 선물한 보석함의 내용물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느낌이다.

파크시스는 일반적으로 신부를 위한 선물로, 여성이나 결혼과 관련된 물건이라 한다. 맞은편에는 튜닉을 입고 머리 장식을 한 시종이 서 있다. 시종은 헤게소의 무릎을 향해 피크시스를 바치고 있으며, 비문에는 고인이 헤게소라는 글이 씌어 있다. 헤게소는 아프로디테를 모델로 해 헤어스타일도 정교하며 단정하게 묶인 머리를 하고 있고, 단순한 헤어스타일을 가진 시종보다 위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헤게소의 옷과 헤어스타일 모두 그의 젊음, 미모, 아름다움을 강조한다.

헤게소는 단순한 사람일 수도 있고, 여신으로도 볼 수 있으며 시종도 피크시스를 바치는 예배자로도 볼 수 있다. 즉 예배자가 무덤에 제물을 바치고 있는 것인지, 죽은 자의 세계에 이 두 사람이 있는 것인지는 해석의 여지가 분분하다. 어쨌든 묘비에서 헤게소는 높은 신분의 인물이었음을 암시하는 요소가 많으며,  그를 기리는 묘비가 세워졌을 정도로 중요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헤게소의 묘비 /flickr

다만 헤게소가 프로크세노스의 딸인지, 부인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딸로 보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헤게소의 묘비는 순수한 여성의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지만, 특정 여성의 개별적인 삶을 그리기보다는 사회적 틀 안에서 여성이 어떤 모습인지를 정의하는 것이기도 하다. 부귀를 상징하는 물품에 둘러싸여 있고 시종까지 있으니 자연스럽게 어떤 이미지인지를 연상할 수 있다.

고대 아테네 여성들은 시민들로 간주되지 않았기에 외부 행사에 많이 참여할 수 없었다. 좌우의 기둥은 마치 그녀를 감옥에 갇힌 것처럼 보이게 하고, 꼭대기의 페디먼트는 그가 가정적인 배경에 있음을 알게 한다. 페디먼트에 프로크세노스와 헤게소의 이름이 씌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전문가들은 당시 아테네의 상황을 주목한다.

헤게소는 단독이 아닌, 프로크세노스라는 아버지와 같이 언급되어야만 개인으로 식별되는 것이다. 비문의 상태는 양호하지만 헤게소가 들고 있던 보석은 무엇이고, 비문에 씌어 있는 세부 사항은 정확히 어떤 내용인지는 아직 알 수가 없다. 즉 헤게소의 묘비는 죽은 사람을 기리는 것뿐만이 아닌 부와 지위를 나타내는 지표이기도 했다. 

케라메이코스의 묘비 /flickr

그리스의 케라메이코스는 '케라메이스'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도공'을 뜻한다. 유적지의 내부는 도공의 구역, 외부는 고대 묘지로 나뉘며 성벽 바깥쪽은 1870년 독일 고고학자들이 1,000여개의 무덤을 발굴하면서 알려졌다. 케라메이코스의 묘비는 무덤 표식으로 사용된 조각상들의 집합체라 할 수 있다. 초기 청동기 시대부터 케라메이코스에서 무덤의 표식으로 묘비를 사용하는 것이 인기를 끌었다고.

처음에는 고인을 묻은 표시로 썼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 양식이 도입되고 석비는 다양한 형태와 디자인을 가지게 된다.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게 높은 기반을 세우고 석비를 세우기도 했다. 도공들의 구역이었던 만큼 도자기부터 여러 이야기들을 묘사한 것까지 여러 가지다. 석비에는 고인의 이름과 출생지가 새겨져 있고, 몇몇 석비는 기둥과 페디먼트가 있는 나이스코스 양식을 차용했다. 

케라메이코스의 묘비 /flickr

대개 석비는 대리석이나 석회암으로 만들었으며 고인의 친척이나 노예와 같은 사람들을 같이 조각하기도 했다. 무덤을 장식한 부조는 고인의 용맹함, 또는 부를 나타내는 이미지를 사용해 돋보이길 원했다. 석비는 주로 아테네의 남자들, 전사들의 무덤을 표시했다. 파우스니아스 왕의 스파르타 군대도 케라메이코스에 묻혔다고 한다. 여성들도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부유하거나 똑똑한 여성들이 석비를 올릴 수 있었다. 많은 석비들은 현재 케라메이코스 고고학 박물관에서 전시 중이다. 

광개토대왕릉비 /국립중앙박물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스텔레는 현재 중국 길림성 통화시 통구에 있는 광개토대왕릉비를 들 수 있다. 광개토대왕의 훈적을 기념하기 위해 아들인 장수왕이 세운 비석으로 고구려사뿐이 아닌 우리나라 고대사 최고(最高)의 금석문으로 평가받는다. 1877년 관월산이라는 사람이 민간을 방문하다가 광개토대왕릉비를 발견하였다고 하며, 당시 비 전체가 이끼에 덮여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곳만 부분적으로 탁본을 떴다.

관월산이 자신이 뜬 탁본을 금석문 애호가들에게 소개하면서 광개토대왕릉비의 존재는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 이끼에 덮여 있는 상황에서는 제대로 된 비의 탁본을 뜨기 곤란했기 때문에 이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마을 사람 초천복이 비의 표면에 말똥을 바르고 마르기를 기다려 불을 지르는 방법으로 이끼를 제거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비의 몸에 균열이 가고 일부 표면이 터져 나가는 등 심각한 손상이 발생한 것이다.

시간이 많이 흐르면서 자연 마모가 된 데다 이 때문에 비면이 크게 훼손되었고, 이후 비면에 석회를 바르고 탁본을 거듭해 훼손은 계속됐다. 설상가상 1960년대 비면에 대한 화학적 보존처리로 상태는 더욱 악화되어 현재는 원래 글자를 알아보기 힘든 곳이 많다.

광개토대왕릉비는 각력응회암 석재를 사각형의 기둥 형태로 다듬은 비석이다. 너비나 표면이 고르지 않아 돌을 다듬었다기보다는 자연석의 느낌이 강하다. 하부에는 화강암 기단을 설치하고 홈을 파 비신을 세웠다. 네 면에는 모두 글자가 새겨져 있고, 글자 간격을 균등하게 새기기 위해 종횡으로 바둑판처럼 가는 선을 그어 공간을 나눴다. 전체 글자수는 1,775자로 추정하며 비석에 손상이 가 150여 자 가량은 해석이 불분명하다. 당시 동아시아 국제 정세와 고구려의 위치를 상징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함무라비 법전 /flickr

스텔레는 비문을 포함해 고인이 누군인지에 대한 정보와 함께 여러 이미지들이 새겨져 있어 학자들에게 고대 문화의 관습이나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증거였다. 법전을 설명하는 비문인 함무라비 법전이나 이집트 상형문자 번역의 열쇠가 된 로제타석도 스텔레에 속한다. 많은 스텔레들은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 부와 명예를 가진 사람들을 알리는 표식이나 기념물로 남아 있다. 

 

2017년 내내 뜨거운 감자였던 전안법은 현실과 다른 불합리함으로 수공예 작가들의 목을 죄어오는 올가미 같았습니다. 극적으로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많은 작가들이 한숨 돌릴 수 있게 됐지만 아직 바뀌어야 할 부분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핸드메이커는 이러한 불합리에 ‘NO’를 외치기 위해 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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